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호족 박윤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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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변성(戒邊城)이 현재의 충의사가 있는 학성동과 반구동에 걸친 신두산(神頭山, 현재 학성산, 반구동 173-2번지, 학성동 318-5번지 일원)에 위치해 있으며, 처음 쌓은 시기는 신라 신문왕 때인 690년 전후였다. 그리고 계변성은 신라 말에 신학성(神鶴城)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997년 9월 고려의 성종이 태화사(太和寺)에 방문해 고을의 또 다른 이름으로 학성(鶴城)을 정해주면서 이름을 추가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신라 때 만든 계변성이 고려시대에 들어서 이름만 바꾸었을 뿐 여전히 울산 고을의 중심 성곽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기록들을 더 찾아볼 수 있다. 고려 중기의 학자이며 <동국이상국집>의 주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1202년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병마녹사를 자청하여 내려왔고, 그때 계변성에서 제사지내며 제문(祭文) 3편을 올린 일이 있다. 그 중 <울주 계변성 천신에게 올리는 제문(蔚州戒邊城天神祭文)>이라는 제목과 ‘아득한 천년 옛 고을에 우뚝 솟은 작은 성은 오직 신의 영기가 가득하다(邈千年之古郡 有然之孤堵 惟靈神兮鎭壓)’라고 한 내용을 볼때,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신학성과 학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중기에 계변성이라고 불려 여전히 초창기의 이름이 유지되고, 또한 성곽도 사용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울산부선생안(蔚山府先生案)>의 ‘울산부치적(蔚山府治蹟)’에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여기서는 ‘(울산) 고을은 고려 때 흥례부(興禮府)를 세웠다. 그 뒤에 숭록대부(崇祿大夫) 박윤웅(朴允雄)[울산박씨 시조]이 공생(貢生)으로 나라에 공이 있어 파사(婆娑), 굴아화현(屈阿火縣), 동진현(東津縣), 우풍현(虞風縣)을 합하여 울주대도호부(蔚州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마침내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을 두고 학성(鶴城=계변성)을 치소로 삼았다’ 여기서의 울주대도호부는 고려 초·중기에 들어 흥려부가 울주로 바뀐 것을 뜻하며, 목사와 판관제도는 조선에 앞서 고려시대에도 시행된 것이므로 이 내용은 고려시대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행정 성곽(치소성(治所城))의 이름을 ‘학성’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계변성의 또 다른 이름인 신학성(神鶴城)을 줄여 부른 것으로 고려시대에도 줄곧 계변성이 울산(당시 울주)의 읍성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즉 계변성(신학성, 학성)은 신라시대 경주의 관문이었던 울산 고을을 지키던 성에서 출발하여 고려시대에 울산의 읍성으로 탈바꿈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라시대에 쌓은 성곽을 고려시대에 이어 읍성으로 사용한 예는 여럿 있다. 인근의 기장의 고읍성은 신라시대에 축성한 것을 고려시대에 줄곧 읍성으로 사용했고, 조선시대에도 읍성으로 사용했다가 140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돌로 새로 쌓았다. 그리고 진주성도 신라시대에 거열성(만흥산성)으로 쌓아 사용하다가 고려시대에 촉석성으로 이름을 바꾸어 사용했고, 조선시대에 들어 진양성으로 개축하였다.
따라서 계변성은 ‘신라 때 처음 쌓아서 울산을 지키고, 고려 때 유지하며 울산을 다스린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두 왕조를 거치며 지낸 계변성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앞서 언급한 <동국이상국집>의 ‘우뚝 솟은 작은 성(然之孤堵)’이라는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계변성에 대해 ‘도(堵)’라고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흙으로 쌓은 벽’이라는 뜻으로 ‘토성(土城)’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조선후기 이긍익(李肯翊)이 편찬한 <연려실기술>에는 계변성에 대하여 ‘산성(山城)’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계변성은 산에 의지해 쌓은 토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찾아낸 현재의 충의사 일원의 계변성 추정지에서 지표조사를 해보면, 그 둘레는 산 정상부와 그 동쪽을 감싼 삼각형과 가까운 위곽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10년대 지적원도에서도 일부 구간에서 성곽의 형태와 유사한 필지를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현재 남아있는 계변성의 단면을 살펴보면, 진흙에 물을 뿌려 시루떡처럼 일정한 두께로 다져가며 층층이 쌓은 판축(版築)식 토성인 것을 알 수 있는데, 특이한 점은 그 위에 다시 기와 조각을 쌓아서 다진 와적토축(瓦積土築)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쌓은 신라시대의 토성 중 대표적인 사례로는 포항시 흥해읍에 위치한 남미질부성(南彌秩夫城)이 있다. 이 성은 신라 동북방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산 정상부를 감싸 쌓은 것으로 계변성과 목적과 형태가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고려의 남하(南下)로 930년 고려에 병합되었고, 고려 현종 2년(1011년)에 흥해읍성으로 개축되면서 성(城)의 기능은 읍성(邑城)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고려사>에 ‘현종 2년(1011년) 울주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즉, 계변성은 흥해의 남미질부성과 같이 신라시대에 흙을 다져쌓은 판축식 토성이었다가 1011년 토성 위에 다시 기와조각을 쌓아 흙으로 다진 와적(瓦積) 판축식 토성으로 보강되었고, 그 기능도 고려시대의 읍성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역사는 앞선 토대 위에 다음의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현재와 미래의 기반이 된다. 이처럼 계변성도 신라 위에 고려가 누적되어 조금씩 변화하였다. 따라서 계변성은 우리에게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놓치고 지나간 역사의 부분을 메꾸어 미래를 이어줄 소중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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