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寧陵). 조선 최초의 동원 상하연봉으로 효종대왕(위)과
인선왕후(아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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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용맥에 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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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7대 임금 효종대왕은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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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이르기를 마음을 같이하는 신하가 한 둘만 있어도 도움이 된다 했거늘 지금은 너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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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이익만을 꾀하고 있구나.
나와 함께 일할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갈 길은 먼데 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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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고 유숙할 곳마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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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몰찬 혁명군주 인조의 뒤를 이어 31세로 등극한 효종(1619~1659)은
집념이 강하면서도 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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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제왕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극진히 다스리고 할
일을 삼가면서 대신들이 동행해 주길 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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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만 조정은 사분오열돼 왕명도 통하지 않았다. 효종의 행장이 담긴 영릉지(寧陵誌)의 이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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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사소한
정쟁에 목숨 걸고 한 치 양보 없는 신하들의 이념 대결에 임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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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가 깊어지고 회한이 쌓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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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억류 8년 두 왕자 운명
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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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극(崇極·임금)의 자리에 오르려면
극적인 기사회생이야 다반사겠지만 효종처럼 형극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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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면 누가 극위(極位·용상)에 오를까 싶다. 효종의 41년 생애는 숨가빴다. 8세 때 봉림(鳳林)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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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봉해진 뒤 12세에 인선(仁宣)왕후 덕수 장씨와 가례를 올렸다. 17세 때는 모대비 인렬왕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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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서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자칫 건강을 잃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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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에 병자호란이 발발하며 강화로 피란 갔으나 청군에게 조정군이 패하고 말았다. 부왕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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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소현세자와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군신예의 치욕을 당하고 형과 함께 볼모로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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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니 19세였다. 청나라 수도 심양에 억류된 8년 동안 두 형제의 운명이 갈렸다. 조선의 차기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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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될 소현세자는 청국 생활에 잘 적응하며 당시 그곳에서 성행하던
서양문물을 두루 섭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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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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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생 봉림대군은 달랐다. 일국의 왕자 신분으로 적국 포로가 된 신세를 통탄하며
국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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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자조(自嘲)했다. 청국군의 동향과
신흥왕조 내부사정을 비망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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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 인조한테 상소하고 명·청 간 국경 갈등도 수시로 보고했다. 청이 소현세자를 전지에
내보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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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자신이 가겠다고 의연히 나서 이를 중지시킨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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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청국에선 친명파 인조를 제거한
뒤 청에 호의적인 광해군을 유배에서 풀어 복위시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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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를 획책했다. 소현세자를
조선 임금으로 예우하며 외교·내치 문제까지 협의해 부자간을 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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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켰다. 청에 절치부심하며
와신상담하고 있던 인조와 조선 조정에서 이를 모를 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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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대신들 간에는 세자가 청국에서 임금 노릇한다는 괴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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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大抵) 청천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고 권력의 속성은 부부지간은 물론 부모형제 사이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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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 수 없는 법이다. 볼모에서 풀려 먼저 돌아온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의문의 급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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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죽었는데도 조정은 평온했고,
그 후 인조는 며느리를 사사시키고 손자들마저 귀양가 독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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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도록 방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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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급서하자 청국에 있던 봉림대군이 곧바로 귀국해 세자로 책봉됐다. 봉림대군은
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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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부덕한 소자가
저위(儲位·세자)에 오를 수 없다 ”고 울면서 사양했지만 “ 봉림에게 성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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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망이 있다”면서 동궁에 거처토록 했다.
왕실 법도대로라면 생존한 소현세자 삼남이 오를 자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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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인조는 안중에도 없었다.
인조 27년(1649) 5월 8일,
고질병 한습(寒濕)으로 17년을 고통받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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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이 예척(禮陟·왕의 죽음)하자 세자
봉림대군이 대통을 이으니 제17대 효종대왕이다. 열혈 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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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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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섬멸' 위해 친명파 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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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 원수를 갚고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요지부동의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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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치는 북벌(北伐) 계획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상국관계로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내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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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명의 패망 세력과 제휴해 청을 섬멸한다는 야심찬 정책이었다. 볼모로 억류돼 있는 동안 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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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조직과 지휘체계를 파악한 정보도 효종에게는 남다른 자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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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친청파 척신으로 조정을 농단하던 김자점(인조반정 공신)을 파직하고 친명파 송시열·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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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 등을 중용했다. 어영청(御營廳)에 북벌 선봉부대를 두고 주력군과 기마병은 조총과 화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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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시킨다는 구체적 비책까지 수립했다. 전쟁은 병력과 무기만으로 이기는
게 아니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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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있어야 승리하는 법이다.
네덜란드에서 표류해 온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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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확충과 군사훈련을 강화하다 보니 국고가 바닥났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부역과 조세
부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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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처럼 불어나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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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삼군 중 최정예군으로 선발된 어영청의 기강은 가관이었다. 양반집 자제가 고위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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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한 뒤 주색잡기에 허송세월하며 훈련이나 고된 부역은 종들이 대신토록 했다. 하는 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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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만 축(縮)내며 세월을 보내는 걸 어영부영(御營不營)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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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의 3만 병력 양성계획이 겨우 5600여
명에 그치고, 청의 국세가
일취월장으로 막강해져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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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힌 북벌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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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행어사 밀파 한 달 만에 돌연 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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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극약처방으로 암행어사를 밀파해 전국 양반 자제들 중 군역 기피자를 색출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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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효종은 보수· 기득 권력층의 극력 반대를 무릅쓰고 이 어명을 내린 지 한 달
만에 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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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서하고 말았다. 임금이 된 지 10년으로 보령 41세였다. 당시 백성들은 “당저(금상)까지 독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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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권세 대신들을 원망했지만 역사는 ‘독살음모설’로 얼버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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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김육 등의 소청을 받아들여 상평통보를 주조한 뒤 화폐로 유통시키고, 대동법을 통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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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정책의 군비증강으로 늘어난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경감했다. 태음력과 태양력 원리를 응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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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기를
활용하는 시헌력을 채택해 농사편의를 도모했다. 효종의 가장 큰 치적은 비록 실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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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긴 했지만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비축된 군사력의 증강이다. 청의 군제가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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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서 조선군(軍)의 체계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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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고난에 찬 효종의 일생은 죽어서도 순탄치 못하고 변고를 겪는다. 대신들 간 권력암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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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으로 풍수논쟁에 휘말리는 것이다.
