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라왕릉

헌덕왕

도화골 2017. 3. 12. 21:28

헌덕왕릉(憲德王陵) (신라 41대왕)

왕릉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동천동 80


 

헌덕왕(憲德王, ? ~ 826년, 재위: 809년 ~ 826년)은 신라의 제41대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언승(彦昇)이고,

신라 원성왕의 장남인 김인겸의 차남으로 소성왕의 동생이다.

 

생애

즉위전

원성왕 6년(790년)에 사자로서 당나라로 갔고, 귀국후에 대아찬이 되었다.

다음 791년 전 시중 제공(悌恭)의 반란 진압에 공적을 세었고,

794년 에는 당시 시중 김숭빈(金崇斌)이 물러나고 언승이 시중에 발탁 되었다.

795년 에는 이찬, 796년에는 병무령(兵部令)을 거치고,

800년에 애장왕이 즉위 하면서 그 섭정이 되었다. 게다가

801년 에는 왕의 행차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되어, 그 다음에는 상대등이 되었다.

809년 7월 동생과 함께 애장왕을 처형하고, 스스로 왕위를 이었다.

 

생애

즉위후

즉위 하면서 즉시 당에 사자를 파견하여 선대의 애장왕의 죽음을 전하고

당 헌종에게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위 지절 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겸지절충영해군사

상주국 신라왕(開府儀同三司 検校大尉 持節大都督 雞林州諸軍事 兼持節充寧海軍使 上柱國 新羅王)에게

책봉 되었다. 이 때 왕비에 대한 책명에서는 왕비는 정씨(貞氏)로 되어 있지만 실은 김씨이다.

그 후도 당에 대해서는 810년 10월에 왕자 김헌장(金憲章)을 보내 금은제의 불상 등을 헌상한 것 외,

정기적으로 조공을 행했다. 또, 819년 7월에는 당의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병마를 징병하는 헌종 조칙에 응해 장군 김웅원(金雄元) 등 3만의 군사를 파견해,

당나라를 지원하였다.

812년 9월에는 발해에도 사자를 파견하고 동향을 보고 있었고,

선왕 대인수가 즉위하고 긴장이 되자, 후에 826년 7월 한산주 이북의 주 군으로부터 1만 명을 징병 하여

대동강가에 300리 장성을 쌓고, 발해의 남하를 막는 준비를 하였다.

한편, 김헌창(金憲昌)이 822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켜, 웅진(熊津)을 수도로 하고 장안국(長安國)이라고 하였고,

그 지배 영역은 무진주, 청주, 웅천주, 완산주, 사벌주 등 5주 및 국원, 서원, 금관 3소경 등

구 백제의 영역을 중심으로 국토의 대부분이 김헌창을 지지하여,

왕권에 대항하는 자세를 보이게 되었다. 김헌창의 반란은 1개월 정도로 진압되었지만,

난의 진압에 활약한 토벌군은 귀족의 사병과 화랑 집단이며,

율령 체제 아래에서의 병제는 유명 무실화 하고 있는 것이 드러났다.

 825년 1월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高達山,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 반란은 북한산주 도독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826년 10월에 사망하여, 그 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의 사적 제 29호가 비정 되고 있다

 

가계

  • * 아버지 : 혜충태자 김인겸
  • * 어머니 : 성목태후
    • 왕후 : 귀승부인 김씨(貴勝夫人 金氏) - 헌덕왕의 숙부인 각간 김예영(金禮英)의 딸이며,
    •  당나라에서의 책봉에는 정씨(貞氏)라고 하였다.
      • 아들 : 제3자 심지왕사心地王師


  • 헌덕왕릉(憲德王陵)

    개설

    헌덕왕릉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29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1만 8,007㎡이다.

    무덤의 지름은 26m, 높이는 6m이다. 헌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언승(彦昇),

    왕비는 귀승부인(貴勝夫人)이다.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809년에 왕이 되어 826년까지 18년간 왕으로 재위하면서

    농사를 장려하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폈다. 김헌창(金憲昌)·김범문(金梵文)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당시의 국내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승하한 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지냈는데 지금의 위치로 비정되고 있다.

     

    내용

    무덤의 외형은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고 매장추체부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무덤 밑둘레를 따라 잘 다듬은 판석(板石)을 사용해 병풍처럼 돌려 무덤의 보호석을 마련하였다.

    판석과 판석 사이에는 두 판석을 맞물리게 하는 탱석(撐石)을 끼워 판석을 고정시켰으며

    아울러 탱석에는 같은 간격으로 방향에 따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이들 판석과 탱석 위로 갑석(甲石)을 올려 보호석을 마무리하였다.
    12지는 12지생초(十二支生肖)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 방위와 시간개념으로 출발한 것으로

    불교의 영향으로 12동물로 대응한 것은 후대의 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무덤에 있는 것은 방위신(方位神)으로 무덤을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었다.
    신라의 왕릉에는 성덕왕릉·괘릉(掛陵) 등 몇몇 예가 있다.

    김유신묘에도 무덤 주위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능에는 12지 중 돼지〔亥〕·쥐〔子〕·소〔丑〕·호랑이〔寅〕·토끼〔卯〕

    등 5개 상만 남아 있고 그밖에는 없어졌다.

    나머지는 무덤 전방으로 흐르는 경주의 북천(北川)이 1742년(조선 영조 18) 8월 22일에

    범람해서 무덤의 일부가 유실되었다.

    당시 좌의정 송인명이 영조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으며 그로 인해 경상도관찰사가 수축하였다.
    원래는 신라 제42대 흥덕왕릉과 마찬가지로 무덤의 전면에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갖추고
    무덤의 둘레를 따라 돌난간을 마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현재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놓여 있는 호인상 1구의 머리 부분이 원래 원성왕릉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헌덕왕릉에는 원성왕릉과 마찬가지로 무덤 전면에

    호인상(胡人像)과 같은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왕릉의 호석 구조는 앞 시기의 왕릉을 충실히 계승하였으나 면석과 탱석은 각각 48개로 구성되었으며
    탱석에도 고유한 방향에 맞게 12지신상을 부조하였다. 따라서 이웃하는 12지신상 사이에 들어가는

    면석과 탱석의 수는 이전 시기 왕릉보다 각각 1개씩 총 24개가 더 들어간 것이다.

    그만큼 봉분의 지름이 커진 까닭에 헌덕왕릉은 12지신상이 부조된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남쪽·서쪽 호석과 석난간의 대부분은 1970년대 경주고도 관광종합개발계획에 의해 정비,

    보수함으로써 새롭게 마련된 것이다.

    왕릉의 남동쪽에 놓인 상석(床石)은 흥덕왕릉의 상석을 모방한 탁자식 형태로 2007년에 설치된 것이다.
    왕릉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헌덕왕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김유신으로 잘못 기록한 문헌도 남아 있으며
    최근에는 진평왕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어 향후 새로운 연구 대상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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