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이견대 (慶州 利見臺)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밑길 12-14 (감포읍)
문화재 지정 : 사적 제159호(1967.08.01 지정)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 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깊은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
동해구 표지석 아래로 내려가면 우현 고유섭선생의 반일 의지를 기리기 위해 1985년 제자들이 세운 기념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명백한 침략을 내선합일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우격다짐에 쐐기를 박듯,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경계한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돌이켜 생각하며 고유섭이 지은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세워져 있어 뜻이 더 깊다.
경주 이견대(慶州 利見臺)는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에 있는 통일신라의 유적건조물이다. 1967년 8월 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신문왕은 해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발굴조사 때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오늘날 새롭게 다시 지었다.
신문왕이 세운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1970년 발굴 당시 건물 터를 확인했으며 1979년 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이견정(利見亭)을 새로 지었다.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에 위치하고 있는 이견대는 1967년 8월 1일 사적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이견대기(利見臺記)
삼국을 통일하여 구우(區宇)를 평정한 문무대왕은 당나라의 비망(非望)으로 고구려 구토를 완전히 회수하지 못한 아쉬움과 일의대수를 격하여 대륙진출을 꾀하는 왜구의 방어를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의 세력을 근본적으로 퇴치한다는 것은 당시의 신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부득이 화해하여 현상유지를 도모하였으나 망국의 유민을 포섭한 왜국의 동태는 큰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아직 태평성대라 할 수는 없다. 고구려 구토가 당의 점령하에 있는데 왜구의 불시 침략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부왕(父王)과 같이 즐풍목우(櫛風沐雨)의 신산(辛酸)을 겪고 부왕의 하세(下世) 후에는 성신 김유신의 찬화(贊化)를 힘입으니 이제 스스로 유경의 고독 속에 소오(宵旿)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대왕은 평소에 지의법사에게 짐은 죽어서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하고 나라를 수호하리라고 하였다. 용은 축보(畜報)이나 대왕은 나라를 수호하는 길이면 축보라도 감수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즉위 21년 신사(辛巳, 681) 7월 1일 임종에 유조(遺詔)하시기를 짐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지 말라. 명종(命終) 10일 후에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서국식(西國式)으로 화장하여 동해구(東海口)의 대석상(大石上)에 장골(藏骨)하라. 짐이 호국의 용이 되어 길이 동해바다를 지키리라 하셨다.
생전에 삼국을 통일하고 붕후에는 호국의 용이 되어 동해를 지키시겠다는 것이다. 신문왕은 유조를 봉행하고 대행왕(大行王)이 호국사찰로 창시하여 미필한 곳을 보은의 원리(願利)로 완성하니 금당(金堂) 체하(砌下)에 동향으로 일혈(一穴)을 열어 용이 입사(入寺) 선요(旋繞)하도록 하였다. 유조에 순응하는 효심의 발로이다.
다음 해 임오(682) 5월 초 7일 원리에 낙성되고 해관(海官)과 일관(日官)의 봉청도 있어 신문왕은 망극의 슬픔을 용포에 간직하여 위의(威儀)를 갖추어 이곳으로 행행하셨다. 벽립(壁立)한 이곳 해안의 언덕 위에 가행(駕幸)하시어 선왕의 해중 능침인 대왕암을 지척에 알현하니 파간(波間)에 부침하고 운리(雲裏)에 현형(現形)하는 화룡(化龍)의 위용이 안전(眼前) 현연(現然)하였다.
시신(侍臣)을 보내어 능침을 검상(檢詳)하고 원리에 돌아와 유어(留御)하시며 사명(寺名)을 감은사라고 명하여 가행하신 곳에 대(臺)를 쌓고 사(榭)를 지어 이견대라 명명하시니 주역건괘(周易乾卦)의 이견대인(利見大人)에서 취한 말이다. 삼국유사에서는 5월 8일부터 7일간 풍우가 대작(大作)하였다가 16일에 풍파가 조용해져서 왕이 해중(海中)에 친행하시어 용에게서 흑옥대(黑玉帶)를 받고 또 유명한 만파식적의 용죽(龍竹)을 얻어 17일 환궁하였다고 하였으나 저간의 일은 다 기록할 수 없다. 만파식적은 문무대왕이 김유신과 같이 통일신라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의지의 상징물로 하사한 것이라 하고 효소왕대(孝昭王代)에 부례랑(夫禮郞)의 이적(異蹟)이 있어 다시 만만파파식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라 이후 일천 년 이곳 동해구의 유적은 점차 망각되어서 마침내 감은사의 법등(法燈)은 꺼지고 이견대는 기우단에서 역원(驛院)으로 바뀌고 대왕암은 뎅바위라고 불러 해룡전설만이 구전되어 왔다.
해방 후 1960년대에 들어 우리 손에 의한 석굴암 공사에 따라 이곳 동해유적은 다시 주목을 받아 1967년 5월 한국일보사 주관 신라오악조사단(단장 이상백, 김상기) 전원에 의하여 대왕암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장골을 위한 해중릉(海中陵)임이 밝혀졌다. 온 국민은 이 소식에 크게 놀랐고 문화재위원회는 새로운 사적으로 공포하여 문무대왕릉이라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이 감포(甘浦) 앞바다는 천만년 겨레의 저마다의 가슴속에서 잊히지 못할 곳이 되었으니 대왕암이 있고 이견대가 있고 감은사지가 있는 한 영광된 날의 역사와 같이 문무대왕의 사이불사(死而不巳)의 호국정신이 여기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견대에 올라 대왕암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대왕의 화룡정신(化龍精神)을 오늘에 되새기고 내일에 전하고자 하는 뜻에서 삼가 이 기문을 쓰는 바이다.
1976년 5월 김상기 찬(撰) 1990년 10월 손돈호 서(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