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조선왕릉

6대 단종 ∼ 10대 연산군

도화골 2017. 2. 10. 12:56

8.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6>단종대왕과 영월 장릉

참담한 배인 소나무도 쓸쓸히/ 2010.02.19

 

 

비운의 임금 단종이 영면해 있는 영월 장릉. 서울 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조선 왕릉.

 

 

 

장릉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정령송. 경기 남양주시 사릉(정순왕후릉)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다.

 왕릉에 가면 제향을 모시는 정자각에 이르기 전 박석을 깔아 놓은 참도(參道)라는 길이 있다.

좁다란 길이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세 갈래로 구분돼 있다.   중앙이 가장 높고 왼쪽이 약간 높으며

오른쪽은 가장 낮다.   중앙은 신도(神道)라 하여 산릉제향 시 오직 대축관(大祝官)만 밟을 수 있고

왼쪽은 임금이 걷는 왕도(王道)이며 오른쪽은 한 발짝 물러서서 세자가 따라 걷는 길이다.

 단종의 능 제향은 매년 10 3일이다. 

 ○ 사고무친 단종 후궁 젖 먹고 자라
 예로부터 부모는 팔자라 했다. 어떤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나느냐에 따라 절반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난다는 말이다. 어느 누군들 돈 많고 권세 누리며 출세한 부모를 만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천륜으로 맺어지는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은 세상 누구에게도 선택권이 없다. 다만 숙명일     
 따름이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부모 노릇 다 하는 게 아니다. 양육하고 교육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지켜줘야 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다. 더구나 단종은 사고무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조모가 되는 혜빈 양씨(세종의 후궁)의 젖을 먹고 자랐고 친 혈육이라곤 나이 어린 누이 경혜

 공주밖에 없었다. 이런 시국 상황을 둘째 왕자 수양대군과 셋째 왕자 안평대군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권력의 핵심이었던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는 안평을 암묵적으로 지원
 했다. 천성적으로 호방한 기질에 과단성을 타고난 수양이 이를 좌시할 리 없었다. 한명회·권남 등
 권모와 지략에 능한 책사와 홍달손·양정·류수 같은 힘센 무사들이 그의 수하로 규합되었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절박한 판세에서 갑자기 문종이 붕어하자 12세의 어린 단종이 왕위      

를 계승(1452)한 것이다. 돌봐줄 사람도 없는 요즘의 초등학교6학년생이 보위에 오른 것이다.

수 없이 단종은 부왕이 믿던 대신들을 의지하게 됐고 왕권은 흔들리며 이른바 내각책임제 격인

신권(臣權)통치로 기울었다. 이 판도에서 먼저 치고 나온 게 수양의 계유정난(1453)이다.

이후 조선 국초의 역사는 피바람이 몰아치며 비참해지고 만다. 친동생이자 수양의 정적이었던

안평은 아들과 함께 사사당하고 수백 명에 가까운 인재들이 견딜 수 없는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임금 자리가 무엇이고 권력이 뭔지도 알 수 없는 단종은 숙부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그저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다. 정권을 새로 잡아 벼슬자리에 오른 정인지·한명회·권남 등이 단종 앞에 나아가

왕위를 내놓으라 하자 얼른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 영월 청령포로 유배 외로움 극에 달해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곧바로 상왕이 됐다. 사육신의 복위 계획이 정창손과 김질의

고자질로 발각되자 노산군으로 강봉된 후 머나먼 영월 땅 청령포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

버렸다. 부왕의 국상 중임에도 숙부의 강권으로 가례를 올린 정순왕후 여산 송씨와도 떨어져

단종의 외로움은 극에 달했다. 이럴 때 단종은 영월 관풍매죽루에 올라 기막힌 신세를 한 편의

시로 달래곤 했다.

  소쩍새 울다 지친 새벽 봉우리엔 조각달만 밝고/ 피를 흘린 듯 봄 골짜기에는 떨어진 꽃들이

붉은데/ 귀머거리 하늘은 아직도 이 애달픈 호소 듣지 못하고/ 어찌하여 근심 많은 이 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단 말인가.

 하늘도 천지신명도 어쩔 도리가 없을 때가 있다. 다만 지켜볼 따름이다. 실낱같은 단종의 명을

재촉한 건 경북 순흥 땅에 귀양 가 있던 여섯째 숙부 금성대군이 이보흠과 계획한 또 다른 복위

운동의 발각이다. 세조는 아예 후환을 없애겠다며 의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지어 내려 보냈다.

이리하여 단종은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되니 보령 17, 요즘 나이로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왕방연은 단종의 사형을 집행하고 돌아오며 각혈할 것 같은 슬픔에 잠겼다. 어쨌든 자신이

가져간 사약으로 인해 어린 임금이 생목숨을 끊은 것 아닌가. 그는 영월 동강 가에 앉아 피를

토하는 시 한 수를 지어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그 후 왕방연은 서울에 와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 경기도 구리에서 배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마쳤다. 단종이 승하한 10 24일이면 배를 한 바구니씩 상에 올리고 제사를 올렸다. 어린 임금을

유배지로 호송하며 어명이 무서워 물 한 모금 못 올린 한 때문이다. 유난히 달고 물이 많아 이

지역에서 나는 배를 ‘먹골배’라 부르게 된 연유다.

○ 영월 호장 목숨 걸고 시신 거둬

 세조는 단종을 죽여 동강 물에 던져 버리고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해 버리겠다고 했다.

이토록 서슬 퍼런 시국에도 의인 하나가 있었으니 영월 호장(戶長·지방의 높은 벼슬) 엄흥도다.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면서 물 위에 떠 있는 시신을 수습해 영월

동을지산에 암장해 놓았다. 그리고 눈 덮인 겨울날 노루가 앉아 있던 자리만 녹아 있어 그 자리를

파고 묻었다. 신좌(서에서 북으로 15) 을향(동에서 남으로 15)으로 풍수학인들은 이 자리가

조선의 왕릉 가운데 건원릉(태조고황제), 영릉(세종대왕)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꼽고 있다.

