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경주

분황사

도화골 2017. 5. 3. 23:26

분황사(芬皇寺)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구황동)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분황사석탑(신라), 국보 제30호, 높이 930cm, 경북 경주시 구황동

이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3년(634)에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에 일본인이 허물어진 것을 해체,수리하였다. 1층 몸체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

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는 네 마리의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다.

탑에서 나온 돌 사리함(舍利函)에는 여러 가지 구슬, 가위, 금, 은바늘과 은함, 숭령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이

들어 있어, 고려 숙종(肅宗), 예종(睿宗) 연간에 해체, 수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에는 634년(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석탑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당간지주가 있고, 탑 북쪽에는 근래에 세운 보광전이 있다.


일찍이 원효는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疎〉를 썼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있었고, 755년(경덕왕 14)에 강고내미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약사여래상을 만들어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좌전의 천수대비 벽화는 영험이 있어서 경덕왕 때 희명이라는 어린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고 전한다.

1101년(숙종 6) 숙종의 조서에 의해 한문준(韓文俊)이 화쟁국사비를 건립했다. 그뒤 몽골 침입과 임진왜란 등으로 큰 손상을 입었다.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승당·종각이 있으며, 이밖에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분황사화쟁국사비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분황사석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석등·건물지의 초석 등이 남아 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제30호. 높이 930cm. 분황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이다. 원래는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3층뿐이다. 단층의 기단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았으며, 그 위에 화강암으로 탑신받침을 마련하고 탑신을 쌓았다.

1층 탑신 4면에는 각각 감실을 만들고 문비를 달았는데, 감실 속에는 불상 같은 예배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문 좌우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하여 끼운 인왕상이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매우 동적이며 근육의 표현에도 양감이 강조되어 사실적인 조각표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중국의 톈룽산[天龍山] 석굴에 있는 수대(隋代)의 인왕상들과 비교된다.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석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조각솜씨가 부드럽고 사실적이다. 옥개부는 전탑 특유의 구조인 상하에 층단이 있다. 1915년 수리 때 2층과 3층 사이의 석함 속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은제사리합, 구슬류, 금동제장신구류 등이 수습되었다.


분황사약사여래입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이 상은 원래 755년에 강고내미가 만든 약사불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의 원형은 거의 파괴되고 조선시대에 새로 보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얼굴은 넓적하고, 법의는 두껍고, 조각수법이 전체적으로 투박해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분황사석조불상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진열되어 있다. 대부분 8세기말이나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말기의 분황사파 조각이라고도 불린다. 발견된 상들을 분류하면 목이 잘린 원각의 불좌상 11구, 암판에 부조된 불좌상 2구, 원각보살입상 1구, 불두 5점, 불상편과 광배 및 광배편 등이다.

이 상들 중에 수적으로 많은 불좌상들은 대부분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약합을 든 약사불상 1구,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상 2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상들은 각기 다른 형식의 법의를 걸쳤으며 조각수법도 약간씩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시에 제작되지는 않은 듯하다. 법의는 통견과 우견편단으로 입었는데, 우견편단의 경우 오른쪽 어깨 끝에 매듭장식이 표현되어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된 불좌상 형식의 다양한 변형과 토착화 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들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분황사의 팔각형 석정(우물)과 모전석탑.


◆부처의 은덕 기리며 세운 분황사 

황룡사지 북쪽에는 선덕여왕 때 건립된 분황사가 자리 잡고 있다. 
선덕여왕은 고구려, 백제와의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나라와 백성들은 부처의 은덕으로 보호하기 위해 고심했다. 분황사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지어졌다. 

분황사에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모전석탑이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높이 1m 정도의 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탑신을 쌓아 올린 독특한 형식의 석탑이다. 한 변의 길이가 약 6.6m에 높이 약 4m의 제1탑신이 있고 2층과 3층이 있다. 9층탑이었다고 전해진다. 1층 몸돌에 석실이 있고, 그 안에 부처를 모셨다. 석실 좌우에는 인왕상이 태권 동작을 하고 서 있다.  

분황사의 모전석탑 바로 옆에는 비석은 없고 비석을 세웠던 대좌만 남아 있다. 고려 숙종은 원효대사가 동방의 성인인데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아 애석하다면서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를 세우게 했다고 한다. 

분황사에는 또 신라시대의 우물 중 가장 아름다운 8각형의 석정(돌로 만든 우물)이 있다. ‘호국삼룡변어정(護國三龍變漁井)’으로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신라를 지키는 호국용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분황사를 나오니 폐사지엔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다. 공교롭게도 분황사와 황룡사 모두 신라 문화의 정점을 찍었던 선덕여왕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선덕여왕의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부처가 모셔진 모전석탑의 1층 석실 모습. 태권동작을 하고 서 있는 인왕상


분황사 동영상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꽃밭(분황사 앞 공터) 멀리 보이는 건물이 황룡사역사문회관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꽃밭(분황사 앞 공터) 왼쪽 멀리 보이는 건물이 황룡사역사문회관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꽃밭(분황사 앞 공터)  멀리 보이는 숲속의 분황사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꽃밭 (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꽃밭(분황사 앞 공터) 멀리 보이는 분황사(芬皇寺), 분황사 주차장, 당간지주(幢竿支柱).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꽃밭 (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꽃밭(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꽃밭(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분황사 앞 공터)


2018. 07. 01. 일요일 . 백일홍 속의 해바라기 한 송이  (분황사 앞 공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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