효종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당시 왕릉풍수의 대가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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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에게 택지토록 했다. 고산이 경기도 화성지역(현
융·건릉)을 소점(所點)하자 서인세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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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세가를 이뤄 살던 권문대신들이 들고 일어났다. 왕릉으로 택정되면 인근 사가와 일반 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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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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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암 송시열의 주장대로 건원릉 내 서쪽 용맥에 예장하고 영릉(寧陵)이라 능호를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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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조대왕과 계비 정순왕후가 안장된 원릉 자리다. 효종이 예척한 지 15년 후 영릉의 병풍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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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이 생겼다. 남인들은
비가 오면 유수(幽隧·무덤 속)에 물이
스민다고 서인들을 몰아쳤다. 고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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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이었고 우암은 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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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로 영릉을 천장하며 서인의 50년 장기집권은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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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이곳에는 성군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이 있어 더없는 명당자리다. 영·녕릉으로도 불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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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95호다. 효종의 영릉은 인선왕후 장씨(1618~1674)와 함께 동원 상하연봉으로 자좌오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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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향이다. 혈장(穴場)이 아래위로 있을 때 쓰는 풍수의 장법이다.
2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8대>현종대왕과 숭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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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 허망한
15년 설상가상 가뭄·홍수는 꼬리물어 / 2010.08.20
쌍릉으로 예장된 현종대왕과 명성왕후의 숭릉. 동구릉 안 서쪽에 자리하며 능상에서 정자각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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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조선의 유일한 왕릉이다.
숭릉의
산신석. 임금이 신보다 높은 상격이어서 왕릉의 산신석은 능침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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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한평생을 살면서 까닭 없이 고단한 팔자가 있다. 조선의 제18대 임금 현종 대왕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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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일생이라면 왕이라 한들 선뜻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세상의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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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어명 한 마디면 산천초목이 벌벌 떨 것 같은 군왕 자리, 현종(顯宗)에겐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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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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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1641~1674)은 출생 배경부터 슬프다. 아버지 봉림대군이 청에 볼모로 잡혀 가 심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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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류돼 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국적이 청나라인 조선의 유일한 임금이다. 어휘(御諱·왕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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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연(
)으로 탄생 당시만 해도 연이 조선의 군왕 자리에 오르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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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이었다. 세자로 책봉된 소현세자(큰아버지)와 그의 세 아들(사촌)이 있었고, 봉림대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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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할아버지)의 둘째 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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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손자였던 연이 성장과정을 통해 겪은 청나라에서의 고초는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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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만주족)의 누비옷으로 혹한을 이겨내고 어머니(인선왕후) 품에 안겨 아버지(효종 대왕)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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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전투 현장을 누비기도 했다.
오늘은 북간도 벌판을, 내일은 몽골 사막을 가르는 야생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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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를 바 없는 유년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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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자신 몰라보는 손자 붙들고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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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 조선으로 귀국해 인조를 처음 알현한 건 네 살 때다. 봉림대군이 북경으로 들어가며
외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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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먼저 귀국시킨 것이다. 인조는 할아버지를 몰라보는 손자 연을 가슴에
품고 용상이 젖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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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루했다. 자신은 청에 굴복해 고두배를 하고, 세자는
청에 잡혀 가 청국 사람이 다 돼 돌아온 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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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까지 적국에서 태어나게 하다니…….. 인조는 조손(祖孫) 3대의 기막힌 운명에 한없이 오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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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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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귀국한 소현세자가 청의
구습을 탈피하지 못하고 천주학에 빠져 전파 기미까지 보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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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절망했다. 어전에서
감히 서구문명을 운위하며 설득하려 들자 벼루를 면상에 내리쳐 자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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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때로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운으로 연결되는 비정한 세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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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간의 이 불화가 종래는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급사로 이어졌고 뜻밖에도
금상 자리는 봉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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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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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등극하자마자 청국한테 원수를 갚겠다며 친청파를 모조리 숙청하고 친명파로 조정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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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짰다. 이 또한 부왕 인조에 이어 아시아 정세를 잘못 읽은 대 이은 오판이었다. 이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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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북벌정책은 재위 10년 내내 변함없는 외골수 화두였다. 사람의 오기가 지나치고 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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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어리지면 그것이 곧 병이다. 효종은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외아들 연에게 대통을 넘겨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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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9세(인조 27년·1649) 때 세손으로 책봉되고 10년 만인 효종 10년(1659) 용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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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니 제18대 현종 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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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과학문명 시대를 사는 현대에도 가뭄과 수해는 누구도 통제 못하는 하늘의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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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의 치세
15년은 흉년·재앙·가뭄·홍수·역질·기근
등으로 백성 모두가 이 땅에 태어난 걸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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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시기다. 봄 가뭄에 싹조차 못 틔운 곡식이 때 아닌 가을 물난리를 만나 전답마저 쑥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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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기가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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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조정
대신들은 국상 때마다 입어야 하는 자의대비(장렬왕후·인조 계비)의 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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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을 두고 목숨 건 정쟁을 일삼았다. 민생은 알 바가 아니었다. 현종이 금상으로 있는 15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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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칠 날이 없었던