 세월이 흘러 240여 년이 지난 숙종 24(1698) 비로소 단종은 복위되면서 시호를 받고 영녕전에

부묘되었다. 중종이나 효종 때도 몇몇 신하가 복위 상소를 올렸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모두가

세조의 후손이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숙종 때 대제학 서종태가 장릉을 복원하며 정자각 상량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구불거리는

산세는 멀리 그 줄기가 갈라졌고 봉황이 날며 용이 오르는 기상을 머금었다. 뭇산이 둘러쳐

옹위함이 임금께 절하는 듯하다.

 한때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사릉(정순왕후릉)과 합장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600년 역사의

왕릉을 후세인들 판단으로 옮긴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사학계가 발끈했다. 현재 장릉

앞에는 사릉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 정령송(精靈松)이 쓸쓸히 서 있다.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9.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7>세조대왕과 광릉

`왕위 찬탈 ' 500 세월에도 무게 그대로/ 2010.03.05

 

 

 

  세조의 광릉 전경. 동원이강릉으로 정희왕후와 한 능역에 두 능으로 나뉘어 있으며 500년 세월이

넘도록 왕위찬탈의 역사적 짐을 못 내려놓고 있다.

 

 

   조선왕릉 중 가장 아름다운 광릉 숲. 조영 당시부터 뛰어난 경관으로 참배객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않던 짓’을 하고 착해진다고 했다.  사후의 세계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상을 겁 없이 산 사람도 병들어 신음하다 보면 꿈자리가 사납고 헛것이 보이며 마음이

뒤숭숭해지기 마련이다.  과연  극락과  연옥,  천당과 지옥은 존재하는 것일까.  양심(兩心·두 가지

마음)과 양심(良心·바른 마음)의 사이에서 어떤 마음을 존중하며 살아왔는가.

 난세의 영웅 세조도 말년 들어 부쩍 겁이 많아졌다.  막상 권력의 정상인 임금 자리에 올라 보니

별것도  아닌데  왜 그리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괴롭기만  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조카(단종)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세종)와 형님(문종)이 아끼던 신하들의 목숨을 너무 많이 끊었다.

○ 무자비한 도륙 원각사 지어 참회

 저승에  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고  독수리보다 더 용맹스러웠다는 증조할아버지(태조고 황제)

어떻게  우러를  것이며,  불 같은  성품의 할아버지(태종) 앞에 어찌 조아리고 나서겠는가.  세조는

절을 지어 참회하기로 했다. 옛 고려 때 절인 흥복사 터에 어명으로 새 절을 창건케 한 뒤 원각사라

이름하고 탑과 비를 세웠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안에 있는 오늘날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국보 2호로, ()는 보물 3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유교를 치도(治道) 이념으로 내세워 건국한 당시의 조선 국왕이 성안에 절을 짓는다는 건 혁명적

발상이었다.  집현전과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그래도 세조는 강행했다. 그 후 세조의 증손자가

되는 망주(亡主) 연산군이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방으로 만들어 기생들을 농락하고, 역시 증손자

중종 때에는 절마저 헐어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다.

 성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둘째 왕자로 태어난 세조(1417~1468)는 저승에서까지

원망을 듣는 임금이다. 조카 왕위찬탈, 잔혹한 사육신 도륙, 무력 강압 통치의 일인자라는 수식어가

훙서한  540  년이 지나도록  붙어 다닌다.  세조가 다시  태어나 그 같은 입장에 또다시 서게

된다면 이 같은 역사적 원망과 저주를 각오하고라도 다시 왕위에 오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문종과  단종시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자세히 탐구해 온 사학자들은 세조가 일으킨 계유

정난(1453)  대해  정당성을  주장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병약한  문종이  승하하며 의정부의

핵심인 김종서·황보인 등에게 유언으로 단종을 부탁했는데 이들의 권력 독점이 지나쳤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집현전  학자 정인지·최항·신숙주 등과 후일 사육신이 돼 죽는 성삼문·하위지까지 정난에

중립을 지켰거나 세조에게 동조할 정도였다.

   이후의 역사는 세조의 편으로 기울었다.  세조의  쿠데타  과정에서  뜻을 달리한 수많은 인재가

혹독한  고문 끝에 죽었거나 귀양 가고 벼슬에서 떨어졌다.  친동생 둘(안평·금성대군)과 계모 혜빈

양씨(세종 후궁)  그의  아들인 이복동생(한남군·영풍군)도 목숨을 잃었다.  이 모든  것이 병들어

쇠약해져 가는 세조에게는 큰 고통이었고 후회스러운 일들이었다.

○ 피부병 완치 부처 은혜 감동 대장경 인쇄

 어느 해 여름 세조는 강원도 평창 상원사 문수보살이 용하다 하여 그곳을 찾았다.  땀에 찬 미복

(微服·임금이 몰래 민정을 살피러 다닐 때 입는 옷)  벗어  놓고 절 입구 우물에서 등목하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어린 동자 하나가 나타나 등을 밀어주었다.  손길이 어찌나 곱고 시원한지 기특

하여 동자에게 일렀다.

 “동자야, 너는 어디 가서 임금의 등을 보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어린 동자가 등과 목을 골고루 문지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절대로 문수 동자를 친견했다고 발설해서는 아니되십니다.

세조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세조의 피부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형수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저주하며 침을 뱉은 이후 피가 나도록 긁어도 낫지 않는 고질 피부병

이었다.  세조의 피부병을 낫게 한 그 우물은 지금도 상원사 입구에 있다.  대장경을 인쇄하고 간경

도감을 설치해 금강경언해를 간행한 그의 치적도 불은(佛恩)에 감동한 마음의 시주였다.

 세조는 그가 사는 52년 동안 한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영광과 불행은 빠짐없이 경험했다.  왕자

  신분으로  태어나  정권의  실세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좌절도 맛보았고 임금이 돼 천하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    세자로 책봉한 아들(의경세자)이 죽었을 때 하늘을 우러러 원망했고 둘째 며느리

(예종왕비·한명회의 딸)와 손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땅을 치기도 했다. 까닭을 알 수 없이 겹치는

가족사의 불행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의 철권정치는 조정을 더욱 숨 막히게 했다.

