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경남

양산 통도사

도화골 2017. 2. 22. 21:52

 

통도사(通度寺)

소재지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통도사로 108)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로 법보(法寶) 해인사, 승보(僧寶) 송광사와 함께 불보(佛寶)로 삼보사찰

(三寶寺刹)의 하나이다. 646년(선덕왕 15)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가사·대장경

 등을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창건한 절이다. 이와 같이 불사리와 대장경이 최초로 봉안된 사찰로 창건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절이었으며 이후 신라 율종(律宗)의 근본도량이면서 신라 승단(僧團)의 중심지가

되었다.

절의 이름은 승려가 되려는 출가자들이 모두 금강계단에서 득도하거나 모든 법을 깨달아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또는 산의 형세가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자장율사가 이곳 연못에 사는 9마리 용을 항복시키고 대가람을 이루었는데 1마리

 용만 머물게 하여 절을 수호했다고 하는 설화가 있으며 지금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지(九龍池)가 상징적

으로 남아 있다. 처음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한 규모가 작은 절이었으나 고려 선종대에 크게 확장되어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石鐘形) 부도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3층석탑 및 배례석(拜禮石), 봉발탑(奉鉢塔),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등이 건립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

버리고 1603년(선조 36) 송운대사(松雲大師)에 의해 재건된 뒤, 1641년(인조 19) 우운대사(友雲大師)가 다시

 중건하여 대가람이 되었다.

현재 가람배치는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는데 동서축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건물이 배열되어 있다.

즉 대웅전(보물 제144호)과 금강계단을 비롯하여 응진전·명부전 등의 상로전(上爐殿)과 관음전·용화전·

대광명전·장경각·황화각·화엄전 등의 중로전(中爐殿), 영산전·극락전·약사전·만세루(萬歲樓)·영각(影閣)

 등의 하로전(下爐殿)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가람구조는 금강계단 중심에서 점차 대웅전 중심의 공간배치

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건물들은 모두 조선시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주위에 회랑을 돌리지 않고

 삼문(三門)을 두어 구분했는데 일주문(一柱門)은 완전히 절의 영역 밖에 있으며 천왕문(天王門)과 불이문을

 들어서야 각 전각들에 이르게 된다. 중요문화재로는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은입사동제향로(보물 제334호)

·봉발탑(보물 제471호) 등이 있다. 이밖에 석가여래가사·자장율사가사·고려감지금니화엄경·고려은입사동제향로·

동판천문도·감로병·육환철장(六環鐵杖)·동자상·청동소탑·법라·화엄만다라·청동요령·금자법화경·구룡병풍·

삼장서행노정기(三藏西行路程記) 등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많은 유물이 최근에 건립된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속암자로는 극락암·비로암·자장암·백운암·축서암·취운암·수도암·사명암·옥련암 등이 있다.

 

 

통도사 국장생석표

보물 제74호. 높이 166cm, 너비 60cm. 통도사의 경내를 표시한 것으로 동남방 약 2㎞ 지점의 도로변에 있다.

국장생이라는 말은 국명에 의해 건립된 장생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원래 장생은 절이나 마을 입구 및 길가에

세워진 마을의 수호신으로 벽사·비보(裨補)의 기능과 함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의 역할을 했으며 마을

사람들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신라와 조선시대에 걸쳐 장생(長生)·장생표주(長生標柱)·목방장생표(木榜長生標)·석적장생표(石磧長生標)·

석비장생표(石碑長生標)·국장생석표·황장생·장승(長承)·장생우(長栍偶)·장성(長性 또는 長城)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는 장승이란 명칭이 일반화되었으며 입목(立木)·입석(立石)·입적

(立磧) 등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져 크게 유행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의하면 통도사 주변의 산천 비보(裨補)를 위해

12곳에 장생표를 세웠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이정표의 역할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한

도참사상과도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로는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 입구, 경상남도 밀양시 무한면 무안리, 경상남도

울산시 울주구 삼남면 상천리 등의 장생을 들 수 있는데 특히 밀양과 울산에 있는 장생은 통도사 장생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 장생은 앞면에 해서체로 새겨진 명문을 기초로 1085년(선종 2)에 건립되었음

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문을 통해서 당시 사찰과 관청 간의 관계를 알 수 있으며 이두문(吏讀文)이 포함되어

있어 금석문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통도사 금강계단

국보 제290호. 높이 300cm, 너비 990cm. 646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경주 황룡사탑,

울산 태화사탑과 함께 봉안한 곳으로 매년 초하루와 보름날에 계(戒)를 설했다고 한다. 금강계단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받은 계법이 금강(金剛)과 같이 단단하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에 의하면 사리가 도난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금강계단

의 석함 안에는 구렁이와 두꺼비가 있다고 했으나 1235년(고종 22) 김이생(金利生)과 경석(庚碩)이 군사를

시켜 석종을 들어 보았더니 작은 석함의 유리통 안에 사리 4개가 있었다고 한다.

