역사/가야왕릉

김해 수로왕릉

도화골 2015. 10. 3. 08:46

 

 

수로왕릉(首露王陵)

 

소재지 : 경남 김해시 서상동 312 (김해시 가락로 93번길 26)

 

사적 제73호. 원형봉토분으로서 봉분의 높이는 약 5m에 이른다. 이 능은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소재지와 위치가 부합되고 있어서 수로왕릉으로서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이 왕릉은 신라말의 이 지역 호족인 충지(忠至), 고려시대 양전사인 조문선(趙文善)과 관련한 기적(奇蹟)을 보였던 바 영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580년(선조 13)에 경상도관찰사였던 허엽이 수축하여 상석·석단·능묘 등을 갖추었고,

1647년(인조 25)에는 능비를 세웠는데 '가락국 수로왕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지봉유설 芝峰類說〉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로왕릉을 도굴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에 의하면 "광 속이 무척 넓고

두골의 크기가 구리로 만든 동이만 했다. 손발이나 사지의 뼈도 매우 컸다. 널 옆에 두 여자가 있는데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고

나이는 20세쯤 되었다. 이것을 광 밖에 내다놓았더니 금시에 사라져 없어졌다고 한다. 아마 순장된 사람들일 것이다"라고 하여

순장묘일 가능성을 짚고 있다.

1878년(고종 15)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의 현액을 내리고, 김씨·허씨 양성을 교대로 참봉을 맡게 했다.

이때 안향각(安香閣)·석양·비각 등이 설치되었으며 왕릉의 전면에는 가락루·연신루·회로당 등의 건물도 있다. 능역은

건물 15동 47칸, 임야 1만 5,170평이다.

 

김수로왕(金首露王)

개요

수릉(首陵)이라고도 한다. 김해김씨의 시조이다.

 

신화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해지고 있다.

아직 나라가 없던 때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42년 3월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의 9간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했다(→구기가).

그랬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근 황금색의 알이 6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다.

주민들이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다.

그리고 천신(天神)의 명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다. 아들 거등왕(居登王)이 뒤를 이었다.

 

신화의 해석

이 신화는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로서 우리나라 고대국가 성립기에 흔히 보이는

건국시조신화와 흐름을 같이한다. 이는 북방에서 이주한 유이민집단이 낙동강 하구유역의

토착 선주민들과 결합하여 초기 국가를 형성해나갔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수로가 6개의 알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표현은 가락국[金冠伽倻]을 중심으로

여러 가야국들을 통합하려는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3월에 목욕재계로 잡스러움을 떨쳐버리고 성스러운 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춤과 노래로 풍요와 안녕을 기원한 뒤 하늘의 권위를 부여받은 수장(首長)을 선출하는 내용에서

국가형성 이전 단계의 소박한 사회풍속과 정치운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수로왕이란 곧 이러한 단계에서 김해지역에 존재했던 수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뒤에도 수로왕은 가야의 시조로 계속 받들어졌다.

문무왕은 수로왕릉의 관리를 위해 위전(位田)을 설치하고, 능묘의 제례를 후손이 계승하도록 했다.

 

김수로왕 신화

아직 나라가 없던 때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42년 3월 하늘의 명을 받아 가락국의 9간(干)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근 황금색의 알이 6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다.

주민들이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가락국 김수로왕

수로왕(首露王, 42년(임인년) ~ 199년, 재위: 42년 ~ 199년) 또는 김수로(金首露)는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신라 유리왕 19년(42년) 가락국 북쪽 구지봉(龜旨峰)에 하늘로부터 떨어진 6개의 금란(金卵)이 모두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김수로도 그 가운데 하나로,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변한(弁韓)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9명의 간이라는 뜻인 구도간(九刀干)들이 수로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가락국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 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9척(약 2m)의 소년이 수로왕이 되었다고 하나, 신라의 최치원은 그가 천신 이비가지와 정견모주라는 여성의 아들이었다고 기록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150세 이상을 생존했다고 한다.생애
김해 김씨1대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변한의 구야국에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42년 3월 변한의 구야국 왕들인 9명의 간(干)들에게 하늘에서부터 "너희들의 왕을 내려 보낸다"라는 계시를 주고 왕을 내려보내기 위해선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의 계시를 들은 가락국 9명의 간들과 2백 3명의 백성들이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말대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고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다.

변한의 구야국 백성들이 모여들며 노랫소리가 커지자 하늘에서 빛이 나더니 곧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안에 둥근 여섯의 황금 알이 들어있었다. 12일 후 이들 금알에서 사내아이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수로였다. 9명의 간들은 그를 6가야 중 수도이자 영토가 넓은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여 주민들은 그를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또한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기록들을 수집하여 쓴 석이정전(釋利貞傳)의 내용에 따르면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의 신(神)인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명은 이름이 뇌질주일(惱室朱日)이었고, 다른 한 명은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하였다.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청예(김수로왕)는 여신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희고 갸름했으며 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은 이비가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 이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맏형이었다고 한 ≪가락국기≫에 전하는 금관가야 중심의 형제설화와는 대비되는 것이다.