예송논쟁의 골자를 알고 나면 허망하기까지 하다. 15세 어린 나이에 44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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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를 만난 자의대비가 인조와 사별하고 오래 살면서 파생된 불상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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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 굶어 죽어도 당파싸움은 더 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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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급서하자 자의대비는 주자가례에 따른 장남 예우로 3년 복상을 치렀다. 문제는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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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훙서 때였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서인(송시열·송준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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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인(허목·윤휴) 세력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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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용상에 올랐으므로 3년 상이 마땅하다고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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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현종이 서인 측 상소를 받아들이자 남인 측은 파직되고 유배지로 쫓겨 갔다. 앙갚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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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며 권토중래를 노리던 남인들에게도 기회가 왔다. 현종
15년(1674) 자의대비 며느리이자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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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한 것이다. 이른바 제2차
예송싸움이다. 서인 측은 인선왕후가 둘째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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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므로 자의대비 복상 기간이 9개월(대공설)이어야 한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남인 측은 왕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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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었으므로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버텼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정 권력 판도에 변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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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겼다. 서인 세력이었던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가 남인 측에 가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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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현종이 남인 상소를 수용하자 이번에는 서인들이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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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성 어진 현종 당쟁때마다 괴로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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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이
어질고 우유부단했던 현종은 이토록 극심한 당쟁에 휘말릴 때마다 심히 괴로워했다.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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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의 지방 관리들은 기근으로 아사한 천민들을 매장하느라 업무조차 마비될 지경이었다. 현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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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한테 각혈할 것 같은 심정으로 옥음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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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굶어 죽어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슬프고 딱하여 밥이 넘어가질 않소. 차라리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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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조금이나마 민생의 곤췌(困 )에 보답하고 싶소이다. 양민들
곤궁을 생각하면 살고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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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호도 없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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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대궐 안은 몸 둘 바 모르는 대신들의 통곡소리가 진동했으나 가식이었다. 이튿날부터
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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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은 계속됐고 급기야는 지방 유림으로까지 확대돼 이
시대를 두 동강 냈다. 결국
이 싸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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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예척(승하)한 후 아들 숙종의 추상 같은
어명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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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재위 기간은 뜻밖에 북방이나 왜구의 외침이 없어 평온했던 때다. 임금과 신하가 일심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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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종묘 사직을 위해 전념했더라면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누렸을 시기다. 일과성으로
해석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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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복상 기간 문제를 권력 향배와 연루시켜 한 시대를 냉동시켜 버렸다. 능력 있는 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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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앙받을 수 있는 당저를 무력한 임금으로 이 시대 정객들이 추락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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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청국의 유년 시절 영양 부족으로 몸이 허약한 데다 평생을
악성 안질에 시달렸다. 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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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의 행궁에 자주 들러 심신을 요양하는 일이 잦았다. 부왕의 북벌계획이 실효성 없다고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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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자 즉각 중단하고 대신 훈련 별대를 창설해 군비를 증강했다. 동철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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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흥을 꾀하기도 했으나 이 또한 하늘의 재앙과 예송논쟁에 휘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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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네덜란드인 8명이 제주도에 14년간 억류됐다가
탈출해 ‘하멜표류기’를 쓴 것도 이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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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풍수논쟁으로 멀쩡한 영릉(효종릉)을 여주로 천장하는가 하면 비구니 사찰을 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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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들을 환속시키기도 했다.
폐묘됐던 신덕고황후 강씨(태조고황제 계비)를
종묘에 부제( 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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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에 제사 지내는 날에는 ‘세원지우(洗寃之雨·원을 씻는 비)’가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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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에 등극한 효종이 15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병고를 못 이겨 붕어하니 보령 3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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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내 유좌묘향(정동향)의 서쪽 용맥에 명성왕후와 쌍릉으로 예장한 후 능호를 올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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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릉(崇陵)이다. 일반 출입이 통제된 비공개 능이며 능상에서 정자각이
보이지 않는 조선 왕릉이다.
21.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9대>숙종대왕과 명릉<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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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속성 꿰는 `名君' 통치력·치적도 `名品' / 201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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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계비 인원왕후릉에서 바라본 숙종대왕과 인현왕후의 쌍릉.
동원쌍봉의 이강릉이어서 왕릉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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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놓고 논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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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왕릉 뒤에서 바라본 명릉의 물형 산세. 신풍 숙종이 택지한 곳으로 명당의
길격을 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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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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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옛 선비들에게 명분과 신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송시열·윤휴·이원정·허적·김수항·박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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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숙종대왕이 수족처럼 아끼며 존중하던 명신들로 붕당싸움이 가장 극렬했던
당시 사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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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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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임금의 행적을 기록한 왕의 행장기에 숙종은 ‘여간해선 웃지 않는 신중하고도 엄격한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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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묘호(廟號)도 엄숙할 숙(肅) 자를 쓴 숙종이다. 숙종은 권력의 속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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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 보듯 관통하고 있었다. ‘왕은 아무나 될 수 없고 신하는 골라 등용하면 된다’는
만고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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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역사를 일찍이 섭렵했다. 때로는 ‘입안의 혀’를 주저없이 절단했고 철석같이 굳은 맹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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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반장처럼 파기했다. 임금과 신하들의 첫 번째 기(氣)싸움은 14세로 등극하던 해(1674)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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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모 발각된 남인 권력 독식 마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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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왕후(할머니)와 부왕 현종의 훙서로 숙종의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벌인 서인과 남인 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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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싸움이었다. 숙종은
스승 송시열이 영수로 있는 서인들을 몰아내고 외척들이 가담한 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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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에 왕심을 실어 서인 정권을 거세했다.
