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경남

진주성과 촉석루

도화골 2015. 7. 31. 20:25

 


 

 

진주성(晉州城)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서 본성동에 걸쳐 있는 석성으로, 삼국시대 백제 때 제작되었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 118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 내의 촉석루1604년부터는 경상우병영의 병영이었고, 1895년 5월부터는 경상도관찰사부가 경남관찰사부,

경북관찰사부로 나뉘면서 경상남도관찰사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개요]

진주성은 남강을 끼고, 외성의 둘레를 4km로 쌓고, 내성의 둘레는 1.7km에 이른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

·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소재해 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서장대, 창열사,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고,

 1984년에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국립진주박물관이 개장을 하였다.

 

[연혁]

진주성은 본래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건립되었다. 백제 때는 거열성지였으며,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1379년 고려 우왕 5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 중수되었고 주로 왜구

방어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7월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군사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

이룬 곳이며,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서예원 및 7만여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곳이다. 이때 전사한 최경회의 후처이던, 논개도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그 의개를 떨쳤다.[

진주성내 촉석루 근처에는 한때 경상우병영경상도관찰사경상북도관찰사경상남도관찰사로 나뉘자 경상남도관찰사부의

부청 소재지였다. 1604년(선조 37년) 마산 합포(合浦)에 있던 경상우병영이 진주성으로 옮겨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가 설치되고 1896년(건양 원년) 8월 경상남도관찰사 감영으로 정식 개정되었다.

이후 1925년까지는 촉석루 앞에 경상남도도청이 있었다. 촉석루 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

에서 재건하였고,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1960년 촉석루 복원을 시작으로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치고, 현재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군사,행정 기능]

1604년(선조 37년)에는 경상남도 마산 합포에있던 경상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진주성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집무를 보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설치되어 조선의 군제가 신식 군대로 개편될 때까지 경상우병영의 청사 소재지였다.

또한 촉석루와 그 주변 지역은 과거 시험 또는 생원시, 진사시, 경상우도 지역의 향시를 시행하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1895년(고종 32년) 5월부터는 경상도관찰사부가 경상북도 관찰사와 경상남도 관찰사로 나뉘면서 경상남도 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진주관찰부가 설치되고, 1896년(건양 원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촉석루 앞에 건립되었다. 이후 1925년까지

경상남도 도청으로 활용되었다. 경상남도 관찰사부는 촉석루와 함께 한국 전쟁 중에 불에 타서 사라졌다.

 

[훼손과 복원]

1905년(광무 8년) 2월 10일 진주군수 이용교(李瑢敎)가 뇌물을 수수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자 박중양진주 판관으로

부임, 민병성이 후임 군수로 부임하는 2월 20일까지 진주군수 서리를 겸하였다.

이때 박중양은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 5만 명 앞에서도 난공불락이었던 진주성은 박중양이 성첩을

 팔아먹는 바람에 나중에는 촉석루 1채 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 토지국은 진영 못을 매축하면서 진주성 외성 모두와 내성 일부를 헐어 그 공사에 충당해 버렸다.

1960년 촉석루 복원을 시작으로 1969년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진주성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1972년 촉석문을

중건하였고, 1975년에는 공북문을 복원하였다.

1979년 ~ 1984년까지 성내의 민가 751동을 보상비용을 주어 철거하였으며, 1992년부터는 성 외곽의 정비사업과 주변 시설

철거를 2000년까지 완료하고, 2002년에는 공북문(拱北門)을 중건하였다. 이후 사적 제 1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1.2차 진주성 전투]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해 10월 성내에서는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발발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3,800명의 군사와 1천여 명의 의병으로서 3만 여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제1차 진주성

전투라고도 하고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한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왜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중에서도

이순신한산도 대첩, 권율행주산성대첩과 함께 3대 첩승의 하나로 꼽힌다. 일명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 6월 일본군은 전년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10만 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진공하였다. 이때 인근에 있던 박진 등의 군사가 지원했지만 끝내 진주성은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함께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성이 함락되자 진주목사 서예원은 살해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의병장 김천일 부자, 고종후 등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진주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왜군은 항전에 참가한 2만~3만에 달하던 성민․피란민들도 일거에 학살하였다.