○ 재위 14년간 경국대전 편찬 등 큰 치적

 세조는  14년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군제개혁을 통한 국방력 강화,  호패법의

재실시,  백성을  위한 토지개혁제인  직전제 실시,  경국대전  편찬 등의  업적이  대의명분을 잃은

왕위찬탈에  묻혀  버리고  만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라지만 세조와 안평이 단종시대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면  원로  대신들과  집현전  젊은 학자들 간 치열한 권력 다툼이 어찌 됐을지

사학자들의 염려는 크다.

 세조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해 능 관리를 철저히 당부했다. 능호를 광릉(光陵)이라

올리고 조선왕조 내내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7번지에

있는 광릉은  사적 제197호로  지정돼 있으며  현재까지도 풀 한 포기,  돌 하나의  채취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광릉은  세조왕비  정희(貞熹)왕후와  같은 능선 아래의 다른 언덕에 안장된 동원 이강(同原異岡)

능제이다.   두 능의 중간지점에 정자각을 세운 조선 최초의 능으로 세조의 유언에 따라 현실(玄室·

임금 시신을 안치하는 석실)을 꾸미지 않고  회격으로  대신했다.  봉분  곁의  병풍석도 쓰지 않고

난간석만 두른 조선 능제의 일대 변혁을 광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촬영을  허가받아  능상에  오르니 세조 능은 자좌오향의 정남향이고 정희왕후 능은 축좌미향의

서남향이다.   동일  영역  내에  있으면서도  내룡맥에  따라  이처럼  좌향이 달라지는 게 풍수적

물형이다.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권의 번창을 위해 당대 최고의 국풍(國風·왕릉 터를 잡는 풍수)

이 터를 골랐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

 능 뒤 입수(入首) 용맥은 결인(結咽·병목 현상을 이뤄 기를 모았다가 밀어주는 산세)을 잘 이뤘고

()청룡, ()백호, 북현무, 남주작의 사신사가 겹겹인 데다 안산과 조산이 첩첩이다. 여기에다

입수(入水)와 파수(破水)의 물길 하나 소홀함 없이 사격(砂格)을 두루 갖췄다.  정희왕후  능 무인석

아래에는  큼직한  옥새석이  자리하고  있다.   능 앞의  옥새석은  최고의  길격(吉格)으로 왕권을

상징한다. 이후 조선왕실의 대통은 세조와 정희왕후 혈손으로 이어졌다.

 

 

1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8>예종원비 장순왕후 공릉

17 짧은 생애조선왕릉 가장 단순 / 2010.03.26

 

 

 

세자빈 신분으로 승하해 능역 조영물이 초라한 장순왕후의 공릉. 단릉으로 한명회의 셋째 딸이며

예종비가 되기 전인 17세에 요절했다.

 

     공릉 정자각 앞의 홍살문. 속세와 능역을 가르는 상징문으로 잡귀의 범접을 막는 역할을 하며

홍전문이라고도 한다.

  세상은 남자가 움직이는데 세상을  움직이는  그 남자는 여자가  움직인다고 했다.   특히 남성

전횡의 시대였던 조선왕조에는 이 말이 더욱 적중했다. 낮은 벼슬아치가 고위직 관료를 직접 만날

수 없을 때 ‘안방마님’이나 ‘그의 여인’을 통해 뜻한 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곤 했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베갯잇 송사’라 해 의기 투합하거나  뇌물만  적절히 공여하면 일이 잘  되는 건 맡아 놓은

당상이었다.

 조선왕조 27대왕 519년 역사를 통해 초기에 속하는 단종→ 세조→ 덕종(추존)→ 예종→ 성종→

연산군 시대의 왕실 여인들만큼 치열하고 처절한 삶도 없었다. 불과 40여 년의 통치 기간에 조선

전사(全史)가 투영될 만큼 온갖 권모와 결탁이 포개져 있기 때문이다. 여섯 명의 임금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왕위에 오르기 전 남편이 죽고  설상가상으로 반정까지 일어나  ‘왕의 여자’들의 한숨과

굴곡진 삶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4대 독비 인과관계 난마같이 얽혀

  이 모두가  재위  기간이 짧거나 임금이 단명하는 데서 비롯된다.   성종시대 이후는 그때 가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정순왕후(단종), 정희왕후(세조),  인수대비(덕종),  안순왕후(예종 계비)

인생 역정을 약술하고자 한다.   왕실의 ‘4대 독비(獨妃)’ 얘기로 모두가 동시대를 살면서 난마같이

얽힌 인과관계가 한맺힌 이슬로 응어리져 있다.

 왕실의 4대 독거왕비가 태어나게 된 배경은 이렇다.  어린  장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숙부

세조는 왕위를 빼앗고 죽여 버려 정순왕후(여산 송씨·1440~1521)를 어린 생과부로 만들었다.

세조는 장남 의경세자(덕종)를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20세로 요절하니 인수대비(청주 한씨·1437~

1504)가 홀로 됐다.

  세조는  둘째 아들(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당시 최고 권력가였던 한명회의 셋째 딸을 세자빈

 으로  맞았는데  그가  바로  추존된  장순왕후(청주 한씨·1445~1461).  장순(章順)왕후는  아들

인성대군을 낳았는데 산후병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7세 되던 해 모자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다시 간택한 왕비가 안순왕후(청주 한씨·1445~1498)인데 이번에는 예종이 일찍 죽어 역시

혼자가 됐다.

  부모로서  차마  겪지  못할  참혹한 꼴을 당한 세조마저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재위 13 3개월

만에 승하하니 정희왕후(1418~1483)도 독거 신세가 됐다.  이 모두가 18년 만에 생긴 왕실 내명부

(內命婦)의 변고였다.  이때 왕실의  최고 어른은 당연히 정희왕후였다. 왕실에 과부가 넷이다 보니

네 여인의 감정은 미묘하게 흘렀다.