엎치락뒤치락 끝에 겨우 조정을 장악한 남인 세력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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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들의 처벌 수위를 두고 다시 강·온파로 양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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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의 권력 독식은 7년을 넘기지 못했다. 숙종 6년(1680) 남인의 허견 등이 인평대군(인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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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셋째 아들 복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역모가 발각된
것이다. 이른바 ‘삼복(三福)의 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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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가 된 숙종은 발작에 가깝도록 격노했다. 남인들에게
사약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내고 내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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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들을 조정으로 복귀시키니 이것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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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하 이념투쟁 왕 결심따라 생사 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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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에 진압된 이 모반 사건으로 숙종은 더욱 치밀해지고 영악해졌다. 누구도 믿지 않고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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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간 권력 분산만이 왕권 강화책임을 터득하게 됐다. 이 무렵 서인 세력이 또 분열됐다. 서인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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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숙종 외척)가 비열한 수법으로 남인 박멸을
기도하자 소장파들이 반발하며 노론과 소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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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지간이 돼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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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칠 줄 모르는 신하들 간의
이념투쟁은 왕의
결심 여하에 따라 생사 여탈권이 번복됐다.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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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고 임금에 대한 충성심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이런 숙종에게도
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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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근심이 있었으니 계비로 맞이한 인현왕후 여흥 민씨(1667~1701)에게서 대통을 이을 후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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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숙종이 대궐 뜰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얼핏 절세미모의 젊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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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눈앞을 스쳐갔다. 곁에 있는 제조(提調)상궁에게 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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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지나친 아이가 뉘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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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나인 장씨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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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히 가까이 오도록 이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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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가 금상 앞에 부복했다. 과연 나라를 기울게 하고도 남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다. 이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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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는 하늘 같은 임금의 승은을 입고 타고난 자태와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숙종의 총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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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차지했다. 숙원(종4품)이 된 지 얼마 안 돼 6품을 건너뛴 소의(정2품)로 승격되자 장씨의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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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은 내명부를 덮고도 남았다. 이럴수록 인현왕후는 위축됐고 숙종의 발길도 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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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는 겹친다 했다. 장
소의가 아들(후일 경종)마저 낳으니 왕실의 환대는 말할
것 없고 숙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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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또한 절정에 달했다. 금상의 변덕이 다시 발동했다.
소생 없는 인현왕후를 폐서인시켜 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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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쫓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킨 뒤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이번에는 서인 송시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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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안 된다고 숙종과 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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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송시열을 사사시키고 차제에 서인
세력을 몰락시켜 버렸다. 명분을 내세운 스승의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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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지만 인현왕후 아버지(민유중)가 서인의 중추
세력임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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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권력은 다시 남인들 손에
넘어갔고 기사년에 있은 정변이어서 기사환국(己巳換局·1689)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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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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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難 끊이지 않던 숙종 장희빈에 사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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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살다 보니 장희빈도 싫어졌다.
이미 숙빈 최씨(제1후궁)에게 정을 쏟아 왕자(후일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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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탄출했다. 또 다른 여섯 후궁들과 지내다 보니 어질고 현덕한 인현왕후가 새삼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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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마침 서인의 김춘택·한중혁 등이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서인 세력을 원천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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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던 남인들이 관련자를 하옥하고 심문한
뒤 숙종에게 사후보고했다. 임금 의중을 잘못 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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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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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진노해 남인들을 축출하고
또다시 서인들을 대거 등용했다. 사가에 있던 인현왕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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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위시키는 한편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켜 한 궁궐 안에서 살도록 했다.
이 해가 갑술년(1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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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사서에는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난히도 여난(女難)이 많았던 숙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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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에 관해서는 원비 인경왕후의 익릉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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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는 그칠
줄 몰랐고 왕실의 먹장구름은 걷힐 날이 없었다.
복위된 뒤 시름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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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던 인현왕후가 숙종 27년(1701) 35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한 것이다. 이 모든 불행이 장희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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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함과 악행에서 비롯된 것임을 뒤늦게 안 숙종이 하늘을 찌를 듯이 분기탱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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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으로 강등된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만들어
놓고 무녀를 불러 굿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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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는데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죽기만을 빈 것이 탄로난 것이다.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진토록 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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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렸으나 거부하고 사약을 내려도 먹지 않자 억지로 입에 부어 절명토록 했다. 차기 왕위를 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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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보는 앞에서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 소론 세력은 왕세자(경종)를 옹호했고 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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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 숙빈 아들(영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무당으로 인한 변고여서 ‘무고의 변’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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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조정은 오례(誤禮)문제, 고묘(告廟)논란, 임술삼고변, 회니(懷尼)시비, 북벌론의 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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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등으로 환국이 거듭되고 옥사가 그칠 줄 몰랐다. 이럴 때마다 숙종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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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출척권(用捨出陟權)을 유감없이 발휘해 신권을 제압했다. 후일의 사가들은
신료들 간 붕당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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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에서 손상됐던 왕권 회복과 강화에 비상한 능력을 보인 명군(明君)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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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권 안정되자 놀라운 통치력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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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 간 이전투구로 오히려 왕권이 안정되자 숙종의 통치력은 놀랍게 펼쳐졌다. 선조 말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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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원사업이던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토지개혁을 종결짓는가 하면 상평통보를 주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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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관청 및 지방관아 등에 통용시켰다. 왕실족보인 선원록을 간행하고 신증 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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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집례, 대전속록 등을 간행해 문물 정비에도 기여했다. 재위 기간 중 쟁쟁한 학자들을 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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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출시켜 조선 후기 성리학 전성기를 이루게 함도 숙종의 큰 치적으로 꼽히고 있다.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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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印跡)을 본떠 옥새를 만든 뒤 청국옥새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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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악화로 몇 차례 위기를 넘긴 숙종은 환후가 위독해지자 고명대신
이이명을 불러 연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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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을 경종 후계자로 삼아줄 것을 유언하고 붕어했다. 그러나 사관의 입회 없이 내린 이
유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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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유혈이 낭자한 신임사화의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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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이었던 숙종은 뒤늦게 아꼈던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친림하여 명당자리를 잡고 바로 그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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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현궁(玄宮) 터를 소점해 놓았다. 금상의 불찰로 원통하게 일생을 마친 인현왕후의 유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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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른 것이었다.
22.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9대>숙종 원비 인경왕후 익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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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첫사랑의 측은지심… 화려한 단릉으로 / 2010.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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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로 요절한 인경왕후의 능.
인현왕후·인원왕후와 함께 예장된 숙종의 명릉과 별도 산록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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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릉으란 능호를 갖고있다.
