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경주

김유신장군

도화골 2021. 11. 18. 12:07

김유신장군묘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충효2길 44-7)

흥무대왕(烈興武大王), 金庾信

시대출생사망

신라
595년(진평왕 17),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乙卯)
673년(문무왕 13)

김유신(金庾信)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명장이다. 삼국의 역사를 이끈 인물들을 소개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에서도 김부식은 김유신을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전에 한반도에 자리 잡은 고대 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서로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나라가 바로 신라다. 그러니 신라의 영웅인 김유신이 집중 조명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특히 당대에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왕과 여러 귀족들,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불교 지도자들을 제치고 무장인 김유신이 최고의 위인으로 소개된 것은 그만큼 그가 가진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유신은 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의 멸망을 촉진시켰다. 그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으며, 조정 대신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김유신의 조상은 신라에 의해 532년(법흥왕 19)에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이었다. 신라 화랑도 풍월주의 역사를 기록한 《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 김유신 가계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김유신의 아버지는 각간(角干, 신라의 최고위급 관직) 김서현(金舒玄), 할아버지는 각간 김무력(金武力), 증조부는 구충대왕(仇衝大王), 고조부는 겸지대왕(鉗知大王)이다. 그런데 김유신 가계는 이미 겸지대왕 때부터 신라 귀족과 혼인으로 맺어져 있었다. 김유신이 가야 출신이지만 신라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의 어머니 역시 신라의 왕족인 만명(萬明)부인이다. 만명부인은 진평왕의 모후인 만호태후가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과 사통(私通)해 낳은 딸이다. 김서현과 만명은 한눈에 반해 몰래 사귀었는데, 숙흘종과 만호태후가 두 사람의 교제를 반대하자 함께 도망가 살다가 유신을 낳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김유신의 탄생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서현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熒惑), 화성(火星)과 진성(鎭星), 토성(土星)의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萬明)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동자(童子)가 금갑(金甲)을 입고 구름을 타고 당중(堂中)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후에 임신해 20개월 만에 유신(庾信)을 낳았다. 이때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乙卯)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41, 〈열전〉 권 1, 김유신 

 

김서현과 만명부인은 경진일(庚辰日)에 꿈을 꾸고 얻은 아이라는 뜻으로, 경진(庚辰)과 한자 모양과 발음이 비슷한 유신(庾信)이라 이름 지었다.

한편 만명부인과 김서현의 결혼을 반대했던 만호태후는 외손자인 유신을 한 번 보고 유달리 영특한 아이의 모습에 반해 김서현을 사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로써 김서현은 미약하나마 중앙 정계에 진출해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당시에 가야 출신이라는 점은 김서현과 김유신 부자에게 여전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럼에도 김유신은 가야계라는 열등감보다는 신라 왕족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 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김유신은 어린 시절부터 심신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해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이때부터 김유신은 남다른 기개로 삼국통일을 꿈꾸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김유신은 무인으로서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우면서 스스로 입지를 다져갔다. 특히 그의 나이 34세가 되던 629년(진평왕 51)에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낭비성(娘臂城)을 함락하는 전공을 세워 크게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춘추와 대의로 뭉치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김유신과 더불어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이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조카다. 그러나 진지왕이 폐위되었기 때문에 왕족이면서도 왕위 계승권이 없는 진골(眞骨)이었다. 그런 그가 성골(聖骨)이 아닌 왕족으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유신이라는 든든한 실력자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유신이 자신의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 보낸 이야기는 유명하다. 어느 날 김유신은 김춘추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함께 공을 차고 놀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뜯어지게 했다. 그리고는 첫째 여동생인 보희에게 뜯어진 옷고름 꿰매 주라고 시켰다. 그런데 보희가 부끄러워하며 나서지 않자 둘째 여동생인 문희가 김춘추의 옷을 꿰매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와 정을 통하게 된 문희는 그의 둘째 부인이 되었으며, 훗날 정실부인이 되었다. 이처럼 혼맥(婚脈)으로 이어진 김유신과 김춘추는 서로 지켜 주는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이들은 각자의 출신 성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의기투합해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는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여러 성을 공격했다. 이때 신라의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성주인 김품석(金品釋)이 전사하고, 그의 부인인 고타소(古陀炤)도 함께 죽었다. 그런데 김품석의 부인 고타소는 김춘추가 첫째부인 보량(寶良)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김춘추는 원통해하며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고자 했다. 그러나 신라의 전력만으로는 백제를 공략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에 김춘추는 스스로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가겠다고 나섰다.