  이때  정순왕후(단종왕비)  동대문  성 밖  정업원에서  홀로  연명하며 한많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인연을 잘못 만나 임금이던 남편을 잃고 친정 가문마저 멸문지화를 당한 판에 무슨 희망이

있었고  낙을  바랐겠는가.  매일  새벽  뒷산  동망봉에  올라  먼저 간 단종을 그리며 통곡하는 게

일과였다.   다만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시숙부(세조)의 집안 돼 가는 꼴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

이었다.   무섭고도  섬뜩한  일이었다.  생몰연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정순왕후는 82세라는

기록적인  장수를  했다.   조정에서도  후환이  염려스럽긴  했으나  대를  이을  자식도 없고 대항

세력권에서도 벗어나 천수를 누리도록 내버려 뒀다.

 누구보다도 속이 뒤집어진 건 인수대비였다. 친정아버지 한확이 세조 등극에 공이 커 조정에서는

그녀를 무시 못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남편이 일찍 죽어 사가(私家)에 나가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들  (월산대군·자을산군)  있었지만  왕위는 이미 시동생(예종)에게 넘어가 젊은 나이에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뒤였다.

  다행스러운  건 조정의  실세 한명회의  넷째  (후일 성종원비  공혜왕후·1456~1474)  둘째

며느리여서 큰 위안이었다. 당대의 최고 권세가 한명회도 셋째 딸이 예종 원비였다가 일찍 죽은 게

한이어서  인수대비와  사위되는  자을산군에  대한 예우와 보살핌이 극진했다.   여기에는 또 다른

태산을 움직이려는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큰 뜻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 인순왕후 위상·영향력 급격히 추락

  반면 안순왕후  처지는 딱했다.  아버지  한백륜이  우의정으로 명문가 청주 한씨 출신이었으나

한명회의 세력을  덮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남편 예종이 장수만 했어도 어린 남매(제안대군·현숙

공주)  있어  앞날이  보장됐으나 즉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뜨니 왕실 내에서의 위상과 영향력은

급격히 추락했다.

  여자로서  더더욱  참기 어려운 건 손위 동서 인수대비의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사가에 있을

 때는 자신더러 중전마마라 했는데 자을산군이 왕이 되면서 갑자기 대비마마가 돼 버린 것이다.

 자신은 뒷전이고 시어머니 정희왕후와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상전 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었다.  남편(세조)  덕에  출세한 조정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돈수백배했고 어린 왕의 수렴청정을 하면서도 그녀의 말 한마디는 곧 어명이었다.   조정

을 장악하고 있는 한명회의 두 딸을 이미 며느리와 손자 며느리로 맞아들여 권력의 누수는 염려 안

해도 됐다. 외손자가 왕이 될 판인데 딴 맘 먹을 자 그 누구이겠는가.

13세 자을산군 등극 성종시대 열어

  병약했던 예종이 승하하자 정희왕후는 한명회를 불러 상의했다.  종묘사직의  후사를  결정짓는

중대사였다.  이때  인수대비의  장남 월산대군은  16세였으나 소양공 박중선의 딸(순헌 박씨)한테

장가를 가 처가 덕은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여기서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술수가 결탁으로 맞아떨어졌다.  두 사람은 흔들림 없는

왕권 유지를  위해 13세의  자을산군을 그날로  등극시키니 바로 성종이다.  조선왕조를 통해 왕이

승하한 날 차기 왕으로 등극한 건 성종이 처음이다. 인수대비 입장에선 누가 왕이 되더라도 자신의

소생임은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시름을  마다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이가 장순왕후다.  비록 대통을 이어야 한다는

친정아버지 꿈을 못 이뤘지만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4-1에 세자빈의 예로 장사 지냈다.

능호는 공릉(恭陵)으로 홀로 모셔진 단릉(單陵)이며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다수의 석물이 생략됐다.

  후일 친동생이면서 조카 며느리 촌수가 되는 공혜왕후(성종원비)의 순릉과 제21대 영조의 장남

진종(추존)  효순왕후의  영릉이  조성되면서  공순영릉  또는  파주삼릉으로 불리고 있다.  사적

205호로  벽제화장터에서  문산  방향으로  가는  도중  오른쪽의  이정표를 유심히 살펴야 바로

찾아갈 수 있다.

  홍살문  앞의  금천교 (禁川橋·왕릉과  속계를  가르는  풍수상의  물길)   지나 능상에 오르니

술좌(戌坐)진향(辰向)의 동남향으로 당대의 국풍(國風)이 잡은 자리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릉은  장순왕후의  짧은  생애와  함께 별다른 행적이 없어 조선왕릉 40기 중 가장 단순한 능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녀의  요절이 가져다 준 왕실대통의 지각변동은 한 인간으로서의 몫도

무시하지 못 한다는 측면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바가 크다.

 

 

11.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9>성종원비 공혜왕후 순릉

가문의 영화 덧없고 부귀공명이 낙화유수 같네 / 2010.04.16

 

 

 

 한명회의 넷째 딸 공혜왕후 순릉. 영의정 한명회는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냈으나 모두

스무 살도 안 돼 요절했다.

 

 순릉 앞의 배위(拜位). 능침에 오르기 전 임금과 신하들이 절하던 곳이다.

   자식 앞에 장사 없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천하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거머쥔들 낳아

기른 자식의 죽음 앞에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산해진미가 입에 당길 것이며 무슨 말의 위로가

귀에  들어오겠는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자리에  있는  영의정  한명회

(1415~1487)도 그러했다.

 “왕비마마, 억지로라도 수라를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이 나라 종묘사직의 앞날이

마마께 달렸사온데 어서 툭툭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성종  8(1474) 4,  이때  한명회와  부인 민씨는  벌써 몇 달째 대궐 안 구현전(求賢殿)에서

넷째 딸이며 성종 원비인 공혜왕후를 병구완하고 있었다.

 “어머님, 단 물이 소태보다 더 써서 못 넘기겠습니다. 아무래도 일어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공혜왕후 한씨가 친정어머니  민씨를  힘없이 바라보며 겨우 대답했다.   그리고는 눈을 슬며시

내리감았다.   민씨 부인이 기겁하고 깜짝 놀라 남편 한명회를 찾았다. 뒤이어 시할머니 정희왕후

(세조비)  시어머니  인수대비(추존 덕종비),  시숙모  안순왕후(예종 계비) 삼전(三殿)이 황급히

달려왔다. 겨우 눈을 다시 뜬 공혜왕후가 말을 이었다.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나  단지 한스러운 것은 삼전의 기대를 저버려 끝까지 효도를

못하고 부모님께 근심을 끼쳐 송구할 뿐이옵니다.” 마지막 유언이었다.

