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거세왕(赫居世王)
혁거세 거서간(赫(爀)居世 居西干, 기원전 69년 ~ 기원후 4년, 재위: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은
신라의 초대 국왕이다.
거서간은 진하의 말로 왕 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혁거세 거서간이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사소부인(娑蘇夫人)이 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혁거세(赫(爀)居世)란 표기는 한자 음과 뜻을 합친 표기로서, 赫(爀)은 뜻인 "밝"에 가까운 음으로 읽으며,
世는 세상을 뜻하는 고유어 "누리", "뉘"에 가깝게 읽는다. 비슷한 음을 딴 다른 표기로 弗矩內(불구내)가 있으며,
결국 본디 이름은 밝아누리(세상을 밝히다)에 가깝다.
박씨라는 성씨 또한 왕건이 건국한 고려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했음을 고려한다면
혁거세가 성씨를 사용했다는 근거는 없다.
혁거세를 도와 서라벌(신라의 초기 국명)을 건국한 사로 6촌장 중 알평, 구례마, 지타도
각각 이씨, 손씨, 배씨의 조상이 될 뿐 성씨까지 표기하지 않았다.
신라 992년의 역사 동안 성씨를 사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생애
출생
그는 사로국 6부 천장들이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다. 즉, 기원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각기 자기 자녀들과 함께 알천 언덕에 모여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모두를 다스려 줄 임금이 없어 모두가 안일하여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도무지 질서가 없다. 그러하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라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 때, 회의 장소인 알천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楊山)이라는 산기슭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은 더 잘 보기 위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곁에서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하얀 말 한 마리가 절하는 것처럼 한참 꿇어 엎드려 있다가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말이 떠나자 촌장들은 그 말이 누었던 장소로 일제히
몰려가 봤더니 그 곳에는 자줏빛의 큰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촌장들이 그 알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깨져버렸다. 그 안에 생김새가 몹시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모두들 놀라고 신기해 하며, 아기를 동천(東泉)이라는 샘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그러자 아기의 몸에서 광채가 나고, 짐승들이 몰려와 덩달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촌장들은 그 아이의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 이름을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
또는 혁거세(赫(爀)居世) '라고 지었다.
일연은 사소부인에게서 출생했다는 설도 기록하였다. 여기서 서술성모는 선도성모와 같은 여신이다.
사소부인의 출신지는 정확하게 전하지는 않으나 그녀가 정착하였다는 형산이란 서형산(西兄山),
선도산(仙桃山)이라고도 부르는 산으로, 중국 황실의 딸인 혁거세 거서간 어머니가 중국을 떠나
정착하였다 한다. 여기서 중국을 지금의 중국이 아닌 말 그대로 중국(中國). 여러 제후를 다스리는
중심적 나라라는 견해도 있다.
이름의 뜻
양주동의 연구에 의하면, ‘朴赫居世’의 ‘赫’과 ‘朴’은 둘다 ‘ᄇᆞᆰ’(밝다)의 뜻을 반복하여 쓴 것이다.
서라벌 개국
혁거세는 10여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였고,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13세인
기원전 57년 6월 8일 (음력 4월 28일 병진일) 에 즉위,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기원전 41년(즉위 17년)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부인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기원전 39년(즉위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으며, 기원전 32년(즉위 26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으니
이때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
기원전 20년(즉위 38년) 봄 음력 2월 마한에 사신 호공(瓠公)을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하자, 마한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이는 그 무렵 신라의 정치 체제가 바로잡혀 마한에 매여있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원전 5년(즉위 53년)에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 말 2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나정의 혁거세 설화
남산의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를 지칭)에 궁궐을 짓고 신성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 아이가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였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여자 아이는 그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이름(나정)을 지었다.
두 성인이 나이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에 남자는 즉위하여 왕이 되었고
이어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하는데,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처음에 왕후가 계정(雞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雞林國) 이라고도 하였는데,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일설에 따르면,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당시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곧 나라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고 정하였다.