고구려로 떠나기 전 김춘추는 김유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만약 고구려에서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김유신은 김춘추가 무사히 돌아오지 못한다면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를 쳐서 원수를 갚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고구려에 도착한 김춘추는 고구려왕에게 백제를 칠 수 있도록 군사를 내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미 백제와 동맹을 약속한 고구려가 그 청을 들어 줄 리 없었다. 오히려 원래 고구려의 땅이었던 마목현과 죽령을 돌려주면 군사를 내 줄 것이라고 했다.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고구려왕은 그를 가두었다.

한편 60일이면 돌아올 것이라던 김춘추에게서 소식이 없자 김유신은 정예부대를 조직해 고구려를 향해 출병할 태세를 갖췄다. 이러한 소식은 신라에서 활동 중인 고구려 첩자들에 의해 곧바로 고구려 조정에 전해졌다. 김유신의 부대와 상대해 전쟁을 치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 주었다. 어차피 김춘추를 붙잡아두고 있어야 고구려에 이득이 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을 부추겼고, 결과적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에 이르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김춘추와의 결속으로 힘을 얻은 김유신은 압량주 군주를 거쳐, 644년(선덕여왕 13) 상장군이 되었다. 김유신은 계속되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면서 전쟁 영웅으로 거듭났다. 다음과 같은 일화는 김유신의 그러한 면모를 부각시킨다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復命)하고 집에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백제 군병이 국경에 출둔(出屯)해 크게 군사를 들어 우리를 침범하려 한다는 급보(急報)가 또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에게 이르되, "공은 수고롭다고 생각지 말고 빨리 가서 적군이 이르기 전에 대비하라" 하므로, 유신은 또 집에 들어가지 않고 군사를 조련하고 병기(兵器)를 수선한 후 서쪽을 향해 떠났다. 이때 그 집의 사람들이 모두 문 밖에 나와서 기다렸는데, 유신은 문 앞을 지나면서도 돌아다보지 않고 50보(步)쯤 가다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해 마시며 "우리 집 물이 아직도 예전 맛 그대로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군사들도 모두 말하기를 "대장군이 이렇게 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골육(骨肉, 가족)을 떠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랴." 했다. 국경에 당도하자 백제 사람들은 우리 쪽의 병력 포진을 보고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물러갔다. 왕이 듣고 매우 기뻐하며 벼슬과 상을 주었다. - 《삼국사기》 권 41, 〈열전〉 권 1, 김유신 

 

이처럼 김유신은 왕의 신임과 백성들의 존경까지 한몸에 받고 있었다. 전쟁이 그를 더욱 강한 지도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647년(선덕여왕 16)에 성골 출신의 상대등 비담(毗曇)이 염종(廉宗)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김유신은 관군을 이끌고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 처음에는 다소 불리하게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곧바로 김유신의 기지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결국 김유신은 반란군을 제압하고 비담과 염종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로 김유신은 군부 최고의 지위인 대장군에 올랐다. 그해 선덕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신라의 왕족 중 유일하게 남은 성골인 진덕여왕이 그 뒤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신라의 실제적인 권력은 이미 이찬(신라의 17등급 중 두 번째에 해당되는 지위) 김춘추와 대장군 김유신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제·고구려 멸망의 불씨를 당기다 

648년(진덕여왕 2), 김유신은 백제에게 뺏긴 대야성(大耶性)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지난 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 장군 8명을 생포하고 1,000명에 이르는 백제군을 섬멸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김유신은 백제 장군 8명을 적진에 묻혀 있는 김품석과 고타소의 유골과 맞교환해 김춘추의 한을 풀어 주었다. 또한 승세를 몰아 백제의 악성(嶽城) 등 12성을 함락시키고, 그 공으로 이찬과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의 지위를 얻었다. 이어 진례(陳澧) 등 9성을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이듬해에는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7성을 침략한 백제군을 물리쳤다.

한편 654년(진덕여왕 8)에 진덕여왕마저 후사 없이 죽자 김춘추가 왕위를 이었다. 신라 역사상 첫 번째 진골 출신 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여러 신하들이 상대등인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알천은 이를 거절하고 이찬인 김춘추를 추천했다. '덕망이 두터워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걸'이라는 것이 추천의 이유였다. 김춘추 역시 처음엔 사양을 하다가 마침내 수락했다. 이처럼 알천이 왕위를 김춘추에게 양보한 데에는 김유신의 적극적인 지지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660년(태종무열왕 7), 상대등(上大等)의 자리에 앉은 김유신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백제 정벌에 나섰다. 김유신은 이미 첩자를 심어두고 내통하며 백제의 정세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의자왕의 실정이 극에 달해 백제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당나라에 직접 찾아가 원병을 요청한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것도 백제와의 전쟁을 일으키는 데 자신감을 더해 주었다.

