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10명의 충무공(忠武公)

도화골 2017. 1. 27. 22:38
10名의 忠武公
1. 박병묵 (朴炳默)
2. 조영무 (趙英茂)
3. 남 이 (南怡)
4. 구성군 이 준
5. 이순신 (李舜臣)
6. 김시민 (金時敏)
7. 이수일 (李守一)
8. 정충신 (鄭忠信)
9. 구인후 (具仁候)
10. 김응하 (金應河)
 
1.박병묵(朴炳默)
관향조 박병묵(시호는 충무)은 고려때에 평장사를 지냈으나며 그의 선조는 나주에 토착(土着)해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밀성박씨 계통으로 44세 취생(就生)으로 통정공(通政公)이다?). 박병묵은 나주에 오래동안 살아온 선비집안이다. 관향조 병묵의 아들 덕영(德瑛)은 호군(護軍)으로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나주(羅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
대표적 인물: 숙(璹)이  조선이 개국(開國)된 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고 판관(判官)을 지낸 한성(漢成)과 무신(武臣)으로 유명했던 덕명(德命)이 뛰어났으며, 장사랑(將仕郞)에 오른 순영(淳英)은 의관(議官)을 역임한 순택(淳澤)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지명 유래: 나주(羅州)는  전라남도(全羅南道)  중서부(中西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으며,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이 곳을 본거지로 삼았고, 후에 고려(高麗) 태조(太曹) 왕 건(王 建)이 점령하여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1018년(현종 9) 목(牧)으로 승격되었고,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는 진(鎭)을 두고 2군과 8현을 관할하였으며 1894년 갑오경장 때 전국을 23부(府)로 구분하면서 나주부가 되었으나 다음해 군(郡)으로 강등되었다.  1927년 영산명이 영산포읍(榮山浦邑)으로 승격하고 1931년에는 나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1년 7월 1일에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합쳐서 금성시(錦城市)로 승격하였다.

2.조영무
[ 趙英茂 ]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무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전중시판사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한산군에 봉해졌다. 병권을 장악해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기도 했다.
출생-사망 ? ~ 1414
시호 : 충무(忠武)

시호 충무(忠武)이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으로 조영규(趙英珪) 등과 정몽주(鄭夢周)를 개성 선죽교에서 격살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전중시판사(殿中寺判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1394년(태조 3) 중추원상의사(中樞院商議事),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그후 문하부참찬사(門下府參贊事)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하여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삼군부참판사(三軍府參判事) 때,  왕명으로 사병(私兵)의 혁파(革罷)가 실시되자 이를 반대하여, 황주(黃州)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府尹)으로 나갔다. 1405년 우정승(右政丞),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이듬해 훈련관도제조(訓練觀都提調)를 거쳐 삼군부영사(三軍府領事)가 되었다.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죽은 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3.남이
[ 南怡 ] 
조선 세조 때의 무신. 이시애의 난과 건주여진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세조가 죽은 후 역모에 몰려 처형되었다.
남이장군묘

남이장군묘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경기기념물 제13호

출생-사망
1441 ~ 1468
본관 의령(宜寧)
시호 충무(忠武)
활동분야 군사
시대 조선
본관은 의령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南在)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남빈(南份),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 洪氏)이다. 아버지인 남빈은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太宗)의 딸  정선공주(貞善公主)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조선의 제7대 왕인 세조(世祖)에게 남이(南怡)는 고종사촌의 아들인 셈이다.

남이는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세조 때에 좌의정을 지낸 권람(權擥)의 딸과 결혼하여 남구을금(南求乙金)이라는 딸을 낳았으나 일찍 사별했고, 고성 이씨(固城 李氏)와 다시 혼인했다. 그러나 고부 간에 갈등이 심하여 1468년(세조 14) 왕에게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 받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남이와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등 젊은 종친(宗親)들을 중용하여 원로대신들을 견제하려 했다. 남이는 세조가 1460년(세조 6)에 무인들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경진무거(庚辰武擧)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466년(세조 12)에 실시된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 13) 김용달(金用達)과 함께 포천(抱川), 영평(永平) 일대 도적떼의 토벌을 지휘했고, 그해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준이 도총사(都摠使)가 되어 이끈 토벌군에 군관으로 참여했다.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북청(北靑)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그 일로 행 부호군(行 副護軍)이 되었으며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행 호군(行 護軍)이 되어 종성(鍾城)에 주둔하며 온성(穩城), 경원(慶原), 경흥(慶興)  등의 고을을 다스렸으며, 군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포상되었다.

