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元聖王) (신라 38대왕)
원성왕(元聖王, ? ~ 798년 음력 12월 29일/양력 799년 2월 8일,
재위: 785년 2월 26일(음력 1월 13일) ~ 798년 음력 12월 29일)은 신라의 제38대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휘는 경신(敬信)이다. 삼국사기에는 원성왕은 선덕왕과 마찬가지로
내물와의 10세손으로 되어 있다.
생애
김경신은 혜공왕 때 선대 경덕왕의 관제개혁을 원상 복귀시키는 일에 참여하였다.
선덕왕 1년(780년) 이찬(伊飡)으로 상대등(上大等)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상대등에 올랐다.
선덕왕이 죽고 대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당과 통교하였다.
원성왕 4년(788년)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했고,
이어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했다.
김경신은 경덕왕과 성덕왕(김양상 외조부), 개성왕(추존, 김양상 아버지)의
사당을 허물고 자신의 부, 조부, 증조부의 사당을 세웠다.
또한 내물왕, 무열왕, 문무왕 및 조부인 흥평대왕(추존)과 부친인 명덕대왕(추존)을
국가 5묘로 지정하여,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를 무열왕, 문무왕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원성왕은 자신의 고조부인 법선을 현성대왕, 증조부인 의관을 신영대왕, 할아버지 위문을
흥평대왕,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 어머니를 소문태후로 추봉하였다.
신라 하대는 원성왕 시대가 기점이다. 김경신은 무열왕계 경덕왕과 자신의 동료였던
김양상의 아버지 개성왕, 외조부 성덕왕의 사당을 허물었다.
불국사를 만들어 자신의 부, 조부를 모셨다.
가계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경신의 가계는 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효양이다.
- 아버지 : 김효양 -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존
- 어머니 :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繼烏夫人), 소문태후(昭文太后)에 추봉
- 왕후 :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 각간 김신술(神述)의 딸
- 아들 : 인겸(仁謙) 785년 태자 책봉 791년 음력 1월 사망 혜충태자(惠忠太子)에 추증되었다가
- 소성왕 즉위 후 혜충대왕으로 추존
- 손자 : 준옹(俊邕) - 인겸의 아들로 794년 음력 4월 태자 책봉, 798년에 소성왕 즉위
- 손자 : 언승(彦昇) - 인겸의 아들로 809년에 헌덕왕 즉위
- 손자 : 승빈(崇斌, ? ~ 819년 2월)
- 손자 : 수종(秀宗) - 인겸의 아들로 826년에 흥덕왕 즉위
- 손자 : 충공(忠恭) - 인겸의 아들로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되었다.
- 손자 : 제옹(悌邕)
- 아들 : 의영(義英) - 792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794년 사망
- 아들 : 예영(禮英) - 혜강태자(惠康太子)에 추증, 이후 혜강대왕(惠康大王)에 추봉, 부인은 혜강태후
- 손자 : 헌정(憲貞) - 익성대왕(翌成大王)에 추봉, 부인은 성목태후(聖穆太后)
- 손자 : 영정(永貞)
- 손자 : 균정(均貞) : 성덕대왕(成德大王)에 추봉, 부인은 헌목태후(憲穆太后)
- 손녀 : 귀승부인(貴勝夫人) : 헌덕왕(憲德王)의 부인
- 딸 : 대룡부인(大龍夫人)
- 딸 : 소룡부인(小龍夫人)
- 왕후 :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 각간 김신술(神述)의 딸
경주원성왕릉(慶州元聖王陵)
소재지 :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개설
낮은 구릉에 남면해 있다. 이 능은 초기에 괘릉이라 불렀다.
괘릉이라는 이름은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원래 작은 연못이 있어
연못의 원형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유해를 수면 상에 걸어 안장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내용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를 보여주고 있는
이 괘릉은 봉분과 그 전방의 석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능은 외형상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규모는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봉분 아래에는 봉토(封土)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護石)이 설치되어 있다.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조기단(石造基壇)과 같이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크기의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을 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렸다.
각 면석의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탱석(撑石)을 배치했는데, 탱석의 전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어져 있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서 하나씩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했으며,
그 조각수법은 신라 십이지신상의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호석의 밖으로는 길이 110㎝, 너비 40㎝의 부채꼴 판석을 정연하게 깔아 회랑으로 조성하였다.
회랑 둘레에는 높이 1.7m의 네모진 돌기둥을 세워 돌난간을 설치했는데,
현재 돌기둥은 25개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사이에 2단으로 끼웠던 난간살대는 거의 유실되었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 석상(石床)이 놓여 있다.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두 쌍, 문인석(文人石) 한 쌍,무인석(武人石) 한 쌍과
화표석(華表石) 한 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다.
이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삼국사기』에서는 원성왕이 재위 14년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하고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괘릉에 비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인근에 숭복사 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이와 같은 유형의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통일신라 왕릉의 대표격인 이 괘릉의 능묘제도는 당나라와의 문물교류를 통하여
그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십이지신상을 호석에 배치하는 것은 신라인의 창안이며,
각종 석조물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당시 신라인의 고도로 발달한
예술적 경지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능묘에 배치된 십이지신상은 따로 조각해 호석 앞에 별도로 세웠던
성덕왕릉식에서 탱석에 직접 조각하는 형식으로 발전된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