최경회는 다른 장수들과 모여 성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결의하고 촉석루에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임종시를 읊으며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촉석루 중에 있는 우리 삼장사(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한잔 술 마시며 웃으면서 강물을 가리키네.
남강물 출렁이며 도도히 흐르는데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

성이 함락되기 전 다른 부녀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피신한 최경회의 첩 논개는 그해 7월 7일(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기녀 행세를 하고 축하연에 들었다.

7월 7일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들어갔는데, 전설에 의하면 논개가 열 가락지를 낀

것은 왜장을 껴안되 풀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한다. 연회에 참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 등 일본군 장수들이 술에 크게 취하자

춤을추며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 자결하였다. 이후 논개가 투신한 자리는 의암이라고 불렀다.

 

[주요 시설]

진주성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역사의 보고이며, 아름다운 남강과 절벽에 지어진 진주성과의 잘

조화된 자연미를 느낄 수 있는 건축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진주성 내에는 정문인 촉석문과 후문인 공북문, 그리고 망루인 촉석루와 서장대, 북장대를 비롯하여 사찰로는 호국사가 있고,

사당으로는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 충절의 여인 논개를 모신 의기사, 임진왜란 때 전몰한 순국영령들을 모신 창열사가 있으며,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으로 명성이 높은 국립진주박물관과 문익점의 장인이자 베틀을 발명하여 의생활을 혁명을 일으킨 정천익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 등 많은 주요 시설물들이 있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 戰功碑)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499-1번지 진주성 경내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시민의 전공을 기록해 놓은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는

현재 진주성 내의 계사순의단(옛날에 충민사가 있었던 자리) 옆에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비는 받침대 위로 비의

몸통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277cm, 비의 폭 99cm이다. 1619년 7월에 비를 세웠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김시민은 1554년 8월 27일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마을에서 출생했다.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시했고,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을 맞았다. 이 무렵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김성일은 김시민으로 하여금 진주목사직을 대행토록 명했다.김시민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따라 거창으로 가

사랑암 부근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 이 공로로 1592년 7월 26일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목사 김시민은 성안의 백성들을

위로하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했으며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그해 8월에 정식으로 진주목사에 취임하여 병기를 정비하는 등

진주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구했다.또 9월에는 경상남도 진해로 출정하여 적을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10월 6일 일본군은 경상우도의 요충지인 진주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성 안에 있던 부녀자와 노약자까지 모두 나서 일본군과 대치하게 되었는데 적군은 2만여 명이었으나 김시민의 군사는

3,800여 명에 불과했다.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친 10월 9일 전투지역을 순시하던 김시민은 죽은체하고 사체 속에 숨어 있던

일본군의 저격을 받고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상처가 심각했지만 김시민은 이 사실을 함구하고 치료를 받으면서 국사를

근심하다가 39세의 나이에 운명했다.[김시민 장군의 사망일시는 임진잡록에는 10월 18일로 되어 있고,

족보에는 12월 26일로 되어 있다.
김시민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출함에 있어 중요한 길목이 된 이곳을 지킴으로써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막아내어, 불리했던 당시의
상황을 뒤집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그는 1604년에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었으며, 1702년에는 영의정의
직위와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김시민 장군 추모행사는 과거에는 진주, 괴산, 천안 등지에서 행해졌으나 1886년경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각지의

사당이 훼철된 후 현재는 진주와 괴산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촉석루

의암

[의암]

의암이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투신자살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첩인 논개기녀를 가장하여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빠져 죽은 바위로 도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1593년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촉석루에서 전승을 기념하여 잔치를 벌였는데, 논개는 촉석루 아래의 이 바위로

적장을 유인하여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정문부논개의 의기를 기려 추모비를 세웠지만 후에 훼손되어 사라졌다. 1629년 인조 7년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부친의

유언에 따라 진주에 정착을 해서 바위의 서쪽 벽면에 ‘義巖’(의암)이라고 새겼고, 남쪽에는 한몽삼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 사적비]

의암사적비는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세웠다.

 

 

촉석루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내에 위치해 있는 누각이다. 남강변 절벽 뒤편에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장대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이기도 했다. 일명 장원루라고도 한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그 뒤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하였으며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개요]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에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또 한번 소실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한 것이다. 대한민국인간 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군사시설과 과거 시험장]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는다. 촉석루는 본래 전쟁이 일어나면

유사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또는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서 사용하였다. 또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

또는 향시를 치루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촉석루 천정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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