1467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 同知事)가 되었다. 이어 명의 요동군(遼東軍)이 남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건주여진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해오자 강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윤필상(尹弼商)이 이끄는 북벌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음력 12월 27세의 나이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겸사복장의 지위를 겸하였다.

1468년(세조 14) 음력 5월에 서현정(序賢亭)에서 열린 연회에서 술에 취해 세조에게 이준만을 편애한다고 실언하였다가 의금부의 감옥에 갇혔다가 다음날 풀려났으며 겸사복장의 지위에서 파직되었다. 그해 7월 세조가 이준을 20대의 나이에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남이도 공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지위를 겸하게 했으며  8월에는  병조판서로 삼았지만 한계희(韓繼禧) 등  대신들의  반대로 9월에 병조판서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겸사복장이 되었으며, 조부와 마찬가지로 의산군(宜山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1468년(예종 1) 10월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의 고변으로 역모의 혐의를 받았고,   그해 음력 10월 27일에 강순,  변영수(卞永壽),  변자의(卞自義), 문효량(文孝良)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다음날 거열형으로 처형되었으며, 딸은 한명회(韓明澮)의 노비가 되었으나 이듬해 외조부인 권람의 공이 참작되어 사면되었다. 이 사건을 ‘남이의 옥(獄)’이라고 한다.
남이는 1818년(순조 18) 음력 3월 10일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청에 따라 강순과 함께 사면되어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910년(순종 3)에는 '충무'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남이의 묘소로  전해지는  남이장군묘가 있고,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의 남이섬에도 그의 가묘와 추모비가 있다.

 

4.이준
[ 李浚 ] 
자 자청(子淸), 시호 충무(忠武)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441년(세종 23) ~ 1479년(성종 10)
본관 전주(全州)
관련사건 이시애의 난
대표관직(경력)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 오위도총부도총관, 영의정
1441(세종 23)∼1479(성종 10). 조선 전기의 종실.
내용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청(子淸). 아버지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 구(臨瀛大君璆)이다. 1458년(세조 4)에 구성정(龜城正)에 봉해지고 이어 구성윤(龜城尹)으로 봉해졌다.  1463년에 구성군으로 봉하여졌으며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전했기 때문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나이 27세에 함경·강원·평안·황해의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에 임명되어 이를 토평한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훈봉되고,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어  일품종실(一品宗室)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5월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훈봉되었다. 이듬해에 아버지 임영대군의 상을 당하여 영의정직을 내어놓았다.
1470년(성종 1) 정월 나이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鄭麟趾) 등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하고 경상도 영해(寧海)로 귀양갔으나,  왕족이었으므로 가산을 적몰당하지는 않았으며 나라에서 곡식을 지급하였다.  귀양간 지 10년 만에 배소에서 죽었다.
성종은 미두(米豆) 10석, 종이 40권을 하사하고 장례를  영해 현지에서 정중히 치르도록 하였다. 1687년(숙종 13) 6월 김수항(金壽恒)이 구성군이 죄를 입은 것은 권맹희(權孟禧) 등의 난언(亂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신원되고 다시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5.이순신
[ 李舜臣 ]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 옥포대첩,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했다.
출생-사망 1545 ~ 1598
본관 덕수(德水)
여해(汝諧)
시호 충무(忠武)
국적 조선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서울 건천동(現 인현동)
주요저서 《난중일기》
주요업적
임진왜란에서 왜적을 물리침
시대 조선시대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밑에서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였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亂中日記)》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 충렬사 팔사품(통영 충렬사 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6.김시민
[ 金時敏 ] 
요약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3800명의 병력으로 2만여의 왜적을 격퇴하고 전사하였다.
김시민장군 동상경남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장군 김시민의 동상.
출생-사망 1554 ~ 1592
본관 안동
면오
시호 충무 ·상락군 ·상락부원군
국적 조선
활동분야 군사
출생지 목천(현 천안시 병천면)
주요업적 진주대첩
시대
조선시대(선조)
1554년(명종 9)년 충청도 목천현(木川, 現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지평(持平)을 지낸 김충갑(金忠甲)이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운 무관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이다. 어려서부터 무사적 기질이 강하였고 활도 잘 쏘았다. 무과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시절 가족의 반대에도 25세 때(1578)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判官)을 제수받았다. 1583년 여진 출신 니탕개(尼湯介)가 두만강을 넘어 쳐들어 오자 황해도 순찰사 정언신의 지휘하에서 신립, 이순신 등과 함께 공을 세웠고, 군기시(軍器侍) 판관으로 재임하다  병기 및 군사훈련에 관하여 토론하다 건의사항이 채택되지 않자 병조판서와 갈등을 빚고 사직하였다. 그 후 다시 훈련원 군기시(軍器侍) 판관으로 복관되었다.
<임진왜란 때 관군과 의병의 활동>

