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鰲山) 만회정(晩悔亭)
만회정(晩悔亭)은 조선중기 여러 지역의 부사(府使)를 역임한 만회(晩悔) 박취문(朴就文,1617∼1690)
이 말년 휴식 및 교우(交友)를 위하여 말응정(秣應亭)마을 앞 오산(鰲山)기슭에 세운 정자(亭子)
로 1800년대에 소실된 것을 2011년 울산광역시가 시민들의 정자로 새롭게 중건하였다.
박취문은 그의 아버지 박계숙(朴繼叔)과 함께 부북일기(赴北日記)를 남겼는데,
이 책은 2006년 1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만회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원래는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그 양옆에 온돌방을 두고,
앞면 전체에 툇마루를 둔 언양읍 대곡리의 집천정(集淸亭)과 유사한 형식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중건한 만회정은 여러 시민들이 올라 두루 감상하기 편리하도록 하나의 마루로 구성하였다.
한편, 만회정 주변의 바위에는 '관어대(觀魚臺)'글자, 자라그림, 시(詩) 등이 새겨져 있어
울산의 선조들이 오산(鰲山)과 십리대숲을 정성껏 가꾸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려 하였던 태화강
사랑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
박계숙(朴繼叔)[23世]
1569 ∼1646
임란창의의사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자헌대부지중추부사(資憲大夫知中樞府事)
자는 비윤(丕胤), 호는 반오헌(伴鰲軒),
경남 양산 용당동(당시 울산군) 출생
무안현감 홍권(弘權)의 둘째아들이다. 선무원종공신1등 기장현감 홍춘(弘春)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탁영(卓榮)하여 경서에 통달하였고 궁사승마(弓射乘馬)에 능하고 문무가
겸전하였으며 덕망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일가의 형제, 친척들과 함께 언양읍성
공성전에서 용전분투하여 큰 공을 세우고 1592년 9월 아버지 박홍춘이 서면장(西面將)으로 추대되자
10월 기장 의병장 김일덕, 김일개, 형제와 함께 기장읍성을 기습하여 적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594년 4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함경도병사 김응서(金應瑞) 휘하의 병마우후
(兵馬虞候)를 지냈으며, 자헌대부 훈련원정에 올랐다. 1638년(인조 16) 지중추부사에 가자(加資)되었다.
1605년 함경도로 파견되어 약 1년간 군관으로 근무하면서 적은 그의 일기와 1644년 함경도 회령과
경성에서 부방(赴防)하며 적은 아들 박취문의 일기를 묶은 "부북일기(赴北日記)"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2006년 1월 26일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10월 울산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울산 충의사에 배향되었다.
박취문(朴就文)[24世]
1617 ∼ 1690
조선 후기 무신
자는 여장(汝章). 호는 만회당(晩悔堂).
경남 양산 용당동(당시 울산도호부 서면) 출생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인 아버지 반호헌(伴鰲軒) 계숙(繼叔)과 정부인(貞夫人) 경주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28세인 1644년 (선조 22) 무과에 급제하여 할아버지 홍춘(弘春)과 아버지 계숙의 대를 이었다.
무신(武臣) 가문 출신답게 백발백중의 명궁사(名弓士)여서 무과에 급제하자마자 곧장 병사를 수행하는
군관으로 선발되었다. 그 후 경상좌도 병영과 수영의 우후(虞侯)를 거쳐 훈련원첨정, 부정, 초질금군장
(初秩禁軍將) 등의 무관생활을 하였다. 안동, 갑산, 김해, 부령 등 여섯 고을의 수령과 진주, 경주 등 다섯
고을의 영장(領將)을 역임하다가 나이들어 퇴임하였다. 『만회실기(晩悔實記)』와 아버지의 부방(赴防)
일기와 그의 부방 일기를 모은 『부북일기(赴北日記)』를 남겼다. 『부북일기』는 부자가 회령지역에서
1년씩 부방생활을 할 때 남긴 무관일기로 울산에서 회령까지의 노정이 정확하게 기술되어있다. 당시 무인,
양반, 기생 등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부북일기』는 2006년 1월 26일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에 울산박물관에 기증되었다. 2011년 11월 울산광역시는 그가
지었다가 훼철된 만회정을 태화강 내오산에 복원하였다.
관어대(觀魚臺)
위치 : 중구 태화동 태화강대공원 만회정 아래
건립연대 : 미상(未詳)
크기 : 자연석, 높이 58cm, 너비 20cm.
해설
관어대는 "물고기를 보는대"라는 뜻이다.
명정천이 태화강과 만나는 지점의 언덕에 있는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현재의 지형으로는 대(臺)라 하기에는 부족하나 글을 새길 당시에는 어땠을지 알 수 없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미상이다.
자라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