서라벌의(신라초기국명) 초대국왕인 혁거세의 아버지와 관련된 정확한 사료가 없다.
그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느나라 사람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혁거세의 어머니와 관련된 정확한 사료도 없다.
사망
혁거세는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그 혁거세의 나뉜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양 다리, 양 팔, 그리고 몸통과 얼굴을 따로 묻었다.
이렇게 혁거세의 무덤은 다섯 개가 되었고, 그래서 무덤들을 가리켜 오릉(五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남해왕(南解王)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신라시조 혁거세거서간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고,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또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다.
누이동생으로 아로(阿老)가 있다. 차차웅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왕은 남해왕뿐이며 『삼국유사』에는 거서간(居西干)과
동격의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巫)를 의미하는
신라방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남해왕 때는 정치장적 성격보다는 제사장적 기능이 농후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기 6년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우고, 8년 탈해가 어질다 하여 맏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으며, 또 대보(大輔)의 벼슬을 주어 나라의 일을 맡겼다. 14년
왜(倭)와 낙랑(樂浪)의 침입을 막았으며, 재위 21년에 죽으니 사릉원(蛇陵園)에 장사지냈다.
유리왕(儒理王)
유리 이사금(儒理 尼師今, ?~57년, 재위: 24년~57년) 또는 노례 이사금(弩禮 尼師今)은
신라의 제3대 국왕으로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雲帝) 부인이다.
박혁거세의 손자이며, 천일창의 동생이다. 왕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
혹은 허루왕(許婁王)의 딸 박씨라는 설이 있지만, 일지 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다. 다른 이름 으로는 노례(弩禮), 치리(治理), 치리(齒理), 치리적(治理赤)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노례, 박씨 족보에서는 치리 또는 치리 이다.
24년부터 5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24년부터 43년까지 친정하였고
43년부터 57년 붕어할 때까지 매제 석탈해(훗날 탈해 이사금)가 대보의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생애
즉위 이전
《삼국사기》는 왕호에 대해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기를: "이사금은 방언이니 잇금을 이른다.
이전에 남해가 바야흐로 죽으려 할 즈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너희 박 석 두 성씨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을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탈해는 38세였고, 유리의 나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둘은 지혜가 많은 자는 잇금이 많다고 하니, 그것으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는 탈해의 제안으로
시험해보니 유리의 이 자국이 더 많아 유리가 왕이 되고 왕호를 이사금이라 하였다.
즉위 이후
즉위 이듬해인 25년 친히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사면했으며, 28년(즉위 5년)에 홀아비,
과부, 고아, 늙고 병든 이들에 대한 구휼을 실시했다.
즉위 9년에 진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내렸는데, 이 무렵 신라의 진한에서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나타낸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위 17등급을 정리했는데,
삼국사기에는 17등급이 전부 이때 정해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리 이사금이 그 기틀을 다지고 후에 제도를 손봐 17등급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35년(즉위 13년) 음력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당하였다.
37년(즉위 14년)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낙량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낙랑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만년
40년(즉위 17년) 가을 음력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유리 이사금은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그리고, 42년(즉위 19년) 가을 음력 8월에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57년(즉위 34년) 가을 음력 9월에 유리 이사금은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유언 비슷한 말을하였다.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57년 겨울 음력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가계
* 모후 : 운제부인(雲帝夫人)
- 동생 : 박나로(朴奈老) -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의 동생, 혹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아버지
- 누이 : 아효부인(阿孝夫人 朴氏) -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신라의 4대 국왕)에게 출가
- 매제 :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신라의 4대 국왕
- 왕후 : 왕후 박씨(王后 朴氏) 일지 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허루 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또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나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 의혜왕후 박씨(宜慧王后 朴氏) : 일지 갈문왕(日知葛文王,혹은 허루왕 許婁王)의 딸
- 차남 :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 후궁 : 차비 은씨(次妃 殷氏) - 장남 : 일성 이사금(逸聖尼師今)
- 3남 : 박환(朴桓)
- 조카 : 박지인(朴智仁, 각간 역임)
- 장녀 : 박씨(朴氏) - 상장군 김명옥(金鳴玉)에게 출가
파사왕(婆娑王)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112년 10월, 재위: 80년~112년)은 신라의 제5대 국왕이다.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자 일성 이사금의 이복 동생 또는 이복 형이라 한다.