○ 한명회 두 딸 왕후 스무 살도 안돼 요절

 한명회는 땅을 치며 앙천통곡했다.  이 무슨 인간이 감당 못할 끔찍한 재앙이란 말인가. 일찍이

예종 원비로  시집 보낸 셋째 딸  장순왕후도 17세로 죽었는데  이번에는  19세의 넷째 딸을 잃은

것이다.  14년 만에 두 딸을 앞세우는 참척(慘慽)이 두렵기도 했지만, 겉으로는 의연했다.  각혈할

것 같은 불행한 남의 가족사를 자칫 계유정난(세조의 왕위 찬탈) 당시  ‘살생부 주살사건’과  연결

시킬까 봐서였다.   비록 자신의 외손으로 왕통을 잇는 대망이 무산되긴 했지만,   권력은 여전히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역사의 전개는 한명회 편으로 기울지 않았다.

 세상 인심이란  참으로 냉혹하고  비정한 법이다.   살아생전엔  그 사람 없이 안 될 성싶다가도

죽고 나면 곧 잊히고 마는 게 인지상정이다. 의로운 한 사람의 죽음이 나라 발전의 동력 요인으로

작용하는가 하면,  지탄받는  자의 장수가 역사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부상되기도 한다.   권력의

정상에서야 천하가 내 것일 듯싶지만, 태양이 하루 종일 중천에 떠 있는 것은 아니다.

 왕조시대 국모는 내명부의 지존으로 한시도 비워둘 수 없는 자리다. 수렴청정 중이던 정희왕후

는 숙의로 있던 후궁 파평 윤씨를 계비로 앉혔다. 성종은 후사 없이 떠난 공혜왕후를 잊고 미색이

출중한 윤씨에 빠져들어 세자를 낳으니 곧  연산군이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된 성종은

점차 장성하면서 후궁들을 끼고 살았다. 자신 이외에도 열 명의 후궁을 더 두게 되자 계비 윤씨의

눈에서는 생불이 났다.

  그러나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대비의 생각은 달랐다.   세조 이래 왕자가

귀하고 일찍 죽는 데에 근심이 태산 같았던 것이다.   조정 벼슬아치들의 양갓집 규수를 골라 후궁

으로 들였다. 대신들은 혼기 찬 여식들을 두고 고심했지만 싫은 내색도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곱게  키운  딸을  임금  첩으로  보내는 게 안타까울뿐더러 자칫하면 가문이 몰락하는 멸문지화의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계비 윤씨는 세조가 왕위에 늦게 올라 후궁(근빈 박씨)이 하나밖에 없는 연유로 시할머니가 자기

마음을 모르고, 시어머니는 남편(추존 덕종)이 일찍 죽어 첩 꼴을 안 당해 봐 남의 일로 생각한다고

여겼다.   남편 시앗 꼴은  못 봐 도 아들 시앗은  눈 감아 준다고 했다.   왕실 대권을 쥔 두 과부와

질투심에 불타는  윤씨와의  반목은  곧 내명부의 지각 변동으로 비화됐다.   윤씨는 성종을 보기만

하면 볶아댔고 마침내는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깊은 상처를 내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계비 윤씨는 폐비가 돼 끝내는 사약을 받아 죽고 또 다른 숙의 윤씨(정현왕후)

가 연산군을 키웠다.   성종은 연산군을  왕재로 안 봤으나  승하 당시 장성한 왕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이어받게 한다. 이로 인한 무수한 인명 살상과 학정의 피폐는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다.

○ 공혜왕후 죽음으로 왕실 내명부 물갈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권력을 한 손에 잡고 쥐락펴락했던 천하의 한명회도 죽은 뒤 견딜 수

없는 능욕을 당하고 만다.   윤씨의 폐비  사건에 가담했다 하여  연산군한테 부관참시(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라는  극형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중종 때 신원이 되긴 하지만

당시 후손들이  당했을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공혜왕후의  요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역사는  애달파지고 마는  것이다.   나라에 큰 일  하려는  지도자나 인재들에겐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바 적지 않다.

  이런저런  시름을  마다한  채 공혜왕후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 4-1 순릉(順陵)

안장돼 있다. 사적 205호로 12세 위 친언니이자 시숙모가 되는 장순왕후(예종 원비)의 공릉과 추존

진종(영조의 장남)의 영릉이 있어 공순영릉, 또는 파주 삼릉으로도 불린다.   남편인 성종(선릉)과는

멀리 떨어져 외롭겠지만, 오른쪽 언덕에 언니가 가까이 있어 위안이 될 것이란 생각은 산 사람들의

정서일 것이다.

  왕릉 풍수에 조예를  쌓으려면 당시의 시대상과 권력 배경에 관통해야 한다.   비록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20세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죽어 불쌍할 것 같지만 두 왕후의 친정 아버지는 나는 새도

단박에 떨어뜨린다는  권세가 한명회였다.  당대 일류 신풍(神風)들이  알아서 설설 기며 천하제일

명당 터를 골랐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래서 역사와 풍수는 동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도  신분이 있다.  공혜왕후는 성종이  등극한 후 왕비 신분으로 승하해 난간석과

문·무인석 등 조형물이 완벽히 갖춰져 있다. 묘좌유향의 정동향으로 능 뒤의 꿈틀대는 입수 용맥은

물론 능 앞을 감아 도는 물길 모두 누가 봐도 길지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언니는 세자빈 신분으로

죽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능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세자빈으로 죽은 딸의 무덤을 왕릉으로 꾸미

는 월권은 당시 한명회로서도 어쩔 수 없는 왕실과 사회의 규범이었던 것이다.

