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경주

석굴암

도화골 2017. 5. 3. 23:34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불국로 873-243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역사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 뒤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 중수하거나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정선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보수공사

일제강점기,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간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 번째 수복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천장이 새서 불상에 직접 비를 맞고, 주변의 불상의 배치도 불분명했으며 전체의 반이상이 돌과 흙에 파묻혀 있었고 그 틈새마다 잡초와 넝쿨, 이끼가 덮여 있었다. 최초의 보수 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됐고, 그 후의 보수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덮어버렸기 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장치로, 일본인들이 이것을 막아버렸기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방이후 구조

방형 전실(前室)을 지나 통로를 지나면 원형 굴이 나타난다. 천장은 돔형으로 밖에서 보면 그 위에 흙을 덮은 모양이다. 너비는 좌우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로, 치밀한 건축적 계산 하에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본존불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미터의 거대한 불상이다.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하였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 이라고 한다.

십일면관음보살상

본존불 바로 뒤의 벽 한가운데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있다. 이 상은 다른 조각품보다 유난히 입체감이 강조되어 있다. 약간 웃음을 띤 표정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천의, 섬세한 손가락과 발가락, 우아하게 높이 설치된 연화좌가 특징이다.

팔부신장

전실을 들어서면 양쪽 벽에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있으나 내부의 것에 비해 그 수법의 정교함이 덜하다.

인왕상

통로 입구 양 옆에는 인왕(仁王) 혹은 금강역사 한 쌍이 석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사천왕상

입구 통로, 즉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각 2개씩 반육각되어있다.

천부상

통로 입구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 있다.

보살상

천부상 옆에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있다.

10대제자상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상이 있다.

감실상

10대제자상 위로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작은 부조상을 하나씩 안치하였다. 그 중에는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이 있다. 두 개는 대한제국 때 일본인이 반출해서 지금은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천장 및 기타

천장은 돔형으로 되었고 중심에는 연판(蓮瓣)을 새긴 둥글고 깨진 돌로 눌러놓았는데, 그 교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은 놀랄 만하다. 그리고 이 석굴암 옆에 보면 굴이 있는데, 이 굴에서 문무왕릉과 연결되는 길이 있다. 내부에서는 보존을 위해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보문사에도 경주의 석굴암과 비슷한 석굴암이 있다. 서울의 석굴암은 1970년부터 1972년까지 2년간 만들었으며 경주의 석굴암보다 약간 작다. 경주의 석굴암은 문이 1개인데 서울의 석굴암은 문이 3개이며 팔부신장(八部神將)은 생략되었다고 한다.

설화

석불(石佛)을 장차 조각하고자 큰 돌을 다듬어 감개(龕蓋)를 만들 때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갈라져서 분통이 터져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천신(天神)이 내려와 만들어놓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이며, 실제로 원형 연화 광배는 세 부분으로 갈라져있다.

평가

석굴암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도 간다라 미술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굴암은 그 구조가 기묘할 뿐만 아니라 본존 및 벽면 조상의 비범한 기술로 보아 신라 시대 예술을 대표할 만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산을 파내어 만든 석굴은 있으나 석굴암과 같은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서울대학교 이주형 교수는 석굴암이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바미얀 석굴과 석굴암은 공통적으로 원형평면 위에 배치가 되어있고 형 천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네모반듯한 전실과, 안쪽 벽에 부조로 새겨진 상, 그리고 위쪽으로 감실이 있고 그 안에 보살상이 있는 점 등이 똑같다. 그리고 이 교수는 바미얀 석불의 원류가 돔 형태의 로마 판테온이라고 주장했다.

논란

문화재로서의 원형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 본래의 모습에 대한 논란이 있다.[4]

  • 광창 - 석굴암 본존불 앞쪽 천장에 조명을 위한 구멍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 비어 있는 감실 - 비어 있는 2개의 감실에도 불상이 있었는데 반출되었다는 주장이다.
  • 목조건물 - 석굴암 굴 앞에 목조건물이 세워져 있었다는 주장이다.
  • 채색 - 석불에 채색을 했었다는 주장이다.

본존불의 존명에 대한 논의들이 있다.

  • 석가모니불
  • 아미타불
  • 약사여래불
  • 비로자나불
  • 노사나불
  • 연등불
  • 미륵불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의 토함산 중턱에 있는 암자이다. 석굴은 통일신라시대의 김대성이 만들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 문화재의 걸작이자 국보 제 24호. 현대에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산 아래의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입장료는 2016년 성인 기준 5천원. 불국사와는 별도의 요금이다. 5천원을 내고도 실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로만 지나가며 볼 수 있다. 매년 석가탄신일에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마저도 내부에선 사진 촬영은 임의로 금지된 상황이다.