다른 이름은 검(檢) 또는 검(儉)이다.
생애
성은 박씨이며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 혹은 유리 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로 추정된다.
왕비는 허루갈문왕 (許婁葛文王)의 딸인 김씨 사성부인(史省夫人)인데 본래 유리왕의 맏아들 일성(逸聖)이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적자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총명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마침내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라 해,
파사와 일성 사이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 투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기 80년 8월에 탈해 이사금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치세기간
81년 봄 음력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이어서, 파사 이사금은 민생을 살피고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으로 군비를 가다듬는 등 체제정비에 나섰다.
즉 81년 음력 3월 주, 군을 돌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구휼하며 교수형 및 참수형이 아니면
모두 용서하였다. 82년 봄 음력 1월에 영(令)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는 텅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져 있다. 만약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있거나 변방에 변고가 있으면 무엇으로써 그것을 막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게 하고 병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
특히 군사들에 대한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가다듬었다는 것은 사로국의 수장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가
정비되어 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사로국의 힘은 경주 일대에 머물러 있었다.
84년 봄 음력 2월에 명성(明宣)을 이찬으로 삼고 윤량(允良)을 파진찬으로 삼았다.
신라의 17관등은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법흥왕에 의하여 완성되었으나 파사 이사금 시기에도
이찬이나 파진찬 등의 관직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름 음력 5월에 고타군주(古抒郡主)가 푸른 소[靑牛]를 바쳤다. 남신현(南新縣)에서 보리줄기가 가지를 쳤다.
크게 풍년이 들어 여행하는 사람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고타군은 지금의 안동지방을 일컫는데 이 지역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사 이사금 시기에 사로국에 편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타군에 있던 반(半)독자적인 권력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하는 진한연맹 속의 일원으로서, 맹주국인 사로국에 특이한 생산물이나
조장 등을 바치는 일종의 납을 바침으로써 사로국에 충성을 서약하거나 동맹관계를 지속시켜 나갔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남신현은 경주 남쪽의 어떤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타군의 군주가 바쳤다고 하는 청우는 크고 튼튼하게 잘 자란 소를 의미한다.
한편, 이 내용을 농업생산력이 곧 국력이던 당시에 우수한 종자를 배포함으로써
그것을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85년 정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였으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은 걸로 보아 곧 격퇴된 것으로 생각된다.
87년 음력 7월에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았다. 문헌 사료나 고고학 자료 등을 검토한 결과
마두성은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대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당시 거창궁은 가야의 영역으로 분류되어야 하므로, 가조면 일대에 성을 쌓았던 시기는
파사이사금 시기가 아니라 한참 후대의 일이라고 해석되거나, 파사 이사금 시기에 마두성을 쌓은 것이
틀림없다고 인정한다면, 마두성을 거창지역의 성이 아니라 경주 인근에 쌓았던 작은 성이라고 해석된다.
90년 음력 7월에 사자(使者) 10명을 나누어 파견하여 주주(州主)와 군주(郡主)를 감찰하여,
공무에 힘쓰지 않거나 밭과 들을 크게 황폐하게 한 자의 관직을 강등시키거나 파면하였다.
93년 정월에 윤량(允良)을 이찬으로 삼고 계기(啓其)를 파진찬으로 삼았다.
음력 2월에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사람을 몸소 위문하고 곡식을 내려 주었다.
94년 가야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였으나 아찬 길원(吉元)에게 기병 1천기를 보내 쫓게 하였다.
96년음력 9월 가야군군이 다시 습격해 왔으나 이때 왕이 5천기를 거느리고 친정, 대승을 거두었다.
97년 정월에 가야를 치러 하였으나 그 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용서하였다.
