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도화골 2017. 2. 28. 19:57

 

 

 

감은사지(感恩寺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

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졌다.

 

경주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

국보 제112호. 높이 13.4m.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에

속한다.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중석·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기단

에는 3개,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를 세웠다.

탑신부의 1층은 우주와 면석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한 것,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의 흔적이 보인다.

고선사지3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한다.

 

감은사지서3층석탑 사리장엄구

보물 제366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59년 12월 감은사지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의 사리공

에서 발견된 유물로, 청동제 사리기와 사리기를 넣었던 청동제 사리외각함을 말한다.

사리기(높이 20cm)는 기단·몸체·보개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 보개부분은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정사각형의 기단에는 내부에 중대를 세우고, 그 바깥 벽에는 1면에 2개씩 안상을

투각하고, 그 사이의 공간에 신장상과 공양상을 따로 주조하여 1구씩 교대로 배치했다. 기단 위에는

주위로 난간이 둘러졌으며 가운데에 보탑을 안치하고 네 귀퉁이에 주악천인상을 각각 배치하였다.

보탑은 좌우에 고리가 달린 복발형에 앙화를 얹고, 그위에 이중의 연판받침과 불꽃무늬로 장식된 수정제의

둥근 보주가 놓여 있다. 보탑 안에 있는 수정제 사리병(높이 3.8cm)은 밑바닥까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밑에는 수정제의 원반이 받치고 있다. 이 사리기를 담았던 사리외각함(높이 31cm)은 상자형으로, 방추형의

뚜껑이 덮여 있고 아랫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사리함의 4면에는 사천왕상(높이 21.6cm)을 1구씩

타출기법으로 조각하여 붙였다.

사천왕의 좌우에는 짐승얼굴을 한 고리가 달려 있고 그 주위에 꽃무늬가 장식된 동판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상 중 2구는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나머지 2구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아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사천왕상은 간단한 원형의 두광에 갑옷을 입었으며 한 손은 허리에 대고 다른 손에는 각기

보주·금강저·창·탑을 들고 있다. 상태가 온전한 두 상은 각각 소와 주유(난쟁이)를 밟고 서 있다. 크기가

작은 상이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얼굴표정이나 당당하면서도 균형감있는 체구와 섬세한 갑옷의 장식표현

등은 당대 불교조각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시킨 통일신라시대 사천왕상의 초기 조각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부릅뜬 눈과 수염이 달린 얼굴모습은 서역인을 연상시킬 만큼 이국적으로 당시의 국제적인 문화교류

를 짐작케 해준다. 감은사의 건립연대를 682년으로 볼 때 현재 알려진 통일신라의 사천왕상으로는 가장

이른 예이며, 사리기 역시 당시 왕실발원의 공예품으로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견대(利見臺)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4-3번지 (동해안로 1480-12)

 

이견대(利見臺)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능원인 대왕암(大王巖)과 관련된 신라 시대의 유적지이다.

고려사》(高麗史) 속악지(俗樂志)에는 동명의 곡명이 실려 있다.

1969년 문화재 관리국 조사로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번지에서 옛 터를 발굴하고 문무왕릉(대왕암)과

함께 대한민국 사적 제159호로 지정하였다. 옛 터에는 1979년에 복원된 이견대의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실제 이견대의

위치인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

 

개요

이견대의 이름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2 만파식적조에 처음 등장한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해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은 것을 기록하면서 감은사에 보관되어 있던 기록을 인용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다가 다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으며, 아들 신문왕이 즉위한 뒤

공사를 이어받아 당 개요 2년(682년)에 끝마쳤고 절의 금당 섬돌 아래에 동해 쪽으로 구멍 하나를 뚫어 두어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닷물을 타고 절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과, 이때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 절을 감은사라 했으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견대의 이름 이견(利見)은, 《주역》 건괘에 나오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봄이 즐겁다"(飛龍在天利見大人)라는 괘에서 따온 말로 여겨진다.

《삼국유사》는 또, 감은사가 완성된 이듬해 동해 가운데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내려왔다는 보고를 듣고 일관에게

점을 쳐 보게 한 결과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33천으로 돌아간 김유신과 함께 신라를 지킬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을 내릴

것이라는 괘가 나오자 신문왕이 기뻐하며 이틀 뒤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몸소 바라보았다고 적고 있다. 그 뒤 신문왕은 동해의

용으로부터 검은 옥대를 선사받았고, 용의 계시대로 섬 위에 솟아 있던 대나무를 베어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신비한

피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조에는 이견대가 경주부 동쪽 50리 해안에 있었다고 적고,

삼국유사》의 기록을 소개하는 한편 이견대 아래로 70보(《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0보) 거리의 바다에 네 귀퉁이가 마치

네 개의 문이 우뚝 솟은 모양과 같은 돌이 신라 시대에 문무왕을 장사지낸 곳이며 현재(조선 초)까지도 사람들이 대왕암이라

부르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위치

1969년 한국 문화재관리국은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번지에서 이견대의 옛 터를 찾아냈고 그 앞의 바다에 떠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의 해중릉임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이곳은 대한민국 사적 제159호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옛 터로

알려진 자리에 건물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 복원된 이견대가 실제 이견대 자리인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의문을 제기한 것은 1969년 이견대 발굴 당시

신라오악조사단원으로 참여하였고 이견대의 위치 비정에 일조한 고(故) 황수영 박사였다. 황수영 박사는 2002년 4월 자신이

《불교신문》에 투고하고 있던 「불적일화」(佛跡逸話)라는 연재 기고를 통해, "일단 이견정의 위치를 발굴지로 비정하기는

하였으나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보이는 ‘축성(築成)’의 자취를 찾지 못한 것이 못내 개운치 못하였다."며, 그러던 중 1995년

가을께, 문무대왕릉 관리인인 김도진 씨로부터 현재는 없어졌으나 옛날에는 대본마을에서 감은사로 넘어 가는 길이 이 산으로

해서 나 있었다는 것이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곳은 예전에 최남주 선생이 말하던 산 위였고, 황수영은 대본초등학교

(2010년 폐교, 현재 임실치즈농장체험장) 뒷산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1,300∼1,600여 ㎡(약 400∼500평)의 너른 대지와 그 삼면에

인공으로 축석된 자리에 부근에 신라 시대 기와 파편들, 커다란 민묘와 조선 시대에 세워진 석비 1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석비에는 '이견대(利見坮)'라는 글자가 보이기도 한 것을 황수영 본인이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황수영은 자신의 비정이 틀렸음을

시인하며 알려진 이견대 자리는 신라 시대의 이견대가 아니라 조선 시대의 역원인 이견원(利見院)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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