`한씨 왕비시대' `윤씨 왕비시대'로 교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대의 역사를  후대의 판단으로 교정하거나 새로운 정의를 내리려 함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이를테면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의 폐위가 부당하다 하여 지금에 와 복위

시킨들 역사적 정당성과 가치를 누가 인정하겠느냐는 것이다.

 공혜왕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실 내명부의 물갈이로 반전되면서 또 다른 골육상쟁을 불러와

요동치게 된다. 지금까지 청주 한씨가 독점해 오던 ‘한씨 왕비시대’가 끝나고 ‘파평 윤씨 왕비시대’

로 교체되면서 조정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만다.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정현왕후

(중종 생모),  장경왕후(인종 생모),  문정왕후(명종 생모)가 내명부를 휘저으며 조선 중기의 역사는

도탄에 빠지고 만다. 이들 모두가 파평 윤씨다.

 

 

12.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10>추존 덕종대왕과 경릉

`좌상우하(左上右下)' 남녀 위치 뒤바뀐 조선 왕릉 / 2010.03.12

 

 

 

남좌여우의 매장 위치가 뒤바뀐 조선 최초의 왕릉 경릉서오릉 내에 있으며 보이는 오른쪽이 추존

덕종이고 왼쪽이 인수대비다.

 

 

 

  승하 당시 세자 신분이어서 난간석조차 없이 초라한 덕종릉. 인수대비는 왕비여서 모든 석물이

조영돼 있다.

세조의 맏아들 장(·14381457)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착했다.   할아버지(세종대왕)한테

현동(賢同)이라는  아명을 하사받고  일곱 살 때는  정의대부(正義大夫·조정에서  종친에게 내리는

2품 벼슬)에 제수되면서  도원군(桃源君)으로 책봉됐다.   신중한 성격으로  학문에 몰두해 왕실

어른들은 물론 성균관 스승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다.   특히 해서체에  뛰어나 주위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타고난 체질이 허약해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잔병치레까지 잦은

것이었다.

  도원군  성장기의  나라 안도  태평이었다.   할아버지가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은  편안했고,

큰아버지(문종)는 차기 임금으로 군왕 수업에 열중이었다.   세 살 아래의 사촌동생 홍위(弘暐·단종

14411457)와도 친한 사이였다. 일찌감치 차차기 임금인 세손(世孫)으로 정해져 부럽기는 했지만,

가끔 궁궐에 들어가면 안부도 물으면서 세상 얘기를 나누곤 했다. 다만 큰어머니(현덕왕후)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불쌍하게 생각됐다.

○ 세조 왕위찬탈하며 세자로 책봉

 도원군 나이 13세 때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겼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아버지가 임금이 됐다.

원래 몸이 약했던 큰아버지마저 2 4개월 만에 돌아가시더니 사촌동생 홍위가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도원군  집에는  한명회·권남·홍윤성·양정 등  많은  사람이  몰려와  밤늦게까지 심각한

논의를 하다가 돌아갔다.   어머니  윤씨(정희왕후)의 입단속과 표정으로 보아 급박한 정국 상황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16세 되던 해에는 나라에 더 큰 변고가 생겼다. 아버지(세조)가 김종서·황보인 등 조정 대신들을

죽이고(계유정난) 병조판서(현 국방부장관)를 겸한 영의정이 된 것이다. 모든 권력은 아버지 휘하로

장악됐다.  2년 뒤인  18(1455) 때에는  사촌동생(단종)  임금 자리를  내놓아 마침내 아버지가

왕위에 올랐다. 그해 7월에는 의경(懿敬)세자로 책봉되면서 차기 임금으로 대통을 잇게 됐다.

 그런데 가슴 벅차고 행복해야 할 의경세자의 나날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궁중의 보살핌 속에

엄격히 행해지는 세자 수업이 고역이었다.   잠시 눈만 감으면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 청령포로

귀양 간 사촌동생 홍위가 어른거렸다.  때로는 인간으로 차마 상상도 못할 고문 끝에 죽어 간 조정

대신들이 내지르는 고함이 귓전을 맴돌기도 했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큰어머니(현덕왕후)  꿈에 나타나 자꾸 어딘가를 함께 가자고 앞장서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엔 인자한 모습으로 구름  위를 함께  나는가 하면,  난데없는 낮 꿈엔 소름

끼치는 흉한 몰골로 나타나 “세자 자리를 내놓으라”고도 했다.   이럴 때마다 의경세자는 헛소리를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 깼고 의관은 식은땀에 젖어 쥐어짤 정도였다.

  참다 못한 세자가 부왕  세조에게  상의하니  아버지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어머니 정희왕후도

힘들어했다.  동생  해양대군(예종)  그러했다.  여동생 의숙공주도 편할 리가 없었다.  온 가족이

혼령에 시달림을 보다 못한 세조가 동구릉에 형님(현릉)과 합장돼 있는 형수 유골만을 파내 냇가에

묻어 버렸다. 그렇다고 세조의 가족이 현덕왕후의 영적인 괴롭힘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 한여름 감기 도져  20세 요절 

 마침내 세자는 병이 들었다.   20세 되던 해 7월 한여름에  우연히 걸린  감기가 도져 병세가 심각

해졌다.  8월 동궁(東宮·세자가 거처하는 궁궐 내의 집)에서  나와 세조의 옛 집으로 옮기고 어의의

진맥과  탕제로  정양을 받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세조는 영산재(靈山齋·산  사람의 명을 비는

불교의식)에 능한 21명의 승려를 경회루로 불러 지성공양을 드리게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자는 다음달인 9 2일 죽고 말았다. 이 같은 의경세자의 짧은 20년 생애는 사실(史實)에 기록된

바다.

  세조와  정희왕후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화사  최경과  안귀생을 불러 죽기 전에 그려 놓은

의경세자 초상화를 보며 하늘을 원망했다. 정무와 저자(시장) 5일이나 파하고 수라상을 거르면서

30일을 소복으로 지냈다. 그러나 민심은 이와 달랐다. 모두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무고한 신하들

을 죽인 업보라고 여겼다.