태종무열왕은 태자 김법민(金法敏)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남천정(南川停)에 진을 쳤다. 그리고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이끌고 온 13만 대군과 덕물도(德物島)에서 합류했다. 이렇게 합쳐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泗泌城)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그 사이 김유신은 5만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사비성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황산벌(黃山벌)을 향해 돌격했다.

김유신의 부대는 황산벌에서 계백(階伯)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를 만나 고전했다. 그러나 어린 화랑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백제의 마지막 전선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어 나당 연합군과 합세한 김유신의 부대는 사비성을 공격했다.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예상대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에 무너져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김유신은 그 공으로 각간보다도 높은 대각간(大角干)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661년(태종무열왕 8), 태종무열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목전에 두고 죽었다. 뒤를 이어 태자 김법민이 왕위에 올라 문무왕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 정벌에 나선 소정방이 신라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신라는 아직 상중이었지만 당나라 군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김유신은 군대를 이끌고 나갔으나 백제의 저항군에 막혀 평양성까지 가 보지도 못했다. 김유신은 그다음 해에도 또 한 차례 당나라 군대에 전달할 군량을 싣고 고구려를 향해 나섰다. 그런데 이때는 소정방이 군량만 받고 철수했다. 이에 김유신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이때 김유신의 나이는 68세의 고령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몇 년이 더 흐른 668년(문무왕 8)이었다. 김유신은 평양성이 함락될 당시 서라벌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고구려 멸망 후 삼국통일에 기반을 닦은 공을 인정받아 대각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태대각간(太大角干)에 봉해졌다.

김유신은 천수를 누리고 673년(문무왕 13)에 죽었으며, 835년(흥덕왕 10)에 흥무대왕(興舞大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살아서도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김유신은 죽어서는 왕으로까지 추봉되는 영광을 누렸다. 역사적으로도 유일무이한 일이다.

 

당나라와의 연합, 약인가 독인가

김유신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명하게 나뉜다. 한민족의 위대한 통일을 일군 불세출의 영웅이라는 평가와 한민족을 정복하는 데 외세를 끌어들여 만주 땅을 잃게 만든 망국적 사대주의자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역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당나라와의 연합 부분이다.

신라는 꼭 당나라와 연합해야 했을까?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신라의 입장에서 그들은 살상무기를 들고 쳐들어와 땅을 빼앗고 백성들의 안전에 위해를 가하는 적이었다. 더구나 전장에서 혈육을 잃어버린 입장이라면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런 적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언제 어떻게 신라를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영향력 있는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외교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문제는 당나라의 속내였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공략할 때부터 사비성을 점령한 후 내친 김에 신라까지 공격하려고 계획했다. 당나라의 대장군 소정방은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김유신에게 뇌물을 주어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당나라의 이러한 뜻을 눈치채고 단호히 거절했다. 더 나아가 신라 백성에게 백제 옷을 입혀 백제인인 척 당나라를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소정방은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거두고 돌아갔다. 당시의 상황을 김부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은 "당군이 우리를 위해 적을 멸했는데 도리어 싸움을 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겠는가?" 하니, 유신이 "개가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운 경우를 당해 스스로 구원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허락하소서." 했다. 당인들이 우리 편의 대비가 있는 것을 정탐해 알고 백제왕과 신하 93명, 군사 2만 명을 노획해 9월 3일 사비에서 배를 띄워 돌아가고, 낭장 유인원(劉仁願) 등을 머물게 해 진영을 설치하고 수비하게 했다. 소정방이 돌아가 포로를 바치니, 천자(天子)가 위로하며 말하기를 "어찌해 이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했다. 소정방이 "신라는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들이 윗사람 섬기기를 부형(父兄)과 같이 하니, 비록 나라는 작지만 도모할 수 없습니다." 했다. - 《삼국사기》 권 42, 〈열전〉 권 2,  김유신 

 

비록 당나라의 도움을 받았으나 그들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려 했던 김유신과 신라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각 나라의 부흥군을 측면에서 지원하며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신라의 이러한 저항이 없었다면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를 지켜내는 일도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만주 지역의 영토는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민족의 개념이 싹트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것이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이 우리 역사에 던져 주는 의미이며, 김유신이 맡았던 역할이었다.