102년 음력 8월,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해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금관가야의 수로왕(首露王)에게 맡겼다. 수로가 판결을 내 땅을 음즙벌국에 귀속되게 하였다.
파사 이사금이 진한 6부에 명해 수로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게 하였는데,
모두 이찬을 보내 접대하게 했으나 한기부(漢祇部)만이 하급 관리를 보내 수로가 노하여 종을 시켜
한기부주 보제(保濟)를 죽이게 했다. 보제를 죽인 종 탐하리(耽下里)는 음즙벌의 왕 타추간(타鄒干)의 집에 숨었다.
파사 이사금이 노해 음즙벌국을 치니 타추간이 항복하고, 실직(悉直), 압독(押督)의 두 왕도 항복하였다.
104년 음력 7월 실직이 배반하여 토벌하고 그 무리를 남쪽으로 옮겼다. 105년 백제와 화친했고,
106년 음력 8월 마두성주에 명해 가야를 치게 하였다.
108년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쳐 병합했다. 112년 10월에 서거하였다.
가계
- 왕후 : 사성부인 김씨 (史省夫人 金氏) - 허루 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 아들 : 지마 이사금(祗摩泥師今, ? ~ 134년, 신라의 제6대 왕)
- 손녀 : 내려부인 박씨 -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 아들 : 지마 이사금(祗摩泥師今, ? ~ 134년, 신라의 제6대 왕)
- 후궁 : 석씨(昔氏)
- 딸 : 공주 박씨 - 참지정사 김허명(金虛明)에게 출가
- 이복 형 : 일성 이사금
자연재해
- 음력 7월에 우박이 내려 날아다니던 새가 죽었다.
- 음력 10월에 서울(경주)에 지진이 일어나 민가가 쓰러지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지마왕(祗摩王)
지마 이사금(祗摩 泥師今, ?~134년, 재위: 112년~134년)은 신라의 제6대 국왕이다.
성은 박(朴)으로서 파사왕(婆娑王)의 적자이며,
어머니는 사성부인(史省夫人), 왕후는 갈문왕(葛文王) 마제(摩帝)의 딸인 애례부인(愛禮夫人 金氏) 김씨이다.
치세
즉위 4년인 115년 음력 2월 가야(伽耶)가 남쪽 변경을 공격하자 음력 7월 가야 친정에 나서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는데, 가야인들의 복병에 걸려 패하고 간신히 퇴각하였다.
이듬해 음력 8월 다시 1만 병사를 거느리고 가야 정벌에 나서 공성전을 벌였으나 결국 다시 물러났다.
이후 지마이사금은 가야정벌을 포기했다.
즉위 10년인 121년 음력 4월 왜(倭)의 침입을 받았는데,
이때의 여파가 심했는지 이듬해 음력 4월 수도 주민들이 왜의 침입이 다시 있는 게 아닌가 소문이 퍼져,
이찬 익종 등에게 시켜 수습하였다. 이듬해인 123년 왜와 강화하였다.
즉위 14년인 125년 음력 1월과 음력 7월에 말갈의 침입을 받았다.
이에 지마이사금이 백제의 기루왕에게 원군을 청해 백제가 다섯 장수를 보내 격퇴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파사 이사금 26년 (105년) 화친한 이후 지마, 일성 이사금 2대동안 평화적이었다.
가계
단 아래의 가계 중 아들 이비와 손자 아도, 증손 박물품은 경주 박씨의 족보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가계에 의하면 지마왕은 일본에서 순절한 박제상에게 고조 할아버지가 된다.
- 부왕 :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 모후 : 사성부인 김씨(史省夫人 金氏)
- 왕후 : 애례부인 김씨(愛禮夫人 金氏) - 갈문왕(葛文王) 마제(摩帝)의 딸.
- 딸 : 내례부인(內禮夫人)- 신라 8대 왕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의 왕비.