  왕위에 오르지 못해 임금이  안 된 의경세자가  덕종대왕이 된 까닭은 무엇인가.   왕조시대에는

비록  자신은  즉위를  못하고  죽었으나  아들이  임금이 되면 사후에 추존해 묘호(廟號)를 올리고

종묘에 배향했다.   조선 왕조에는  추존대왕이 모두 넷이 있는데 덕종(9대 성종의 생부)과 함께

원종(16대 인조의 생부), 진종(22대 정조의 계부), 장조(사도세자·제22대 정조의 생부)이다.

 의경세자의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산30-1 서오릉(사적 제198)에 대군묘 제도인 원()

으로 조성됐다. 이후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세자빈 소혜왕후와 함께 덕종으로

추존돼 원이 경릉(敬陵)으로 승격(1471)됐다.

 덕종은 소혜왕후 청주 한씨와의 사이에 2 1녀를 뒀다. 이 소혜왕후가 바로 예종→성종→연산군

3대 왕에 걸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인수대비다. 인수(仁粹)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

서 어머니에게 지어  올린 휘호다.   덕종보다 한 살(1437) 위였으며 경문에 조예가 깊어 범어·한문·

국문의 3자 체로 불경을 짓기도 했다.

○ 한 영역에 두 능선 택한 동원이강릉

  인수대비의  친정아버지  좌의정 한확(14031456)은 더욱 범상찮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그의

누이(인수대비 고모)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여비(麗妃)로 간택돼 조선 조정의 ‘명나라 통’으로 양국

간 외교마찰이 있을 때마다  무난히 해결했다.  세조는 이런 한확과 사돈을 맺었던 것이다.  세조가

등극하자 주청사(중국에 보냈던 사신)로 명나라에 가 왕위 찬탈이 아닌 양위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윤허를 받고 귀국했다.

  경릉도 한 영역에 두 능선을 택해 각각 안장한 동원이강릉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능 앞의

홍살문을  들어선 참배객들 간  논란이 분분하다.   덕종릉이  오른쪽에 있고 인수대비릉이 왼쪽에

있어서다. 이른바 좌상(左上·남자가)우하(右下·여자가 아래)의 배치 위치다. 남좌(男左)여우(女右)

라고도 하는 이 문제는 풍수들의 간산 길에서도 논쟁의 불씨가 된다.

 묘지의 방향 설정은 망자(亡者)의 위치에서 판정하는 것이 예법이다. 남자의 왼쪽에 여자가 있는

것이 남좌여우다.  그러나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반대다.  예를 들어 조부모의 산소 앞에 섰을 경우

왼쪽이 할아버지이고 오른쪽이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반대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망자와 산운

이 어긋나거나 풍수 물형의 혈()이 겹칠 때는 부우( ) 또는 부좌( )라고 비석에 표기돼 있어

유심히 살펴야 한다.

  간좌곤향(서남향)  덕종릉에는  병풍석은  물론 난간석도  없는 세자릉  그대로이나 계좌정향

(남에서 서로 15도 기운 남향)의 인수대비릉은 왕릉 규모를 빠짐없이 갖췄다.   인수대비는 왕비의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덕종릉은 왕으로 추존(追尊)되면서도 왕릉 석물에는 손을 못 댔다.

 인수대비가 내린 사약을 받고 폐비 윤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며 생모 윤씨

묘를 왕릉으로 꾸몄다.  그러나 연산군의 패역으로 폐위되면서 다시 묘로 전락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잘 둬야 부모가 대접받는 세상이다. 역사는 이토록 준엄한 것이다.

 

13.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0>폐주 연산군 <>

기생들에 흥청·계평 직급…`흥청망청' 유래 / 2010.04.30

 

 

 

서울 도봉구에 있는 연산군 묘역. 의정궁주(가운데)  딸·사위(맨 앞) 묘도 함께 있다.

 

 

 

경기 고양시 서삼릉 내에 있는 폐비 윤씨의 회묘. 왕릉 격식을 갖추고 있으나 아들 연산군의 폐위로

능에서 묘로 격하된 뒤 묘비조차  없다.

인구에 회자되는 저명인사나 유명인을 만나게 될 때는 흉금의 설렘과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세상을 떠난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러  능이나 묘에 갈 때도 미묘한 심사와 감회가 엇갈리긴 마찬

가지다.   때로는 망자(亡者)와의 상봉을  기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막행막식(莫行莫食)하며

제멋대로 인명을 살상한 인간 백정들 앞에 서면 섬뜩해지기까지 한다.

○ 좌청룡 우백호 局勢 멀어 후손들 고독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사적 제362호로  지정된  연산군 묘를  취재하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도 악명 높은 임금이어서 사지(死地) 구덩이에 매장했을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14301(4326)의 봉긋한 혈장(穴場) 3대를 적선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자좌오향의  정남향

이다.  다만 묘혈을 휘감은  좌청룡과 우백호의 국세(局勢)가 멀어 후손들이 고독을 면키는 어렵겠

으나 이만한 자리도 과분하다 싶다.

  연산군 묘의 내력을 추적하다  보면 뜻밖에도 왕실 혼인과 권력과의 연결고리가 극명하게 드러

난다. 이곳에는 의정궁주(宮主) 조씨와 연산군의 딸과 사위(구문경)까지 다섯 기의 묘가 있다.

조씨는 세종 4(1422) 뒤늦게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됐다. 그해 태종이 훙서하자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 작호를 받은 뒤 쓸쓸하게 죽었다. 효자였던 세종대왕은 이 지역을 넷째 왕자 임영대군

의 사패지로 내리고 조씨를 봉사(奉祀)토록 왕명을 내렸다.

 임영대군은 딸을 영의정 신승선에게 시집보냈다. 신승선의 딸이 바로 연산군의 부인이다. 따라서

폐비 거창 신씨(愼氏)는 임영대군의 외손녀가 된다.   신승선은 또 아들 신수근(좌의정)의 딸을 진성

대군에게 시집보냈다. 후일 중종으로 등극하는 진성대군은 이복 형인 연산군을 처 고모부로 불렀다.