조선 시대 이전

신라 경덕왕때 재상인 김대성이 창건해서 혜공왕 10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설화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김대성 문서 참조. 그때는 석불사로 불렸으며 석불사로도 이 문서에 들어올 수 있다. 유홍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석불사로 언급된다.

조선 시대 숙종 29년(1703년), 영조 34년(1758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고 하나, 1909년 재발견되었을 당시 본존불의 코가 깨져 있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으며 "천장의 1/3이 무너지고 구멍에서 흙이 내려오고 있으니 이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발견

한일합병 직전인 1909년, 잊혀져 있던 석굴암을 발견한 것은 경주의 한 우체부이었다.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배달 가던 우체부가 범곡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니 입구에는 문이 있고 천장은 무너져 있었던 석굴암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석굴암의 보존 상태는 최악이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특히 본존불의 코는 깨지고 연화대도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한일병탄 이후 일본에 반출될 뻔하기도 했으나 현지 관리가 이를 거절하였고, 총독 데라우치가 이곳을 시찰한 뒤 석굴암을 제자리에 두되 현지에서 보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한국에 남아있게 되었고 보수가 시작되었다. 1913년 10월부터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였고, 1914년 8월 말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 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차단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유럽이 자국의 문화재를 복원하듯 당시의 최첨단 건축기법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석굴 밖에 외벽이 세워졌고 외벽과 석굴 사이에 콘크리트가 채워졌다.  그 결과는 당시 과학으로는 몰랐던 문제 중 하나로서 시멘트가 화강암을 손상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석굴암의 구조를 전부 파악하지 못한채 공사를 강행하여 내부벽과 불상 표면에 엄청난 양의 결로와 이끼가 나타났다.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드는 문제가 나타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한 보수공사를 실시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당시 보수 공사 비용은 당시 돈으로 22,726원. 지금 가치로 대략 38억 원 정도 된다.


일제가 복원하기 전의 석굴암 모습. 돔이 붕괴되어 있다. 완전히 뒤틀리고 붕괴하고 있던 석조 건축물은 구멍만 조금 떼우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고 완전히 해체, 복원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일제에 의해 해체된 석굴암.


보수공사 후 다 조립하지 못하고 방치된 석굴암 석재들.

만약 해체보수를 매뉴얼대로 제대로 했다면 이 석재들은 다시 조립되어 원상태로 끼워져 있던지, 아니면 최소한 어느 지점에 있던 몇 번 석재 같은 메모라도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기록의 보존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해체 공사를 추진한 것.

1960년대 잘못 복원된 석굴암. 현재까지 이 내부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참고로 팔부신중은 일제가 보수해놓은 굴절된 형태가 올바른 것이었지만 이후 보수공사에서 한국측 학자들이 자료부족으로 인해 다시 펴놓은 것(…).

그뒤에 장면 내각과 박정희 정권 때 다시 재보수를 했지만 콘크리트를 떼어내도 모자랄 판에 그 위에 다시 돔형으로 콘크리트를 다시(!) 타설했다. 당시 유네스코에서 온 석조문화재 전문가까지 초빙해서 추진한 공사였으나, 우습게도 그 문화재 전문가는 결정이 난 뒤에야 국내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이건 안되겠다. 하면 안된다"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복구공사 취소 및 재설계로 입장을 바꿨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 조언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 그 결과는 더 미칠듯한 내부 습기로 금세 나타났다. 게다가 이 습기로 인해 내부에 이끼까지 끼자 이를 제거한답시고 고압 증기를 이용한 세척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훼손이 더 생긴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서울대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가 투입되어 석굴암 내부를 완전히 밀폐하고 그 안에 에어컨을 가동함으로써 석굴암은 본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완전통제구역이 되어버렸다. 본래 설계도만 봐도 참배객이 들어와서 석굴암 본존불 주위의 10대 제자상과 11면 관음상으로 둘러진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참배하는 구조임을 생각해 본다면 뼈 아픈 결정. 하지만 일단 습기는 제거해야 했기에 김효경 교수 팀은 완전 통제 및 에어컨 설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2013년 11월 현재 대좌의 균열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또한 장기적으로 원형 복원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예술적 측면

석굴암 본존불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석불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며,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의 석불들은 조형적인 완성도에서 점차 쇠퇴하는 측면이 있다.

남북국시대의 신라는 성덕왕 때부터 전제왕권이 수립되고 효성왕~경덕왕 초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신라의 전제왕권이 극성기를 맞던 때였으며 화엄종과 같은 종파불교가 전제왕권의 이념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주는 국제도시로 변모하고 당, 인도, 페르시아 문화가 직접적으로 수입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예술적 특징은 성당(盛唐)의 사실주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신라화된 모습을 보여줘서 '이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예술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즉,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조형적으로 완벽한 불상을 만들었다. 중국에 영향을 주었던 인도 간다라 미술의 영향도 고려된다.

