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울산광역시의 변천과정

도화골 2017. 1. 31. 17:21

울산광역시의 변화과정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울산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 우리의 선인들이 아득한

석기시대부터 육로 또는 해로로 이곳에 들어와 정착사회를 이루어 살았던 곳이다.

서생면  신암리병영동  병영성지,  장현동  황방산의  신석기  유적이  있고  석검이  출토된  화봉동과

지석묘가 있는  언양면  서부리의  청동기  유적이  있다.    밖에 북구 중산동, 온산면 산암리, 언양읍

동부리삼동면 둔기리,  온양면 삼광리, 상북면 덕현리, 동구 일산동, 중구 다운동, 삼남면 방기리 등지

에서 각종 유적과 유물이 관계 연구기관과 대학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사연댐  상류에  위치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암각화에는 고래·거북·사슴·멧돼지 등의 각종 동물

그림이 있고, 두동면 천전리의 각석에는 ·삼각형·마름모 등의 각종 기하학적 무늬들이 있어 울산지방

고대  인간사회의  유력한  생활터전이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보여 준다.

울산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소속으로 중구 다운동을 중심으로 굴아벌촌이라는 읍락을 형성했는데,

신라가 파사왕 이곳을 취해 굴아화현을 두고,  남쪽에는 생서랑군,  동쪽에는 동진현,  언양지방에는

거지화현을  두었으며,   757(경덕왕 16)  하곡현(일명 하서현)으로  이름을  고치고 월성군 외동읍

모화 지방에 있던 임관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언양지방은 본래 거지화현인데,   경덕왕 헌양현으로 개칭해 양주의 영현으로 하였다.    신라시대에

울산지방은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파급되어 태화사 등의 불사가 성행하였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우시산국도 울산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의 울주군 웅촌면이 위치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를  통해  울산지방에는  하곡현과  동진현이  임관군의  영현이란  격을 띠고 있었고 남쪽에는

동안군이, 서남쪽에는 우풍현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시대

 

그러나  고려  태조  때  개지변을 지배하고 있던 호족장 박윤웅(현재 울산박씨 시조)이 930(태조 13) 최환을 보내 항복을

 

청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의  공이 컸으므로 하곡 · 동진 · 우풍의 3현을 합해 흥례부(또는 흥려부)

승격함(10월 1일 : 현재 울산시민의 날)에 따라 임관군의 영현에서 벗어나 비로소 고을로서 발전해 오늘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983(성종 2)에는 고려왕조가 지방제도를 강화해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면서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995(성종 14) 다시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해  전국을  449현으로 분할, 흥례부 공화현으로 낮추고

별호를학성이라 했다가, 1018(현종 9) 이르러 공화현·헌양현·기장현·동래현를 합해 울주로 개편

하고 방어사 · 지울주사를 두었다.

1143(인종 21) 헌양현을 분립시켜 감무를 두었고, 동래도 현령을 두어 분립시켰다. 울산 바다와

접해 있고,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고려 후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선시대

1397(태조 6) 울주에 진을 두어 병마사가 지주사를 겸하게 하다가, 1413(태종 13) 지방행정 개편에

 따라 진을 폐지하고 울산군으로 개칭해 비로소 울산이라는 칭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1417 경상좌도병마절제사영을 경주에서 울산 병영동으로 옮기고,       1418 염포를 개항해 왜관을

설치했으며,    1426(세종 8)에는 병마절도사영을 폐지하고 다시 진을 두어 병마첨절제사가 지군사를

겸하다가 1437 병영을 다시 설치하였다.

같은 1월에 울산도호부로 승격시키고, 판관을 두었다가 8월에 다시 군으로 강등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세종 울산군의 호구는 1,058호에 4,161명이었다.

1459(세조 5)에는  동래에  있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을 개운포로 옮겼으며, 1510(중종 5) 삼포

왜란으로 염포가 폐쇄되고, 1592(선조 25)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이 다시 동래군으로 옮겨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  의병이  경주·울산 수복하고 멀리 대구·창녕·동래까지 나아가 적을 무찌

르는 전공을 올렸다.   공훈으로 당시 좌의정 이덕형의 건의로 1598 울산도호부로 승격하고

병마절도사 부사를 두었으며, 이듬해인 1599년에 임진왜란의 피해로 자립할 없는 언양현을 울산

도호부에 합쳤다가 1612(광해군 4) 다시 현으로 복구시켰다.

1616년에는  병마절도가  겸직하던  도호부사직을  전임의  도호부사를 두어 맡도록 하였다.   1681

(숙종 7)에는 하미면(下未面) 기장현에 이관하고 받기를 되풀이하다가   1861(철종 12) 거의

되돌려주었다. 1771(영조 47) 울산 호구는 8,670호에 32,973명이었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를 개정해, 도제도를 폐지하고 23개의 부를 새로이 두었는데, 울산

도호부를 군으로 개칭하고 언양·양산·동래·기장·거제·경주·영일·홍해군  등과  함께 동래부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06년에는 칙령 49호의 시행으로 지방행정을 정리해 온남면의  일부와  외남·웅상면을  양산군으로

이속하였다.      1914 ·군을 정리·폐합하는 지방제도 개편시 언양군을 울산군에 병합했는데

태화강 이남의  삼산·달동·신정·옥동지방을 합해 울산, 하부면과 내상면을 하상면으로 하고 현남면과

현북면을 합해 대현면이라 개칭하였다.

1931 11 1 울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4 동면을 읍으로 승격시켜 방어진읍으로 하고,

1944 대현면을 울산읍에 편입해 출장소를 두었다가 1946 다시 대현면으로 하였다.

1919 3·1운동  때는  병영의  비밀청년회조직이  주도해  일본경찰과  충돌하는  격렬한 시위로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언양· 남창· 웅촌· 온산까지  만세운동이  파급되어 4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냈다.

해방 이후 울산 경제개발정책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1962 2 1 울산,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지역과 청량면 두왕리, 범서면 무거·다운리, 농소면 송정·화봉리를 합해 울산특정

공업지구로 지정, 공포하고 같은 6 1 울산시로 승격시키는 한편,   울산군을 울주군으로 개편

하였다.

1963 3 12 울주군 서생면이 동래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 양산군의 관할이 되었으나 1983

2 15 다시 울주군으로 복귀하였다.   1973 3 12 삼남면의 구수리를 언양면으로 편입시키

, 1973 7 1 두서면에 속했던 소호리를 상북면으로 이속시켰으며,   1975 10 1 온양면의

덕신리와 청량면의 용암·학남리가 온산면으로 편입되었다.

1985 7 15 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중· 남구가  설치되었고,   1988 1 1 방어진출장소가

동구청으로  승격되어  3 40  동이 되었다.   1991 1 1 울주군이 울산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 1 1 울산시와 울산군이 통합되고, 1996 12 31 울산광역시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1997 7 15 울산광역시로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북구가 신설되고 울주군이 울주군

으로 복군되어 4 1 체제가 되었다.

이후 1998 3 1 동구 염포동 일부가 북구로 편입되었고,   2002 남구  무거동  일부를  울주군

범서읍으로, 울주군 범서읍 일부를 남구 무거동으로 각각 편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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