석탈해와 재주를 겨룬 뒤 이겨 가락국의 왕 자리를 지켰고, 102년, 파사 이사금의 요청으로 실직곡국과 음즙벌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중재하였다. 이에 파사 이사금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다.

부인은 월지국 혹은 마우리아 왕조 공주로 추측되는 허황옥(許黃玉)이며, 189년까지 무려 158년 동안이나 살았다는 신화적 인물이다. 수로왕은 허황옥을 태우고 온 15명의 아유타국 선원들에게 450필의 비단을 내렸는데 이는 대단히 많은 물량이며 또한 옷감 450필, 쌀 150섬을 싣고 움직일 수 있는 배를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은 가야가 연안 항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뱃길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러한 물량은 단순한 하사품이라기보다 교역 물량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신라 종묘 편입 배경
문무대왕 때 수로왕의 위패를 신라의 종묘에 봉향하고 제를 올린 적이 일시적으로 있었다. 문무대왕은 김수로왕의 15대 외손에 해당된다. 이 설에 의하면 김유신 가(家)는 "구형왕 - 무력 - 서현- 유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형왕 - 세종 - 무력 - 서현 - 유신"으로 이어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문무대왕이 외가의 조상인 가락국의 김수로왕 제사에 관한 교서를 내린 사실을 전하고 있다

“가야국 시조의 9세손인 구형왕이 신라에 편입될 때에 거느리고 온 아들인 세종의 아들이 솔우공(김무력)이고, 그 아들인 서운(김서현)의 딸 문명왕후께서 나를 낳으셨다. 때문에 시조인 수로왕은 나에게는 15대 조가 된다.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 묘가 아직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사하여 제사를 계속하도록 하라. ”
 
— 《삼국유사》가락국기, 문무대왕의 특별교서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따르면 문무대왕은 가야국의 태조 김수로왕을 신라 왕실의 종묘에 합사하도록 특별교서를 내리면서, 자신을 "구형왕 - 세종 - 김무력 - 김서현 - 문명왕후"로 이어지는 외가의 후손으로 칭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무력은 세종의 아들로 구형왕의 손자가 되는데, 이는 김무력을 구형왕의 아들, 세종의 동생으로 보는 통설과는 상반된다.

탄생 신화
 가야 김수로왕에 대한 전설이나 신화에 대해서는 가야김수로왕신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에 따르면, 3월의 재계일(齋戒日)에 구지봉(龜旨峰)에 9간(干:족장 또는 왕)들이 203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하늘이 나로 하여금 이곳에 새로 나라를 세워 다스리라 명하므로, 내가 거기로 내려가고자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합(金盒)을 받았는데, 몇 시간 뒤 그 알 속에서 나온 아기들이 6가야국의 왕이 되었으며, 그 중 가장 먼저 나와 ‘수로’라는 이름으로 불린 키가 가장 큰 인물이 김해김씨의 시조이자 금관가야의 건국자가 되었다는 신화이다. 특히 이 신화는 하늘의 신이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등 9명의 간들이 부족들을 다스리는 부족(9간) 연합사회의 통치자로서 인간사회에 내려왔다는 것과, 인간사회가 그를 환영의 극치인 ‘춤과 노래’로 스스럼없이 맞아들여 왕으로 삼은 영신(迎神)신화라고 해석하고 있다.

가계
아버지 : 이비가지(夷毗訶之) - 정견모주설(正見母主設)과 난생설(卵生設)의 두 가지가 있다.
어머니 : 정견모주(正見母主)
동생 : 이진아시왕(伊珍阿豉)
국왕 : 수로왕(首露王, 42~199 재위: 42~199)
왕비 : 허황옥(許黃玉, 33~189)
아들 : 거등왕(居登王, 188~253, 재위:199~253
며느리 : 모정부인(慕貞夫人) 천부경(泉府卿)
손자 :마품왕(麻品王,馬品王, ? ~291, 재위: 253~291)
손자 며느리 : 호구부인(好仇夫人)
나머지 9명의 아들 중 2명은 허씨(許氏)의 선조가 되고, 7명은 하동칠불(河東七佛)이 되었다.
딸 : 묘견공주(妙見公主),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수로왕과 허황옥에게는 1명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처남 : 장유화상(長遊和尙) 그가 가야에 불교를 전파했다 한다. 다른 이름은 보옥선인(寶玉仙人)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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