아들 : 이비(伊非, 박혁거세 거서간(朴赫居世居西干)의 6세손)
- 손자 : 아도 갈문왕 (阿道葛文王)에 추봉
- 증손 : 박물품(朴勿品), 박제상(朴堤上)의 아버지
- 손녀 : 박씨
- 손녀사위 : 구도 갈문왕
- 외증손 : 미추 이사금
- 외증손 : 김말구
- 손자 : 아도 갈문왕 (阿道葛文王)에 추봉
- 왕후 : 애례부인 김씨(愛禮夫人 金氏) - 갈문왕(葛文王) 마제(摩帝)의 딸.
일성왕(逸聖王)
일성 이사금(逸聖泥師今, ? ~ 154년, 재위 134년~ 154년)은 신라의 제7대 국왕으로,
유리 이사금의 맏아들이라고도 하며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부인이다.
즉위 4년 137년과
즉위 6년인 139년에 말갈이 침입해 이듬해인
140년 장령에 목책을 세워 방비를 세웠다.
142년 말갈 공격 계획을 세웠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좌절되었다.
146년 음력 10월 압독이 반란해 군사를 내어 토벌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가계
- 이복 동생 :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 일설에는 그의 형이라고도 한다.
왕후 : 아례부인 박씨(阿禮夫人 朴氏). -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 아들 : 아달아 이사금(阿達羅泥師今)
- 딸 : 공주 박씨 - 사벌주 군주 석마복(昔摩福)에게 하가
- 딸 : 공주 박씨 - 파진찬 석탈대(昔脫大)에게 하가
- 왕후 : 정안왕후 허씨(正安王后 許氏)
- 후궁 : 석 혜비(昔 慧妃), 탈해 이사금의 딸
능묘
왕릉은 경주시 탑동 묘좌에 안장되었는데 일성왕릉은 1970년대에 사적 173호로 지정되었다.
후궁 석씨의 묘는 금서문 밖 자좌에 있다 한다.
아달라왕(阿達羅王)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 ~ 184년, 재위: 154년~184년)은, 신라의 제8대 국왕이며,
상대(上代)의 마지막 박씨 군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일성왕(逸聖王)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
왕후는 지마왕(祇摩王)의 딸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이다.
생애
3년(156년) 계림령(鷄立嶺)의 길을 열고, 4년(157년) 2월에는 감물현(甘勿縣)과 마산현(馬山縣)을 두었으며,
3월에 장령진(長嶺鎭)에 순행했다.
5년(158년) 계립령에 이어 죽령(竹嶺)의 길을 열었으며,
9년(162년) 사도성(沙道城)에 순행해 병사들을 위로했다. 이 해에 왜인들이 우호적인 목적으로 신라를 방문했다.
12년(165년) 10월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치자 왕은 백제에 길선의 신병을 요구했으나
백제는 거절했고, 이에 왕이 몸소 백제 원정을 나섰으나 공성전을 벌이던 중 식량이 떨어져 퇴각했다.
2년 뒤인 14년(167년) 7월 백제가 신라를 역습해 두 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잡아갔으며,
8월에는 일길찬(一吉湌) 흥선을 시켜 군사 2만으로 백제를 공격하고 왕은 8천 기(騎)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넜으며,
이에 백제는 노략한 주민들을 반환하고 강화를 청하였다고 한다(길선의 모반 사건은 신라 역사상 최초의 「반란」이었다).
17년(170년) 봄 2월에 시조묘(始祖廟)를 중수하였다. 10월에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공하였다.
19년(172년) 정월에 구도(仇道)를 파진찬(波珍湌),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구도는 훗날 김씨로서
최초의 신라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미추(味鄒)의 아버지이다.
20년(173년) 음력 5월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왔다.
이후 10년간 기록을 남기지 않다가 31년(184년) 봄 3월에 왕은 사망하였다.
사인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내해 이사금이 아달라왕 사후 12년 만에 왕위에 올른 것과
그의 생모가 내례부인이란 것을 감안할때, 이매가 아달라 이사금의 아내 내례부인 과 모종의 일이 있었고,
이에 아달라왕과 이매 의 아버지 벌휴 이사금 사이에 내분이 있었고,
결국 아달라 이사금은 패배하여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능묘
경주군 남쪽 15리 배일산(拜日山)의 세 왕릉 중 맨 위의 왕릉이 아달라 이사금의 능이고
가운데는 신덕왕릉, 맨 앞은 경명왕의 능이라 한다.
