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라왕릉

무열왕

도화골 2017. 3. 10. 10:49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신라 29대)

왕릉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2

 

 

무열왕릉(武烈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으며,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

경내의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신라 왕릉 가운데 매장된

왕이 명확한 유일한 능이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형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이다.

 

개요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가치가 있으며

1972∼1973년에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개설

재위 654∼661.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또는 龍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 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진골귀족 내에서 새로운 신귀족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귀족집단의 반발을 받았다.

선덕왕대 중반기까지는 적어도 신귀족과 구귀족의 세력균형이 이뤄진 듯하다.
그러나 642년(선덕여왕 11)에 신라의 서방요충인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 부처의 죽음은 김춘추계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김춘추로 하여금 대외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을 위한 이 외교는 진흥왕 때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반환문제로 인해 결렬되고, 오히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당했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와 같은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계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합을 바탕으로 김춘추는

647년에 일어난 구귀족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구귀족집단의 대표자인 비담이 선덕여왕을 옹립하고 있는 신귀족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오히려 김춘추·김유신계의 신귀족세력에 의해서 30여 명이

숙청당함으로써 분쇄되고 말았다. 이 정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자, 신귀족은

구귀족과 일시적으로 제휴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구귀족세력의 대표인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여왕의 옹립 과정에서 김춘추·김유신계는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덕여왕대에는 김춘추에 의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외교활동과 내정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하자, 다시 당나라와의 관계강화를 위해

648년(진덕여왕 2)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은 650년에 신라가 중고시대 전기간을 통해 계속 사용해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한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김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다.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의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 등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그것이다.
김춘추에 의해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하고 왕권강화를

실제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지작업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해 신장된 신귀족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했던

구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알천을 배제시키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김춘추는 즉위에 있어서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었던 만큼 화백회의에

의해 추대받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로써 구귀족으로부터 신귀족으로의 권력이양과

왕위계승의 합법성 내지 정당성을 유지하려 했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律令政治)를 강화하였다.
655년(태종무열왕 2)에 원자(元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한편,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또는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 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해 왕권을 보다
전제화(專制化)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다.
이에 대해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후 왕의 측근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세력의 대표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신라 중대사회에서는 전제왕권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행정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 정치적 포석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킨 다음, 고구려·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655년에 고구려가 백제·말갈(靺鞨)과 연합해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또한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해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水陸)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黃山之原]전투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扶餘隆)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半島統一)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사비성 함락 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劉仁願)의 1만명과 김인태(金仁泰)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

(尒禮城 : 지금의 충청남도 論山) 등 20여 성의 항복을 받았다.
11월에 백제로부터 귀환해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그리고 항복해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積城)을
공격해왔다.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연합해 술천성(述川城 : 지금의 경기도 驪州)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이 효과적으로 방어했으므로 대나마(大奈麻)로 관등을
높여주었다. 이 해에 압독주(押督州 :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를 대야(大耶 : 지금의 경상남도 陜川)로

다시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재위한지 8년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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