석굴암 본존불은 이상적 사실주의에 바탕한 육감적인 관능성을 보여준다. 쇄골 표현이나 허리와 엉덩이는 완전히 일직선이라거나... 불상의 표정은 자비롭다기보다는 왕을 연상케하듯 근엄하고 덩치가 크고 남성적인 느낌이 철철 흐른다. 그 이유는 위에 서술한 전제왕권 강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경덕왕의 얼굴이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조각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조각중 하나다. 보통 석조 조각은 비교적 무른 대리석(모스경도 2~3)을 이용하는데 비해 석굴암은 암석중에서 가장 단단한 암석중 하나인 화강암(모스경도 6~7정도)을 깎은 조각 난이도로서는 최상위의 조각이라 할 수 있겠다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은 중국 보경사 11면 관음과 상당히 유사하다.


논란

그런데 석굴암 불상에는 논란이 있다. 첫 번째는 조성 연대 문제다.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751년에 중건되었다고 나오지만 문제는 저자인 일연도 정확한 조성 시기를 몰랐다는 것. 그리고 완공된 것은 774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신라 불교미술은 중대와 하대의 양식이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은 석굴암이 중대 양식이냐 하대 양식이냐를 결정하는 문제.

어쨌든 오랜 시간을 두고 건축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문제인 모든 조각상들의 양식이 불일치하는 문제가 생겼다. 본존불을 1양식으로 규정하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가의 10대 제자상을 2양식, 사천왕, 인왕상, 팔부중상은 3양식으로 규정할 때 1양식과 3양식의 조형적 미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본존불이 최정점이라면 팔부중은 그에 비해서 세밀함이 덜하고 양감이 부족하다.

세번째 문제는 본존불의 명호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 것이다. 명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 불상의 명호에 따라 주변에 배치된 조각상들의 명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수인(手印)은 별인 중에서도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바닥을 보이게 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데 항마촉지인은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이다. 그래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석가여래로 규정되어 왔지만 이게 석가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신라 불교 조각상의 경우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도 아미타불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음에도 석가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다. 또한 창건자인 김대성 관련 설화를 보면 아미타불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신라에서 이런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나온 이유는 당시 신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삼국 시대에는 미륵이 어느 나라에 강림하느냐에 관심을 쏟느라(...) 미륵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때는 전쟁 때 희생된 전몰자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정토 사상에 기반한 아미타 신앙이 유행했고 그 당시 제작된 불상은 우견편단을 하고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계에서 석가여래라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본존불 주변에 있는 10대 제자상 때문이다. 10대 제자는 석가불에만 따라붙는 상이며 아미타불은 제자상이 없다. 무엇보다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의 유무인데 관음보살은 석가불을 호위하는 보살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학계에서 석가여래를 주장하는 사람의 비율은 9, 아미타불을 주장하는 사람은 1 정도로 석가여래라는 것이 중론이다.   


각종 루머들


대중들에게 대단히 인지도가 높은 문화재이다 보니 각종 루머들이 많이 있다.
본존 이마에 박힌 보석(호박?)을 일본인들이 빼돌렸다거나 그 보석에 햇빛이 닿으면 반사돼서 일본까지 간다는 뭔가 초현실적인 것이 많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실 마의태자가 2명이고 1명은 금강산에 나머지 1명은 양평 용문사에 들어가 죽었다. 그것에 그의 시신과 함께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일본군이 전쟁 말 일본 본토로 가져가려 한다는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돔형지붕의 뚜껑이 파손되어 있는데 이것도 일제의 훼손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사실 이건 만들 때 부터 이랬다고 한다. 게다가 일제가 보수하기 직전 찍은 사진에 이 돔을 찍은 사진이 유일하게 한 장 남아있는데 이 사진에도 파손되어있다. 삼국유사에는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를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대성이 속이 상해 있다가 깜빡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시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창건자가 돌 깨뜨려놓고 천신이 붙여주셨으니 그냥 쓰자고 얼렁뚱땅 넘어간 것(...)


다른 루머로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 방향이며 이는 신라의 호국 불교 사상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방향이 대충 비슷하긴 하나, 정확히는 동지 때 해가 뜨는 방향에 더 가깝다. 반면 '석굴의 방향이 동짓날 일출 지점’이며 ‘동해의 아침 햇살을 본존불 백호에 맞추려는 거룩한 의도로 석굴이 지어졌다’는 논지가 일본 신화 아마테라스 신의 태양 숭배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다.

원래는 채색된 불상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역사스페셜에서도 다룬적이 있다.



2017. 05. 03. 17:00 석굴암 임구


2017. 05. 03. 17:30 석굴암 참배객  200m나 줄을 서.........




2017. 05. 03. 17:30 석굴암 참배객  200m나 줄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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