익릉 서쪽에 있는 장희빈 묘. 268년 만에 이장됐으며 온갖 실덕으로 사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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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뚜껑을 덮고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일생을 논할
수 있다고 했다. 사적 제198호로 지정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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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에 가면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대왕(1661~1720)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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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왕비들의 능이 있다. 역대 임금 중 여성 편력이 남달랐으면서도 여난에서 헤어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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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인간적 고뇌와 여인들의 흥왕·몰락사가 고스란히 멈춰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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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돈이 많다고 부자가 아니듯이 남자에게 여자가 많다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숙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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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왕비, 1폐왕비, 7후궁을
뒀지만 46년 재위기간 동안 편할 날이 거의 없었다. 수시로
변하는 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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탓도 있었지만 절대 권력자를 사이에 둔 여인들의 시기·질투·모함이 내명부 기둥을 뿌리째 흔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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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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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때 왕세자로 책봉된 숙종이 11세 되던
해 인경(仁敬)왕후 김씨(1661~1680)를 만나 부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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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둘은 동갑이었다. 대제학 김만기의 딸로
사계 김장생의 고손녀였던 김씨가 세자빈으로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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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자 할머니 인선왕후(효종왕비 장씨)는 크게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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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연두 걸린 인경왕후 20세에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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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김씨 김공(김장생)은 일찍이 나의 선고(先考) 문충공(장유) 스승인데
지금 나와 그 손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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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며느리가 됐으니 이 얼마나 기이한 경사인고. 실로 무량한 복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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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와서는 천연두(마마)가 박멸돼 법정
전염병에서도 퇴출됐지만 예전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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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병이었다. 민가에서는 ‘손님이 지나가야 사람 노릇한다’면서 두창을 앓고 난 뒤 호적에
입적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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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했다. 왕실에서는 천연두를 거르고 왕비(숙종 1년)로 책봉된 김씨가 늘 근심이었는데 우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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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닥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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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6년(1680) 천연두에 걸린 인경왕후가
출산을 하던 중 홀연히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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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20세의 애절한 청춘이었다. 첫 정을 흠뻑 쏟았던 숙종이 서오릉 안에 장사 지내며 ‘사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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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하다’는 뜻의 익릉(翼陵)이란 능호를 내렸다. 영중추부사 우암 송시열은 다음과 같은 명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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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인경왕후를 애도하며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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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천(上天)이 인덕을 베풀지 아니해 갑자기 왕후의 먼 여생을 막았구나. 이른바 신이란 존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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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밝히기가 어렵고 이(理)란
것 또한 추측할 길 없음이 이와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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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장상도 죽어지면 잊혀지고 수밀도(水蜜桃)같이
달콤한 천
년 약속도 눈에서 멀어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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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인 법. 숙종은 상처의 아픔을 얼른 잊고 이듬해 인현(仁顯)왕후 여흥 민씨(1667~1701)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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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계비로 맞았다. 서인의 중추세력이었던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6살 연하였다. 역대 내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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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가장 현덕한 왕비로 존숭받고 있으나 더없이 불행했던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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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내 비극은 인현왕후의 ‘무자식 팔자’와 숙종의 끊임없는 ‘바람기’가 단초였다. 왕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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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한 절대 군주 앞에 세기의 요화(妖花)가 눈에 띈 것이다. 미모와
간교로 종4품 숙원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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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약 왕비까지 오른 희빈(禧嬪) 옥산 장씨(1659~1701)다. 역관 장형의 딸로 전해 오지만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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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모의 정부였던 조사석(인조계비 장렬왕후 조씨 동생) 딸로 더 알려져 있다. 장씨는 조사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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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 동평군 주선으로 어릴 적 궁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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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의 `女難' 왕실 내 비극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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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장희빈이 아들까지 낳자 더욱 깊은 미혹에 빠져들었다. 착한 인현왕후를 내치고 장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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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로 진봉하는 과정에서 아까운 대신들 목숨이 추풍낙엽처럼 스러져 갔다. 이 와중에도 숙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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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 최씨(영조 생모), 명빈 박씨, 귀인 김씨, 영빈 이씨, 소의
유씨와 직첩을 받지 못한 이씨·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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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7후궁을 둬 모두 3남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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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세월이 흐른 뒤 장희빈의 해괴한 실행과 눈 먼 행악이 숙종에게 발각됐다. 왕비에서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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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강등된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은 것이 들통 난 것이다. 숙종은 한때 세상을 다
줄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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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며 사랑했던 여인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눈이 뒤집힌 장씨가 순순히 받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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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죽기 전에 세자를 한 번만이라도 가까이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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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가는 사람 소원 못 들어줄 게 무엇이겠는가. 세자가 어명으로 장씨 품으로 다가갔다.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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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호로 돌변한 장씨가 세자의 하초(下焦)를 훑어 버렸다. 세자는
기절했고 장씨는 억지로 따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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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을 삼키고 절명하니 43세였다. 후일 왕위에
오른 세자(경종)는 원비 단의왕후와 계비 선의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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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뒀으나 끝내 후사를 잇지 못했다.