가계
《삼국사기》에는 일성왕과 지소례왕의 딸(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사후 후손이 없어 왕위가 석씨계의 벌휴(伐休)에게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하대 신라의 신덕왕(神德王)은 아달라왕의 원손(遠孫)을 자처하였다.
- 부왕 : 일성왕(逸聖王)
- 모후 박씨 :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 왕후 :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 - 지마 이사금(祗摩尼師今)의 딸
- 후궁 : 석씨(昔氏), 탈해 이사금의 딸, 일성 이사금의 후궁 혜비 석씨의 자매
- 아들 : 박벽방
- 딸 : 공주, 박씨
연오랑세오녀 전설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기이제1에는 아달라왕의 치세에 있었던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이름의 부부가 등장하는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부부로서 아달라왕 즉위 4년인 정유(157년)에 동해의 바닷가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닷가에 나가 해초를 따는데 연오랑이 서 있던 바위(물고기라고도)가 움직이더니
연오랑을 태운 채 그대로 일본으로 가버렸다. 일본 사람들은 연오랑을 보고 「이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라며 그들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기고 바닷가로 나가서
남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바위 위에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했고, 세오녀가 그 바위에 올라가자
바위는 다시 움직여서 세오녀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은 다시 놀라면서 연오랑에게 나아가 아뢰었고,
부부는 재회하여 세오녀는 왕인 연오랑과 함께 나란히 귀비(貴妃)가 되었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나고 없는 사이,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사라져 온통 암흑으로 뒤덮이는
괴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일관(日官)은 「우리 나라에 있던 해(연오랑)와 달(세오녀)의 정기가 지금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이다.」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아달라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아 데려오게 했지만,
연오랑은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이제 와서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나의 비가 짠 고운 명주가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 라면서
세오녀가 짠 비단을 사신에게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었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내자
과연 신라에는 해와 달이 예전처럼 돌아왔다.
이후 신라에서는 그 비단을 왕의 창고에 잘 간직해 국보로 삼았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 (都祈野)라 하였다고 한다.
신덕왕(神德王)
신덕왕(神德王, ? ~ 917년, 재위: 912년 ~ 917년)은 신라의 제53대 왕이다.
성은 박(朴), 이름은 경휘(景暉 또는 景徽)이다.
아버지는 선성대왕 박예겸(朴乂兼 또는 朴乂謙 혹은 朴銳謙)이고,
어머니는 정화부인(貞花夫人)이다. 그러나 다른 일설에 박예겸은 의부(義父, 혹은 양부)이고
친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박문원(朴文元)이라고도 한다.
생애
912년, 매제이자 이복 손아랫처남인 선왕 효공와 김요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효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후고구려의 궁예(弓裔), 후백제의 견훤(甄萱) 등의 세력에 침식당해 신라는
쇠퇴할 뿐이었다. 즉위한 해에 왕은 아들 박승영(朴昇英)을 태자로 세우고, 이찬 계강(繼康)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914년에 북쪽에서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에서 정개(政開) 원년으로 고쳤다.
《삼국유사》는 신덕왕 즉위 4년인 을해(915년)에 영묘사(靈廟寺)의 내행랑에 까치의 둥지가 34군데,
까마귀 둥지가 40군데나 되었으며, 3월에는 두 번이나 서리가 내렸고 6월에는 참포(斬浦)의 물과 바닷물이
사흘 동안이나 싸웠다고 전하고 있다.
5년(916년) 가을 8월에는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후백제와 태봉의 세력에 침식되는 신라의 불운 속에서 917년에 붕어하였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다.
능묘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왕의 사후 시신은 화장되었고 뼈는 잠현(箴峴)의 남쪽에 묻었다고 하였다.
