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라왕릉

문무왕

도화골 2017. 3. 17. 18:30

문무대왕(文武大王) (신라 30대왕)

왕릉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30-1

 

 

 

개요

이름은 법민(法敏).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태종무열왕의 왕위를 이어받아 재위기간 동안 백제저항군의 진압,

고구려 정벌, 당나라 군대의 축출 등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비는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삼국사기〉에는 왕의 외모가 영특하게 생겼으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진덕왕 때 당나라에 가 있기도 했으며,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 병부령(兵部令)이 된 뒤 곧 태자로 봉해졌다.

 

정복활동 및 삼국통일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 공격을 시작하자, 신라군을 이끌고 남천정(南川停:경기 이천)에

머물던 태종무열왕의 명령으로 덕물도(德物島:덕적도)에 파견되어 뱃길로 온 소정방(蘇定方)을 맞이했다.

백제저항군이 진압되기 전에 태종무열왕이 죽자, 즉위한 뒤 직접 종군하면서 여러 성(城)을 근거로

활동하던 백제저항군을 진압했다. 663년에는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일본에 있던 부여풍(夫餘豊)을

왕으로 삼아 활동하던 근거지인 주류성(周留城:한산 또는 부안)을 당군과 같이 공격해 함락시켰다.

또 지수신(遲受信)이 끝까지 항거하던 근거지인 임존성(任存城:충남 대흥)도 함락시켜 백제부흥군의

활동을 일단 종식시켰다. 그러나 당은 663년 일방적으로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해 신라의 독립성을 부정하려 했으며,

 665년에는 문무왕으로 하여금 의 지원을 받아 웅진도독(熊津都督)이 된 부여융(夫餘隆)과

취리산(鷲利山)에서 화맹(和盟)을 맺게 했다.

한편 문무왕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도 꾸준히 전개해,

663년 평양 공격에 나선 소정방의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해 주었고,

667년에는 이세적(李世勣)이 이끈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직접 장군들을 이끌고

장새(獐塞:황해 수안)까지 북상했으나 당군이 철수하자 함께 철군했다.

668년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 공격했고, 6월에 문무왕도 한성주(漢城州:경기 광주)에 머물면서

군사를 파견해 마침내 보장왕의 항복을 받았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그 땅을 직접 지배하려 했으나

고구려부흥군의 활발한 활동으로 지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고구려저항군 중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한 검모잠(劍牟岑)의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검모잠은 한성(漢城:황해 재령)으로 남하해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을

왕으로 삼고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하게 되자,

문무왕은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전북 익산)에 안치시키고 670년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했다.

이는 고구려 저항세력을 원조함으로써 당군 및 당군과 연결된 부여융의 백제를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해 사찬(沙飡) 설오유(薛烏儒)는 고구려의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이북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뒷날 백제 고지(故地)에 대한 지배가 안정되자 문무왕은 안승을 다시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했다.

한편 670년 백제 고지의 63성을 공격·점령하고 그 곳 주민을 신라 땅으로 옮기는 등

백제 고지에 대한 공략을 계속, 당군과 충돌을 빚기 시작해 671년 장군 죽지(竹旨) 등이

석성(石城) 전투에서 당군 3,500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설인귀(薛仁貴)가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보내자, 문무왕은 당이 옛날 태종무열왕에게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기로 한 약속을 상기시키며 그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문무왕은 군사적으로 당군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사신을 보내 무마하는 양면정책을 구사했다.

그리고 이 해에 사비성을 함락시켜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즈음 당군과의 전투가 치열해졌고, 672년 이후 당은 대군을 동원해 본격적인 침략을 개시했다 (나당전쟁).

673년 문무왕은 이에 대비해 구 신라 영역에 다수의 성을 쌓게 하고, 대아찬(大阿飡)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는 한편, 백제 멸망 후에 폐지했던 수병제(戍兵制)를 부활시켰다.

한편 신라인으로서 당과 내통한 자에 대한 처벌도 과감히 수행했다. 즉 한성주총관(漢城州摠管) 수세(藪世),

한성도독(漢城都督) 박도유(朴都儒), 아찬(阿飡) 대토(大吐) 등을 처형한 것이 그것으로,

이는 비상체제하에서 강화된 왕권을 배경으로 가능했다.

674년 당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에 봉해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을 보이는 한편,

대규모로 신라를 공격했다. 전투가 절정에 달한 675년 설인귀의 당군은 문훈(文訓)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참패했다. 이어 이근행(李謹行)이 20만의 대군을 동원해 침략해오자 매초성(買肖城)에서

공격해 대파했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군마 3만 여 필과, 비슷한 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당군의 공격은 계속되었으나, 신라군은 크고 작은 18회의 전투에서 모두 이김으로써 북쪽으로부터의

육로를 통한 당군의 침입은 저지되었다. 한편 676년 신라의 시득(施得)이 이끄는 해군은 바다를 통해

남하하던 설인귀의 당군을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전투에서 크게 물리쳐 4,000여 명을 죽임으로써

서해의 제해권도 장악했다. 이리하여 당은 결국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신라는 대체로 지금의 원산만과 대동강을 잇는 이남을 차지해 불완전하나마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내치

즉위 직후인 662년 대당총관(大幢摠管) 진주(眞珠)와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진흠(眞欽)이 방탕하고

병을 핑계로 국사를 게을리하자 일족을 몰살시킨 것을 비롯해서,

당과 내통한 귀족들을 모두 주살하는 등 귀족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했다.

673년 외관을 감찰하기 위한 외사정(外司正)을 주에 2명, 군에 1명씩 두고, 679년 궁궐을 웅장하게

수리해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뒤이어 즉위한 신문왕대에도 계속되어 신라 중기의 왕권을 크게 강화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671~672년에 중앙관청의 실무자 수를 늘렸고, 675년 예부(禮部)·승부(乘部)·사정부(司正府)·

창부(倉部)·조부(調部) 등의 중앙관청의 차관급인 경(卿)의 수를 1명씩 증설하는 조치를 취해

집권체제를 정비했다. 또 재위 후반기에는 관리들의 녹봉을 관장하는 좌우사록관(左右司祿館)을 설치했고,

678년에는 선박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선부령(船府令) 1명을 두었다.

한편 지방 지배의 면에서는 678년 북원소경(北原小京), 680년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해 9주5소경제

근간을 마련했다. 기병을 주로 한 지방군제의 하나인 오주서(五州誓)를 설치해 통일신라기 군사체제 정비의

기반을 닦은 것도 그가 재위할 때였다. 이러한 내정 정비작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675년 모든 관청과 주와 군의 인장을 구리로 주조해 나누어준 조치이다.

백성들의 생활안정에 대한 정책도 병행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해인 669년에는 고리대제한정책으로써

이자를 탕감시키는 조치를 취해 평민이 노비로 몰락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해 전쟁으로 피폐한 농업생산을 회복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681년 7월 문무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안에 능을 만들었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감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의 능이다.→  나당전쟁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은 신라 문무왕의 해중왕릉(海中王陵)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다.

 1967년 7월 2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이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고 한 유언을 따라서 장사한 것이다.

이 바위를 대왕암(大王岩) 또는 대왕바위라 하며, 해중왕릉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수로를 만들어 바다로 물이 통하게 하였다.

 

개요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역사 > 신라왕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덕여왕  (0) 2017.03.17
성덕왕  (0) 2017.03.16
원성왕  (0) 2017.03.15
헌덕왕  (0) 2017.03.12
흥덕왕  (0) 2017.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