이 같은 왕실 비극은 숙종의 행장에 완곡한 표현으로 기록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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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자신이 낳은 차대 임금을 눈앞에 두고 생목숨 끊어야 하는 장희빈의 절통함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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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지엄한 어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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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와 세자를 위해 부득이 희빈 장씨를 자진시키니 내 마음이 슬프오. 깊이 생각한 바
이 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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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소. 이후로는 국법으로 밝혀 빈으로 하여금 왕비에 오르지 못하게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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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문형리에 장사
지냈다가 죽은 지 268년이 지난 1969년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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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로 묘지가 수용되면서 서오릉 안 경릉(추존 덕종) 서록에
이장됐다. 불과 40여 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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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좌오향의 정남향이긴 하나 명당·흉지를 운위할 자리조차 못된다. 그나마 타관객창에 홀로
버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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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가 남편의 명릉 가까이 묻힌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짐은 산 사람들의 정서에서 비롯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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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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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내 여러 왕릉 중 숙종과 그의 왕비릉을 답사하면서는 각별한 감회가 교차한다. 인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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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저마다의 한 평생을 참으로 잘 살아야 되겠다는 역사의 훈교(訓敎)가 그곳에 있다. 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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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 호의호식하고 일신영달을 누리면 그만이라 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결코 그런 삶을 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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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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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의 여인들 서오릉 한자리에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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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좌미향(丑坐未向·서남향)의 익릉을 찾은 참배객들은 세 공주를 낳아 일찍 떠나보내고 자신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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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인경왕후 일생을 연상하며 측은지심을 내보인다. 스무 살에 세상 떠난 왕비에게 무슨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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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겠느냐 위로하며 그래도 익릉이란 능호 아래 단릉으로 존재함을 내심 부러워하는 눈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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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제1계비 인현왕후와 쌍분으로 예장된 뒤 능호를 명릉이라 했다. 원비 인경왕후가 있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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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생전 지지리도 속 썩인 인현왕후 옆에 묻히고자 한 왕의 유명에 따른 것이다. 사람들은 죽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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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 남편 곁에 묻혀 다행이라며 왕후의 덕을 기리고 못 잊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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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릉 왼쪽에 있는 제2계비 인원(仁元)왕후 경주 김씨(1687~1757)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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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보다 27세나
아래였다. 좌상우하(左上右下)의
조선 왕릉
배치를 벗어나 능호에 대한 이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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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다. 숙종과 한 능역에 있다 하여 명릉으로 함께 회자되는 걸 탐방객들은 아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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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
쓰인 대빈묘(大嬪墓)를
스치는 과객들마다 ‘저게 그 못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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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묘’라며 삿대질하고 눈을 흘긴다. 희빈 장씨 영혼이 이 현장을 목도한다면 어떤 회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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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낼까. 장씨가
또 한번 인간으로 환생해 260여 년 전 그 인생길을 반복한다면 다시는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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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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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익릉을 중심으로 숙종과 여인들에 얽힌 삶의 대조가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더불어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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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족의 딸이긴 마찬가지였으나 어쩌다 후궁 신세가 돼 그늘 속에 살아야
했던 여인들의 한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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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구석구석에 서려 있다.
23.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0대>경종대왕 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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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왕 빌미 노-소론 `진흙탕 승계 싸움' / 201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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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상하연봉으로 예장된 경종대왕(사진 앞)과
계비 선의왕후의 의릉. 좌우의 명당혈이 좁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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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장법으로 왕릉풍수의 진수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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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 앞 금천교(앞)와 홍살문. 조선 왕릉에는 능 앞에서 합수되는 명당수가 반드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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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 임금들의 일상은 참으로 고달팠다. 새벽 5시
전 기상해 밤 11시가 넘어서야 정침에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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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일과이다시피 했다. 혹간
춘정이라도 동해 왕비나 후궁들 침소에 들기라도 하는 날이면 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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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을 이기지 못해 이튿날 집무가 흐트러졌다. 조선 27대 군왕들의 평균 수명은 47세다.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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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에서 진상된 정력 보약제를 너무 자주 복용해 독이 축적된 데다 10대 전반부터 비롯된
후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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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 과도한 동침이 큰 원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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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장남으로 제20대 보위에 오른 경종(景宗)대왕은 평균 수명에도 못 미치는 37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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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서 권세는커녕 호강 한번 못해 보고 병석에 누워 신음만 하다 후사조차 못 잇고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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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가 생모 장희빈을 잘못 만난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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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때부터 약골 크면서도 병고 시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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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1688~1724)의 일생을 추적하다 보면 고대광실 높은 집과 일망무제(一望無際) 문전옥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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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하나 못 지키면 백사허망이란 고금진리를 터득하게 한다. 날 때부터 약골이었던 경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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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정에서도 병고에 시달려 숙종을 불안케 했다. 양순한 성정에 심덕마저 어진 것이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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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이었다. 어명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 내거는 궐내 대신들을 장차 어찌 통치해 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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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원자로 정호되고 3세 때 세자 책봉된 경종에게 14세에 목격한 어머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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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지축이 흔들리는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내린 사약을 안 먹겠다고 발악하자 입을 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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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따라 붓게
했다. 먼저 떠나는 이승길이
원통했던지 자신의 하반신을 훑어내려 혼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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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난 뒤 모든 것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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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경종은 만사 의욕을 상실하고 위축됐다. 자신의 세자 지위를 놓고 극단으로 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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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지화에 이르도록 싸우는 대신들도 두려웠다. 소론 세력은 경종 편이었고 노론 측은 이복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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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을 왕위에 앉히고자 했다. 더욱 견딜 수 없는 심리적 압박은 원손을 학수고대하는 부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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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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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에겐 9세 때 가례 올린 두 살 위의 세자빈 청송
심씨(1686~1718)가 있었으나 음양이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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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도 모를 당시 만나 남처럼 지냈다. 춘심이 발동할 무렵 생모가 사사당하며 남긴 치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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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곧 남성 상실로 이어져 천하일색 양귀비도 경종에겐 덤덤할 뿐이었다. 당대 최고 명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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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가 내리는 비방도 무위였고 온갖 희귀 약재로 달인 회춘제 역시 허사였다. 백약이 무효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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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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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역시 이런 세자에게 마음이 떠났다. 보령 60세로 재위 46년 만에 죽음을 직감한 숙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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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의 영수 좌의정 이이명을 독대하며 유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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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무자다병하니 그 즉위 후 후계자는 연잉군으로 정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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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은 숙종이 아끼던 숙빈 최씨 아들로 경종보다 6살 아래였다. 사관의 입회 없이 은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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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진 이 유언 한 마디는 대신들 간 결사투쟁으로 또다시 대궐 안은 인간 도륙장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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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이 극심했던 왕권 시절 가문의 대를 잇고 목숨을