〈양산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 梁山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에는 1379년(우왕 5) 왜구의 침입으로 주지

월송대사(月松大師)가 불사리를 송경(松京)으로 옮겨오자 왕과 왕비가 예를 다하여 공경하여 사리의 분신

(分身)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통도사의 사리가 왜구에 의해 도난당했는데 백옥(白玉)

거사가 적의 포로로 있다가 사리를 다시 찾아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임진왜란

을 피해 사리를 대소 2함(函)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는 휴정(休靜)에게 보냈으나 자장의 뜻을 받들어 1함을

되돌려 보내어 1603년 통도사 계단을 중수한 뒤에 봉안했으며, 나머지 1함은 태백산 살나사(薩那寺 :

葛盤寺·淨岩寺)에 안치했다. 그러나 〈건봉사석가치상립탑비 乾鳳寺釋迦齒相立塔碑〉에 의하면 사명대사

가 왜구로부터 다시 찾은 통도사의 사리는 금강산 건봉사와 대구(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용연사

(龍淵寺) 석조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다고 한다. 특히 용연사의 경우 통도사 금강계단을 모방하여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주목된다. 1652년(효종 3)에 정인대사(淨人大師)를 중심으로 중수되기 시작하여 1705년에는

성능대사(性能大師)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고 그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조는 정방형으로 된 2중 석단 위에 석종형 부도가 안치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과립 3매, 불아(佛牙),

정골지절(頂骨指節)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고 기단의 상하 면석

에는 비천상과 불상·보살상을 조각했는데 특히 1층 계단의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상·보살상이 부조되어

있다. 석종부도는 연화대좌 위에 놓여 있고 앞면에는 향로를, 좌우에는 비천상을 양각했는데 조각수법이

부드러운 편이다. 석단 주위에는 석조 난간과 석문이 있으나 모두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금강계단은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쳤지만 창건 당시의 석조물로서 부처의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리를 정암사·건봉사·용연사에도 나누어 봉안했다는 점에서 불사리 봉안사찰의 원류가 되는 가장

오래된 불교 성지라 할 수 있다.

 

 

통도사 대웅전

국보 제290호. 1961년 대웅전을 수리할 때 서까래에서 발견된 묵서명(順治二年甲申五月十一日立柱 同年

八月初十日上樑 同年八月十八日椽)에 의하면 1645년(인조 23)에 중건했다고 한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5칸으로 옆면이 앞면보다 긴 장방형의 건물이며 지붕도 T자형의 합각지붕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러한 건물구조는 법당 안에 불상이 없는 대신 뒤쪽에 있는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예배하고 또 입구로부터 천왕문·불이문·탑을 잇는 직선상에 두기 위해 측면에도

합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앞면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북쪽

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편액이 각각 걸려 있지만 의미는 같다.

지대석 위에 있는 기단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기고 그 사이에 연꽃무늬가 조각되었으며 돌계단의

층계석과 좌우에도 매우 정교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가구식 기단은 창건 당시 신라시대의

석조기단으로 보인다. 기둥은 배흘림이며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

형식이다. 공포는 외3출목·내4출목으로 되어 있으나 살미첨차의 끝이 앙서로 되어 있어 조선 중기 목조

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앞면과 옆면에는 빗살무늬와 꽃살무늬로 된 분합문을 달았으며, 뒷면에도 금강

계단을 예배하기 위해 벽으로 막지 않고 4분합과 2분합을 설치했다.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웠으며 지붕 기왓골 수막새 끝에 박은 연봉 모양의 와정은

독특하다. 내부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층단천장으로 국화·모란 등의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좌우의 끝부분은 우물천장으로 마무리했다. 불단에는 불상이 없는 대신 화려한 문양을 조각했으며

금강계단을 향하여 길게 설치되어 있다.

 

 

통도사 봉발탑

보물 제471호. 높이 260cm. 하대석과 간석으로 구성된 대석 위에 발우형의 그릇을 얹어 놓은 특이한 형태

이다. 절에서는 석호 또는 의발탑이라고도 한다. 이 봉발탑은 석가의 발우를 바쳐 장차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할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린다는 신앙상의 의미에서 미륵불이 봉안된 용화전 앞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넓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는 원형의 복련 하대석이 놓여 있는데, 옆면에 돌린 2줄의 선을 중심으로

아랫부분에 탱주 모양의 기둥을 8개 새겼으며 윗부분에는 4중의 중판복련을 조각했다.

하대석 윗면에는 3단의 얕은 굄이 간석을 받치고 있다. 간석은 부등변 팔각형으로 중앙에 융기된 테두리를

돌렸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8엽의 앙련을 조각하여 서로 마주보게 했으며 윗면에는 3단의 얕은

굄이 있다. 상대석 위에 있는 석조발우는 뚜껑이 덮여 있고 그 밑에 굽받침이 새겨졌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석조물은 불교의 교리를 배경으로 조성된 보기드문 예이며 간석의 형태나 연판의 양식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도사 은입사동제향로

보물 제334호. 높이 33cm, 입지름 30cm, 밑지름 24.7cm.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형의 받침대로 이루

어진 전형적인 고려시대 향완의 형태이다. 전체 표면에는 화려하고 복잡한 문양이 은입사되어 있다.

구연부인 전의 윗면에는 당초무늬가 장식되었고 뒷면에는 '通度寺上'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몸체의 4곳에는 범자가 새겨진 둥근 주석판이 못으로 고정되어 있고 주위에는 여의두무늬[如意頭紋]가

돌려져 있는데 이 주석판은 후보된 것이다. 주석판 사이에는 보상당초무늬가 빽빽하게 입사되었으며

문양의 바탕에 은판이 감입된 점은 다른 향로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징으로 상감청자의 기법과 유사하다.

몸체 아랫부분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앙련을 표현했으며 그 밑에는 3단의 받침이 있고 표면에는 쌍엽무늬가

시문되었다. 받침대는 상단에 화문을 새긴 복련을 돌리고 그 아래로 여의두무늬·봉황·구름무늬 등이 표현

되었으며 넓은 굽부분에는 당초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 향완은 안정감있는 비례나 몸체 아랫부분의 약간 볼록한 형태, 3단의 받침, 화려하고 장식적인 문양

등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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