당파와 이해관계를  갖지 않아 정치적으로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1591년(선조 24) 진주통판(晋州通判)으로 천거되었고  진주성을 지켰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1592) 방비태세를 갖추도록 조치했고 5월 진주목사 이경(李璥)이 달아나자 임시 진주목사로 임명되었다. 6~7월에는 사천, 고성, 진해에  주둔하는  왜군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그 공로로 진주목사(晋州牧使)가 되었다(8월). 9월에는 적장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10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를 제수받았다.   10월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당시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그는 3,8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가 이끄는 2만의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 전쟁 중에 염초(焰硝) 및 총통(銃筒) 등을 제조하여 활용하였다. 의병장 곽재우 최경회 등이 적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도움을 받아 전투가 진행되었으나, 장군이 진주성 안에서의 전체적인 지위를 이끌었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맞아 적의 세력을 진압한 후,  성안을 순회하던 중 쓰러진 적군이 쏜 탄환을 이마에 맞아 부상을 당해 치료를 하였으나, 10월 18일 3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1592).   

그가 사망하기  전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망한 다음이었다. 1604년(선조 37) 선무(宣武)공신  2등에 올랐고(1604), 1709(숙종 35)에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으로 추봉되고 영의정이 추증(追贈)되었다.  진주성(晋州城)에 사당을 짓고 창열사(彰烈祠)의 사액을 내려(1607, 선조 40) 김시민을 중심으로 전몰자 제신을 배향(配享)토록 하였다. 충무(忠武)의 시호가 내려졌다(1711). 최근에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그의 선무공신첩을 국민의 성의를 모아 다시 사서 국내로 들여와 보관하고 있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경남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석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 출신. 방경(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軍器寺)에 입사하였다.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 : 자연 재해로 입은 피해를 구제함)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키기 위해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이 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해 적을 격파하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해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김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 방식을 모방해 염초(焰硝) 500여 근과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해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했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안에 명령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시켜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등 적과의 싸움에 대처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탄환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해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져 며칠 뒤에 죽었다. 죽은 뒤 성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했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7.이수일
[ 李守一 ] 
이수일 진무공신록권 및 영정 / 영정조선중기 무신 이수일 (1554-1632)의 영정. 비단에 채색. 99㎝x184㎝. 단령과 사모관대를 정장한 뒤 교의자에 앉은 반우향의 전신교의좌상이다. 충주시 향토자료전시관 소장.
이칭별칭
자 계순(季純), 호 은암(隱庵), 시호 충무(忠武)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554년(명종 9) ~ 1632년(인조 10)
성격 무신
출신지 충주
본관 경주(慶州)
관련사건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괄의 난
대표관직(경력)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지중추부사, 형조판서
정의

1554(명종 9)∼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충주 출신. 주부(主簿)  오(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자침(自琛)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난(鸞)이며, 어머니는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아들은 우의정 완(浣)이다.

 

내용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86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이 되었다가 남병사 신각(申恪)의 막하로 들어갔다. 1590년 선전관이 되고,  다음 해 장기현감으로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으나 예천·용궁에서 패전하였다.   다음 해 밀양부사로 승진, 이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고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 뒤 회령부사에 이어 1597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요청으로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杖刑)을 받고 종군하였다.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곧 북도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했으며,  다음 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창원에 있는 병영을 진주로 옮기도록 하였다.   1606년 길주목사로 방어사를 겸하고, 다음 해 수원부사에 이어 다시 북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지중추부사로 지훈련포도대장·원유제조(園囿提調)를 겸하였다.
1612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14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616년 숭정대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8.정충신
[ 鄭忠信 ] 
요약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종군했고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했다. 이괄의 난 때 황주,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겼고 정묘호란 때 부원수가 되고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해 유배되었다.
출생-사망
1576 ~ 1636
본관 금성
가행
만운
시호 충무
국적 조선
활동분야 군사, 정치
출생지
전라도 광주
주요저서
《백사북천일록》 《만운집》
주요업적
여진족(후금)과 화의, 이괄의 난 진압
시대
조선시대(선조, 광해군, 인조)