부지하는 길은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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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지위가 높은 고관대작일수록 생명을 담보하는 벼슬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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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엄한 군주로 절대왕권을 회복시킨 숙종이 훙서하자 34세의 세자가 등극하니 비운의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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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대왕이다. 3세
이후 세자 자리에 있은 지 31년 만이었다. 경종은 용상에 오르기 전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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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극단사를 수없이 겪어 왔다. 부왕이 건강을 핑계로 내던진 ‘세자 대리청정’ 덫에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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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신하들이 명멸했고 세자빈 심씨(단의왕후)를
먼저 떠나보내는 단장의 슬픔도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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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비로 맞은 선의(宣懿)왕후 함종 어씨(1705~1730)에게도 후사가 있을
리 없었다. 함원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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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유귀의 딸로 14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된 총명하고 건강한 규수였다. 경종이 즉위하며 왕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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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봉됐으나 주상은 병석에만 누워 침소에 들지 못함을 늘 안타까워했다. 세월이 가며 격정이
동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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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였음에도 금상과 왕비는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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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지 세력 소론 반대에도 연잉군 세제 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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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또 여러 대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당쟁의 시발이었다. 소론
측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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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 위해 아들 없는 임금이지만 경종을 결사 옹위했다. 노론 측은 국본(國本·차기 왕)이 안정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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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면 나라가 흔들린다며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정하자고 경종에게 상소했다. 경종은 자기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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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인 소론 측 반대를 물리치고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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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경종의 옥체는 더욱 미령하여 용상에 앉기조차 힘들어했고 옥음조차 어눌해졌다. 내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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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 노론 측에서는 사직의 백년대계를 위해 세자가 대리청정해야 함을 한사코 주청했다. 만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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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잃은 임금이 “그리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자 한 발만 물러서면 천 길 낭떠러지에
선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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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이 목숨 건 승부수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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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2년(1722) 서자 출신 목호룡이 “노론이
이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해와 역모를 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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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거짓 고변해 버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소론 측 기세에 떠밀려 조정을
내맡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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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김일경·이광좌 등이 노론 측에 행한 보복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잔혹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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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과 임인년에 걸쳐 피를 불렀다 해 신임사화로 불리는 이 정변에 희생되거나 유배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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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측 인사는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 등 노론의 4대신 외 2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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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사형당하고 30여 명은 형장에서 맞아 죽었으며 가족이란 이유로 교살당한
자만 13명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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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겸양 온순한
성품으로 인명을 아꼈던 경종은 병석에서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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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이후 조신(朝臣)들이
한 바를 살펴보면 조금도 나랏일에 도움 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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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소. 한 집안 내에서도 서로 죽이기를 일삼으니 당쟁의 화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한심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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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통탄하기 그지없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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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4년 2개월 37세로 눈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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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은 군왕의 권력이 무엇이기에 임금 명을 빙자해 아까운 인재들이 저토록
죽어 가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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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며 슬피 울었다. 사람이 기댈 곳과 낙을 잃고 상심하면 대문 밖이 곧 저승이다. 경종은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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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2개월 13일
만에 37세로 눈을 감았다. 예고된 쓸쓸한 죽음이었다. 경종의 예척으로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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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가 즉위하자 이번에는 노론이 전횡하며 소론에
대한 가혹한 징벌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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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재위 시 국세는
매우 위태로웠고 권신·당인들
간 음모가 격심해 백성을 위한 국정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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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력은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서양 수총기(水銃器·소화기)를 모방 제작하고 독도가 우리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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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밝힌 남구만의 ‘약천집’ 간행 등을 치적으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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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이 승하하자 31세 새 임금 영조와 노론 측에서는 겉으로 크게 슬퍼하며 서울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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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관동 산1-5 천장산 내룡맥에 신좌인향(申坐寅向·동북향)으로
조영한 뒤 능호를 의릉(懿陵·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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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호)이라 지었다. 영조 6년(1730)
계비 선의왕후가
26세로 승하하자 의릉 아래 상하연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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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下連穴)로 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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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의 영릉(효종대왕과 인선왕후)에
이은 조선왕조 두 번째 동원 상하연봉릉으로 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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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혈이 좁을 때 아래·위 혈(穴)을
찾아 쓰는 장법이다. 경종은
사후에도 수난이 많아 의릉에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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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 청사(1962)가 들어서면서 능역이 심한 손상을 입었다. 1995년 국가정보원이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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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동으로 이전한 뒤 5차에 걸친 부지 반환이 이뤄져 현재는 대부분 복원됐다.
24.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0대>경종 원비 단의왕후 혜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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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남편·무자식 운명 살아서나 죽어서나 쓸쓸함만 …
/ 201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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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며느리로 불우한 일생을 산 단의왕후의 혜릉. 원(園)에서 능으로 격상된 왕릉이어서 능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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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석물들이 단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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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릉 정자각. 한동안 피폐됐다가 1990년 초
중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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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이나 무덤에도 신분이 있다. 특히 왕족들 무덤은 묻히는 사람의 직위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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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나 왕비는 능(陵)이며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사친(私親·왕을 낳을 당시 왕과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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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이 아니었을 경우)은 원(園)으로 부르며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과 같이 묘(墓)라 호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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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에라도 지위가 격상(추존)되거나 격하(폐위)되면 무덤에 대한 신분도 과거와 현재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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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사적 제193호·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에 가면 남편 지위에 따라 사후 신분이 달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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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이 있다. 조선 제20대 경종대왕 원비 단의(端懿)왕후 청송 심씨의 혜릉(惠陵)이다. 한 시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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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령했던 다른 왕이나 왕비처럼 능침 규모가 웅장하거나 남편과 쌍릉으로 예장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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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한편 고적한 구석에 외롭고 쓸쓸한 단릉으로 동쪽(유좌묘향)을 바라보고 있다. 공교롭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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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의왕후가 두상(頭上)을 둔 서쪽은 경종이 계비 선의왕후(함종 어씨)와 함께 예장된 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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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懿陵·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쪽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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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살에 가례 고된 며느리 역할만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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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의왕후(1686~1718)는 온 백성이 우러르며 부러워하는 세자 배필 자리에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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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여인이었다. 11세 때 두 살 아래 경종을 만나 가례를 올려 부부가 됐지만 시집인 대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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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는 지엄한 궁중법도 교육과 고된 며느리 역할뿐이었다. 표독하고 극성스러운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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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는 아들(경종)을 빼앗겼다는 서운함에 얼음장처럼 차게 대하고 남편마저 심약해 기댈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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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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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은 더욱 가관이었다. 친(親)시모(장희빈)와 서(庶)시모(인현왕후)를
