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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태조
성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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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추사 김정희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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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학의
대가 추사는 문무왕 비문을 살펴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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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는
'투후 김일제'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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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태조는 성한왕' 이라는 기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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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우리 역사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
문무왕
비는 현재 경주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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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유희해가 편찬한 [해동금석원]에는 다양한 비문의 탁본들이 실려있다 |
문부왕
비문의 앞 뒤면에 복원된 글자는 모두 2600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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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m60cm의 문무왕 비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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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의
첫 행에는 국학소경이라는 관직을 가진 이가 이 비문을 지었다고 돼 있다 |
중하단부에는
문무왕의 즉위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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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약 400여 년간 몽골고원과 만리장성 지역을 중심으로 |
세력을
떨쳤던 북방 유목민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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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에는
김일제의 자는 옹숙이고 본래 흉노 우지의 휴도왕의 태자였다 |
휴도왕은
감숙성 무위 서북지역을 다스리던 왕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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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는
한과 흉노의 전투에서 한무제의 포로가 되어 한나라의 마부로 전락했다 |
한무제를
암살하려던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데 김일제가 큰 공을 세운 것이다 |
한무제는
김일제를 제후국 왕으로 임명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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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김일제에게 주어진 직책이 바로 '투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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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의
태자로, 한나라의 노예로, 다시 한나라에서 황제 다음으로 높은 |
지위에
오른 파란만장했던 인물이 김일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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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바로 신라의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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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비문에는 문무왕 15대 선조가 성한왕이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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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에도 태조 한왕이라는 기록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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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는
간략하게 '성한왕'을 '한왕이라고 축소해서 쓴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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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2대 흥덕왕의 비석에도 '태조 성한왕'이 등장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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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왕은
흥덕왕의 24대조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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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은
흥덕왕의 9대조라 기록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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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씨의 시조가 성한왕이라 기록돼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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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7대째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이어져 왔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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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7대 후손이 성한왕이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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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와
동일 인물로 확인되는 신라태조 성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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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7대조 조상은 흉노족 김일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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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테타의
주역 왕망과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은 이종사촌 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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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사촌이
일으킨 반란에 연루 혹은 가담했던 김일제의 증손자 김당은 |
피의
보복을 피해 투국을 떠나 성까지 바꾸며 중국을 탈출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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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로 이동해 뿌리를 내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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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비는 경주 낭산 사천왕사에 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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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왕릉 아래서 밭갈이 하던 농부의 괭이 끝에 걸려 세상에 드러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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