1576년 전라도 광주에서 부친 정륜과 모친 영천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본관 금성(錦城), 자 가행(可行), 호 만운(晩雲), 시호 충무(忠武)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에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민첩하고 영리하여 권율의 신임을 받았으며 적지를 정찰하고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권율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의주(義州)에 갔다가 이항복(李恒福)의 주선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면서  무관의 길을 걷게되었다. 정충신은 이항복의 집에 머물면서 학업을 익혔고 그해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02년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608년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고 1618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스승인 이항복이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동행했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출병하였으나 후금에 대패하는 일이 일어나자 여진족의 정황에 밝았던 그가 다시 등용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을 수비를 정비하였고, 후금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고 조선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였다. 이후 안주목사 겸 방어사가 되었을 때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으나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듬해 절친했던 이괄 장군이 난이 일으키자, 한때 의심을 받기도 하였지만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나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다. 황주(黃州)와 서울 안현(鞍峴)에서 싸워 이겨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지고,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가 되었다.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 요양하였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원수(副元帥)에 임명되었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하여 청나라와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당진(唐津)에 유배되고, 후에 장연(長淵)에 이배(移配)된 뒤 풀려났다. 이듬해 포도대장(捕盜大將)·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3월 그가  우려한 것과 같이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주전론(主戰論)이 득세하여 청과  단교하는 사신을 보냈고 후일 병자호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병세가 나빠지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636년 5월 사망하였다.

천문(天文)·지리·복서(卜筮)·의술(醫術) 등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광주(光州)의 경렬사(景烈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만운집》, 저서에 스승 이항복의 유배일지를 기록한《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금남집(錦南集)》 등이 있다.

 

9.구인후
[ 具仁垕 ] 
구인후1578(선조 11)-1658(효종 9). 조선 중기의 무신. 글씨는 ≪명가필보≫에 있다.
이칭별칭
자 중재(仲載), 호 유포(柳浦), 시호 충무(忠武)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578년(선조 11) ~ 1658년(효종 9)
성격 무신
본관 능성(綾城,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
대표관직(경력)

우의정

 

정의

1578(선조 11)∼1658(효종 9). 조선 중기의 무신.

 

개설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증조는 능성군(綾城君) 순(淳), 할아버지는 좌찬성 사맹(思孟), 아버지는 대사성 성(宬), 어머니는 별좌 정억령(鄭億齡)의 딸이다. 뒤에 홍(宖)에게 입양되었다. 인조의 외종형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해, 1606년 선전관이 되고, 고원군수·갑산부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정치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중 1620년(광해군 12) 이서(李曙)·신경진(申景?)의 반정 모의에 참여했다.

1621년 진도군수가 되었고, 1623년(인조 1)의 반정에는 미처 서울에 도달하지 못해 참여하지 못했으나, 처음부터 계획을 세운 공로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반정 뒤 통제사·한성부윤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때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었다. 전라병사·포도대장을 거쳐 충청병사·수원방어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군사 3,000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국왕을 호위했으며, 그 공으로 어영대장이 되었다.
전후로 도총부도총관·비변사제조·판의금부사 등을 겸임했으며, 1644년에는 심기원(沈器遠)의 모역 사건을 적발, 처리한 공으로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인조 말년에는 수 차례의 병조판서를 비롯해, 형조·공조의 판서와 수원부사·훈련대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1652년(효종 3) 판의금부사·홍청도병마절도사(洪淸道兵馬節度使)가 되고,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65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처형당한 강씨(姜氏)의 신원을 요구하다 죄를 입은 김홍욱(金弘郁)을 옹호하다가 삭직당했으나 곧 복관되고 좌의정에 올랐다.
공신인 동시에 인조의 외척으로서, 당시 공신들간의 대립이나 공신들과 일반  사류들 사이의 대립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별다른 기복 없이 정치적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0.김응하
[ 金應河 ] 
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비
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비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무신 김응하 사당 문앞에 있는 묘정비. 높이 3.89m.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5호.
이칭별칭
자 경의(景義), 시호 충무(忠武)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580년(선조 13) ~ 1619년(광해군 11)
성격 무신
출신지 철원(鐵原)
본관 안동(安東)
관련사건 후금정벌
대표관직(경력) 북우후
정의
1580(선조 13)∼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무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희(景羲). 철원 출신.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 승지 지사(地四)이다.

 

내용
1604년(선조 37) 무과에 발탁되었으나 처음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평소부터 그의 무장적인 재능을 아끼던 박승종(朴承宗)이 병조판서가 되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여러 사람의 질시를 받아 파직당하였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박승종이 전라관찰사로 나가자 다시 기용되어 비장(裨將 : 지방사신을 따라다니던 관원)이 되었다.
1610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삼수군수(三守郡守)·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000명의 휘하군사로 수만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가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처자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다. 조정에서도 그의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역사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구대 암각화  (0) 2017.01.30
조선시대 품계  (0) 2017.01.27
신라태조 성한왕  (0) 2017.01.27
5가야(삼국유사)  (0) 2017.01.26
신라왕조(박씨) 가계도  (0) 2017.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