 

김유신장군 동상

김유신장군 동상 (소재지:경북 경주시 황성동 산 1-1 ( 알천북로 115 )

김유신장군 동상 (소재지:경북 경주시 황성동 산1-1 ( 알천북로 115)

 

김유신장군 동상 비명

 

오천만 우리겨레의 가장 큰 소원과 공통된 염원은 오직 국토통일이다 더욱이 북한공산도배들의 발길이 분단된 조국의 강토에 피를 발랐고 그대로 계속하여 적화만을 노리는 그들의 악날한 도발에 직면한 오늘 우리는 13백년 전에 이룩했던 삼국통일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그날의 원훈이었던 김유신장군의 구국정신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월성옛터에 동상을 세우고 행적을 적어 우리들의 귀감을 삼으려 한다 장군은 가락시조 수로왕의 12대손이요 마지막 구해왕의 증손이며 조부 무력은 진흥왕 때 신라로 들어와 백제군을 무찔러 공로를 세웠고 아버지는 벼슬이 소판에 이르렀고 대량주군사도목서 현공이었으며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우 숙흘 종익 따님으로 지체 높던 만명 부인 인데 일찍이 아버지 서현공이 태수로 갔던 만노군 지금 진천에서 태어나니 때는 신라 제26대 진편왕 건복12년이요 서기595년 이었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무리들을 이끄니 그들을 일러 용화향도라 했고 17세부터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중악 지금 단석산 석굴로 들어가 신명에게 빌어 영감을 얻고 정신을 연마하며 검도와 무술을 닦았었다 35세에 남비성 지금 청주에서 고구려군을 무찔러 이름을 떨쳤고 그 뒤 50세 때에 상장군이 되어 백제의 일곱성을 쳐서 크게 이겼으며 개선하여 돌아왔다가 다시 국경의 급보를 듣고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가족들도 만나지 아니하고 집 앞을 그냥 지나 전지를 향해 달려 나갔다. 다시 54세에 대야성 지금 합천에서 백제 군사를 크게 무찌르는 등 무릇 30여 년 동안을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치고 공로를 세웠지마는 자나 깨나 가슴에 맺힌 염원은 오직 하나 삼국을 통일하는 그것 이었다 외교방면의 태종무열왕과 군사방면의 김유신장군이 서로 짝을 지어 삼국통일을 이루기 위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을 결성 했던 것이니 그것은 다만 하나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신라의 정책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때는 왔다. 태종무열왕 향년 장군의 나이 66세 되던 해에 먼저 황산벌판 지금 연산에서 백제의 명장 계백장군과 싸워 이긴 다음 다시 나당연합군이 수륙으로 진공하여 백제수도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의 사직은 드디어 31678년으로써 그 막을 내리니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 20년 서기 660년 가을 718일 이었다 또다시 때는 왔다 문무왕 8년 장군의 나이 이미 74세 되던 해에 고구려 정벌의 모든 계획을 세우고도 왕이 안심하고 친정 할 수 있도록 수도에 머물러 후방을 담당하고 아우 흠순과 생질 인문들을 출정시켜 문무왕의 통솔아래 당군과 더불어 함력하여 평양성을 진격함으로써 드디어 고구려마저 28705년의 역사를 누리고 끝을 막으니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 27년 서기668921일이었다. 이같이 하여 신라는 역사적 숙제였던 삼국통일의 대사업을 성취시켜 단일민족으로서 북방민족을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거니와 이 거대한 사업들이 모두다 장군의 손에 이 하여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문무왕은 장군에게 태대서발한의 높은 직함과 식읍500호를 내렸다. 그로부터 다시 5년이 지난 뒤 문무왕 13년 서기673년 여름 6월 장군은 병석에 누워 문병 차 왕림한 왕에게 간곡한 최후유언을 드리되 부디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하사 나라를 든든히 하소서 하고 마침내 71일에 일세의 대 영웅이 향년 79세로 세상을 여의자 문무왕은 통곡하며 특별한 부의로 비단1,000필과 벼2,000석을 내리고 모든 국민들의 애통 속에서 성대한 예식으로 금산원에 장례 모셨는데 부인은 태종무열왕의 셋째공주 지소부인이요 54녀를 두었으며 가신지 162년 뒤 흥덕왕 때에 이르러 흥무대왕으로 추봉하니 어찌 역사를 창조한 큰 인물 앞에 바치는 빛나는 큰 영광이 아니겠느냐 슬프다 옛날 피로써 이룩한 통일조국이 오늘 와 다시 이같이 나뉘다니 우리 이제 단결과 의기의 화랑정신을 받들어 국토통일의 맹서를 짓자.

           덕지용 다 갖추신 화랑정신의 표상이여

           삼국통일로 역사를 창조한 민족의 어버이여

           우러러 받드옵니다 우리들의 힘이 되소서.

                                                서기19779월 일

                                                          전주 이은상 글

                                                          안동 김충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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