사이에 둔 노론과 소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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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투쟁이 끝 간 데를 몰라 대신들이 죽고 유배 길을 떠났다. 마침내 이 싸움에 친시모 측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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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이 패해 시아버지(숙종) 사약을 받고 시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악에 바친 시어머니가 남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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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로 만들어 놓으니 이때 심씨 나이 1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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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남편(세자)은 숙맥불변(菽麥不辨)이 됐다. 내명부에서는 근인을 뻔히 알면서도 원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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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다. 이럴 때마다 심씨의 오장육부는 새까맣게 타 들어갔고
장희빈에 대한 원망이 분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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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폭됐다. 침전 밖 청천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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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이나 죽었으면 당신의 손자를 낳아 왕통을 이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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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가. 세자의
대를 잇지 못하는 내 신세가 장차 어찌될 것인지…. 여자로 태어난 처지가 가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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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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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심씨는 세자빈이 돼 대궐로 떠나던 날 어머니(고령 박씨)가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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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리며 당부하던 말씀이 떠올랐다.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한 천신만고의 간택이었지만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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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영의정 심호) 역시 반기는 자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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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막작여인신(人生莫作女人身·무릇 인생은 여인으로 태어날 것이 아니로다) 평생운수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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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生運數依他人·평생 운수를 남에게 의지해야 하느니라). 이 말을 한시도 잊지 말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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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같은 세월이 흘러 세자빈 나이 어느덧 30을 넘겼건만 몸에 태기는커녕 운신조차 하기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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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고 뽕 밭엘 가야 님을 만나련만 세자는 빈궁 침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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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지도 않고 군왕 수업에만 열중이었다.
추야장 긴긴밤을 홀로 지새울 적마다 심씨의 장탄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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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으로 멍울졌고 심신은 야위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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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는커녕 중병 33세에 한많은 일생 마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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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44년(1718) 심씨가 33세로 하세했다. 시아버지 숙종은 누구보다도 한많은 일생을 살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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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애잔해 동구릉 안 서쪽 능선에 장사지내고 그 회한을 글로 적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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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의 덕스런 성품과 순수한 언행은 하늘로부터 나서 얻은 것이다. 사람이 교정하고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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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 억지로 시켜 그렇게 된 바가 아니로다. 진실로 왕실의 큰 상실일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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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씨의 무덤은 세자빈 신분이어서 원(園)으로 예우됐다. 봉분도 작았고 원 앞 석물들도 간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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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야속한 건 왕실의 법도였다. 이 해에 숙종은 14세의
함종 어씨를 세자빈으로 다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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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타고난 약골에 생산 능력조차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빈궁 자리는 비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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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참지 어유귀(魚有) 부부는 금지옥엽으로 소중히 키워온 어린 딸을 재워 놓고 눈이 붓도록 밤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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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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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항상 명문갑족 벼슬 높은 사위도 바란 적 없고 네 몸 하나 위해
주는 서방 만나 잘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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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했건만 이 무슨 운명의 훼방이란 말이냐. 이를 어찌해야 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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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1720) 숙종이 승하하며 경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세자 때보다도 더 무력했다. 천성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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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무져 왕권이라도 행사했으면 속 시원하련만 어림없었다. 성정마저 심약해 대쪽 같은 신료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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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개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먼저 세상 떠난 세자빈 청송 심씨를 단의왕후로 추존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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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을 능으로 승격시켜
혜릉이란 능호를 내린 것과, 함종
어씨를 왕비로 진봉한 것도 궁중법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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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른 것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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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심씨에게는 사후에 팔자 고치는 계기였다. 낮았던 봉분이 높아지고 능침 앞에는 왕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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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하는 문·무인석이 세워졌다. 그리고는 종묘(국보
제227호·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영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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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寧殿) 동협(東夾) 제13실에 경종대왕과 배향됐다. 세자빈이나 후궁
신분으로는 언감생심 넘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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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할 지존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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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 새삼 덧없어지는 마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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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의왕후가 예장된 혜릉 앞에서 탐방객들은 잠시 상념에 잠긴다. 죽은 뒤 명예를 위해 간난(艱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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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 모은 돈을 세상과 나눠 쓸 것인가, 아니면 사후야 어찌됐건 호의호식하며 내 식솔들하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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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다 갈 것인가. 살아생전 일신영달과 죽어서의 사후평가가 혜릉을 지나치는
노부부 낯빛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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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으로 투영된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세월의 길목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인간의 존재가 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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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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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에겐 연잉군(영조)과 연령군(명빈 박씨 소생)의 두 이복동생이 있었다. 연잉군은 자신과 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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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놓고 용호상박하는 두려운 존재였으나 연령군(延齡君·1699~1719)은 군신 예의로 경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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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랐다. 이런 연령군을
부왕 숙종도 지극히 아꼈다. 단의왕후가 승하한 이듬해 연령군이 하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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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은 극진한 슬픔을 담은 제문을 손수 지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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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대답 없고 막막하여 들리지 않는도다. 이미 세상을 떠나갔거니 네 모습을 헛되이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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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라.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고 산에 묻힘에는 기한이 있음이 애절하도다. 옷자락에 석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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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았나 싶더니 어느덧 월색이 천추를 비추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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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석에서 애통해하던 숙종이 이 제문을 읽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혼절에 이르도록 앙천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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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절구(絶句)다. 조선 왕조사에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 가는 임금과
왕비들이 여럿 있는데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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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원비 단의왕후도 이에 속한다.
재위 기간이 짧거나 당쟁에 휘말려 괄목할 만한 치적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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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는 남편이 아내를 죽인 숙종 조(朝)와 아비가 아들을 죽인 영조 묘(廟)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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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하지 않는다. 그 살얼음판 시대를 살았던 경종과 단의·선의왕후를 청사(靑史)는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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