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년 만의 귀환, 태화루(太和樓) 그리고 영화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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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91-2 (태화로 300) 조선시대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 신분 차이에 따라 하는 일은 물론 입는 옷도 달랐다. 건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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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달랐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 이름의 끝 글자를 보면 그 주인의 신분과 용도를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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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이름의 끝 글자는 대게 다음 여덟 글자 중에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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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합,갑,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앞쪽일수록 격이 높다. 먼저 ‘전(殿)’과 ‘당(堂)’.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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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 왕과 왕비가 머무는 공간이다.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교태전이 이에 해당한다. 왕을 ‘전하(殿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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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부르는데, 왕이 계시는 전각 아래에 신하가 엎드렸다는 뜻이 된다. 왕의 아들인 대군이나 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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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곳에는 한 단계 아래인 ‘당’자를 붙였다. 향교나 서원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곳은 대성전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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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들이 강학하고 담론하는 건물은 명륜당이다. 부처님을 모신 곳은 대웅전이고 스님을 모신 곳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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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당인 것도 같은 흐름이다. ‘당’이 ‘전’보다 아래이긴 하나 다른 건축물에 비하면 아주 높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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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이다. 예술의 전당이니 학문의 전당이니 하는 말들이 이런 건물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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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閤)’과 ‘각(閣)’은 ‘전’과 ‘당’ 가까운 곳에서 그 것을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합’으로는 재수합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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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각’으로는 규장각이 대표적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나 정1품의 벼슬아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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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한다. ‘재(齋)’와 ‘헌(軒)’은 주거 공간으로 독서나 사색을 하는 용도로 쓰였다. ‘재’로는 비운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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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가 환국해서 지내던 창덕궁 낙선재가 있다 . ‘헌’은 대청마루가 발달한 건물이다. 보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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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기능을 가졌으나 일상적인 주거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고을 원들이 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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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던 동헌이나 강릉 오죽헌이 그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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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루(樓)’와 ‘정(亭)’. ‘루’는 보통 2층 건물이다. 1층은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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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는 연회를 열 수 있는 마루로 형성되어 있다. 성곽이 있는 곳에서는 장수들의 지휘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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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했다. 태화루와 언양읍성의 영화루가 여기에 해당된다. ‘정’은 작천정처럼 경관이 뛰어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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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에 많이 세워 풍류를 즐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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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읍성의 영화루가 지난 달에 복원되었다. 영화루는 읍성의 남문이었다. 언양읍성에는 북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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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외한 세 군데에 누각이 있었다. 동쪽에는 망월루, 서쪽에 애일루, 그리고 남쪽에 영화루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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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각들이 소실된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부산에서 거침없이 북진하던 왜병들은 언양을 거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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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로 진격하면서 성 안의 건물들을 파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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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도 영화루처럼 임진왜란 때 불탔다. 태화루는 조선시대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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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영남 3루’로 불렸다. 촉석루는 국보였다가 지금은 문화재 자료로 등급이 낮아졌다.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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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비행기 폭격으로 파괴된 뒤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요즘 진주 시민들은 촉석루 국보 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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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벌이고 있다. 숭례문은 화재로 뼈대만 남은 걸 복원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국보 1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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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시민들의 주장에 머리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들의 지역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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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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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도 420년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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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 복원에 울산시가 행정지원을 하고 지역의 기업체가 건축비를 후원했다. 무엇보다 시민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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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염원이 큰 힘이 되었다. 울산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시민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건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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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촉석루 국보 환원 운동을 하듯 언젠가는 태화루 국보 지정 운동도 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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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륜만 쌓는다고 그렇게 되지는 않을 터. 태화루에 어떤 스토리텔링을 입히느냐에 달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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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민들의 몫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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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교를 지나가며 올려다보면 날아갈 듯한 태화루의 처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인 묵객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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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루에 올라 남산과 태화강을 바라보며 풍류에 젖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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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소풍이나 청소년들의 문화 체험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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