경주시 남쪽 배동 배일산(拜日山)의 배리(拜里) 3릉 중 규모가 가장 큰 원형봉토분이 신덕왕의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고분은 산록에 위치하고 있고 내부 구조는 천정이 높은 횡혈식 석실분인 점,
그리고 분구의 규모와 호석(護石)의 축석 상태가 통일 전후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신덕왕릉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가계
《삼국사기》에는 신덕왕의 아버지는 정강왕(定康王) 대에 대아찬(大阿飡)을 지냈던 예겸(乂兼)이고
(《삼국유사》는 부원父元),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며(《삼국유사》는 진화부인眞花夫人),
비 김씨는 헌강왕(憲康王)의 딸이라고 기록하였다.
아달라왕의 원손이라는 혈연이 친가쪽인지, 외가쪽인지는 《삼국사기》 본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의 기록이 서로 다른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신덕왕의 계보에 대해서 모계쪽 계보부터 수록하여,
어머니 진화부인(眞花夫人)의 아버지는 순홍(順弘) 각간(角干)으로 뒤에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는 원홍(元弘) 각간이라고 기록하고서 원홍 각간의 기록 뒤에 아달라왕의 원손이라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에 신덕왕의 아버지라고 기록된 예겸에 대해서도 《삼국유사》는 의부로 기록되어 있고,
친아버지는 문원(文元) 이간(伊干)으로서 후에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문관(文官) 해간(海干)이었다.
아들이 없었다는 아달라왕의 《원손》을 자칭한 것에 대해서는 신덕왕이 아달라왕과 모계로 이어진
자손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서 신덕왕의 성씨를 박씨라고 한 점에 대해
신덕왕의 누이가 효공왕의 비가 된 것을 계기로 김씨에서 박씨로 성을 바꾸었다는 견해가 있다[.
- 아버지(생부) : 박문원(朴文元) 각간 -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
- 아버지(양부) : 박예겸(朴乂兼 또는 朴銳謙) - 정강왕 때 대아찬을 지냈고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
- 외증조할아버지 : 박원홍 각간 - 아달라왕의 원손
- 외할아버지 : 박순홍 각간 - 추봉 성호대왕
- 어머니 : 정화부인
왕후 : 헌강왕의 딸로 책호는 의성왕후(義成王后).
- 아들 : 경명왕 박승영(朴昇英)
- 아들 : 경애왕 박위응(朴魏膺)
- 매제이자 이복 손아랫처남 : 효공왕 김요(孝恭王 金嶢)
경명왕(景明王)
경명왕(景明王, ? ~ 924년, 재위: 917년 ~ 924년)은 신라의 제54대 왕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승영(昇英)이다.
신덕왕(神德王)과 의성왕후(義成王后)의 첫째아들이며 경애왕(景哀王)의 형이다. 왕비는 장사택(長沙宅)이며,
각간 대존(大尊)의 딸이다.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은 왕경(王京)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弓裔)와 경훤(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王建)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피살되었다. 그 뒤 왕건과 경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지역에서 이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네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화기사의 이면을 생각해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7년 만에 죽으니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이곳에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경주군 남쪽 배동 배일산(拜日山)의 세 왕릉 중 맨 위의 왕릉이 아달라 이사금의 능이고
가운데는 신덕왕릉, 맨 앞은 경명왕의 능이라 한다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위응(魏膺). 아버지는 신덕왕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 (義成王后 또는 資成·懿成·孝資王后)이다.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다.
일설에는 예겸이 신덕왕의 의부(義父)라 하여,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文元)이며, 할머니는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봉된 순홍(順弘)의 딸
정화부인(貞花夫人)이라고도 한다.
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王建)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康州 : 지금의 晉州)의 왕봉규(王逢規)가 관할하는 돌산(突山)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甄萱)은 잠시 싸움을 그치고 강화하였는데,
견훤이 보낸 질자(質子)인 진호(眞虎)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다시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
927년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궁궐을 노략질하면서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갔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百座經說)을 설치하고 선승(禪僧)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