 1506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되고 강화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로 쫓겨 가

위리안치됐다. 사방을 가시 울타리로 둘러치고 외부 출입과 사람 접촉을 엄금하는 게 위리안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어제까지의  임금이 얼마를 견딜 수 있는 생활이었겠는가.  음식과

예우는  차치하고라도  주변의  부릅뜬  눈과  손가락질로  연산군은 무너져 갔다.   가슴속에서는

용암보다 더 뜨거운 불덩이가 치솟았고 눈만 감으면 끔찍한 괴물들이 쫓아다녔다. 연산군은 석 달

만에 죽었다.

  조정에서는 혹이 떨어져 나간 격이었다.  유배지 주위에 시신을 묻고 잔정이라도 들까 봐 잡인

출입마저  금지시켰다.  세월이  흐른  7년 후. 사가에서  모진  목숨  연명하던  폐비 신씨가 이복

시동생이자 친정 조카  사위되는  새 임금 중종에게 눈물로 간언했다.  “자식도 다 죽고 연고조차

없어졌으니 유골이라도 가까이 있게 해 달라”고. 이런 연유로 연산군은 처 외가 땅으로 이장하게

됐다. 매년 4 2일 연산군 숭모회서 제향을 올린다.

○ 폐비 윤씨 회묘 정자각커녕 비석도 없어

  며칠 후 필자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의 서삼릉을 찾았다.  희릉(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효릉(12대 인종)·예릉(25대 철종)  세 능이  궁궐의 서쪽에 있다고 해 서삼릉이라

일컫는다. 이곳에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묻힌 회묘(懷墓)가 있다. 지금은 농협 산하 젖소개량

사업소가  점유하고  있어  학술연구나  언론 취재 목적이  아니고서는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비공개 지역이다.

  회묘에 가서는 두 번 놀란다.  조선 역대  어느 왕릉  못지않은  규모의 ‘왕릉’이 ‘묘’라는 사실과

이런 ‘능’ 앞에 정자각은커녕 사가  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비석조차 없다는 것이다.  근무자의

안내 없이는 ‘희한한 능’ 쯤으로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 모두가 자식을 잘못 둔 탓이다. 폐비 윤씨와

연산군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성종이  여러 후궁을  두고 자신을  멀리하자 윤씨는 임금의 용안을 손톱으로 긁어 깊은 상처를

냈다.  왕손의 번성이 곧 종묘사직의 번창이었던 왕실  법도였다.  마땅히  왕비는  군왕의  바람을

탓하지 않으며 참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일로 윤씨는 폐비돼 서인이 된 후 사약받아 죽었다.

  생모의  분사(憤死)  뒤늦게  안 연산군은  어머니  잘못은  생각  않고  극악무도한 살인마로

돌변했다.  사람을  죽여도  그냥  죽이질  않았다.  필설로  옮기기조차  끔찍한 포락(단근질하기),

착흉(가슴 빠개기), 촌참(寸斬·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飄風·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이

그의 사형 수단이었다. 모두가 연산군일기 첫머리 사평(史評)에 있는 기록들이다.

  이런 연산군도 어머니를 추모하는 모정은 눈물겨웠다.  성종이 내린 ‘회묘’란 묘명을 회릉(懷陵)

으로  격상시키고  유좌묘향의  정동향인  회룡고조혈에  천장했다.  그때  조성해  놓은 석물들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덧없는  한때의  영화는  순간의  포말(泡沫)로 스러지는

법이다.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능은 다시 묘로 격하됐다.

 연산군은 문장에 능했다. 일기에 전하는 시만 해도 130여 수나 된다. 한번은 어머니 묘에 다녀와

이런 시를 지었다.

 어제 효사묘에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 술 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건만 /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

  충신  열보다  간신 한 명이  나을 때가  있다고  했다.  무오사화(1498) 선비들의  기를 꺾고

갑자사화(1504)  충신들을  제거해  버린  연산군은  기고만장했다.   간신  임사홍과  그의 아들

임숭재를 채홍사(採紅使)와 채홍준사(採紅駿使)로 삼아 전국의 처녀들과 좋은 말들을 징발했다.

각 도에  운평(運平)이란  기생  양성소를  두고  용모와  재예가 뛰어난 기생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국비로 먹이고 입히며 화장품까지 대줬다.

 연산군은 새로운 명칭과 이름도 잘 지었다. 이들 기생들을 흥청(興淸)·계평(繼平)·속홍(續紅)으로

나눠 직급을 정한 뒤 왕과 동침한 기생은 천과(天科)흥청,  왕을 가까이 모신 기생에겐 지과(地科)

흥청, 흥청의 보증인에겐 호화첨춘(護花添春)이란 직위를 부여했다.  돈을  절제 없이 함부로 쓰며

흥청거리는 걸  ‘흥청망청’이라 하는데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기생 흥청이  나라를  망하게  했던

것이다.

○ 조선 첫 쿠데타 `중종반정'으로 폭정 종식

 연산군은 이것으로도 충족이 안 돼 얼굴 반반한 여염집 규수를 끌어다 무차별 겁탈하고 친족들

과 상간도 서슴지 않았다.  큰아버지 되는 월산대군 집 여종 장녹수를 궁으로 불러들여 놀아난 뒤

인사권을 내주고 끝 날에는 큰어머니 순헌 박씨를 억지로 겁간했다.   사냥놀이를 위해 양주·파주·

고양 등의 100리 거리 민가를 철거하고 허가 없이 통행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격분한 박씨 동생 박원종이 성희안·유순정·홍경주 등과 모의해 폭정을 종식시킨 게 중종반정이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왕권을  뒤엎은  조선조  최초의  쿠데타  사건이다.  잘못된  권력이 바로

잡히려면  무고한  희생이  수반되는  게 역사다.  이 반정으로  희생된  인명들을 논하자면 역사는

또다시 비참해지고 만다.

  때로는 한 사람의  행보가  역사의 지평을 돌려 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후 거창 신씨 문중은

임사홍과  함께 멸문지화를  당했고 명문거족의  꿈을 접어야  했다.   모두가 사위 하나 잘못 얻은

업보의 산물이다. 붉은 옷에 찢어진 갓을 쓰고 앉아 있는 연산군 가마가 김포를 지날 때다.

길가에서 줄지어 구경하던 촌로와 학동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그 가마에서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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