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중 가장 아름다운 광릉 숲. 조영 당시부터 뛰어난 경관으로 참배객들의 마음을 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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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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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않던 짓’을 하고 착해진다고 했다. 사후의 세계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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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세상을 겁 없이 산 사람도 병들어 신음하다 보면 꿈자리가 사납고 헛것이 보이며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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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숭숭해지기 마련이다. 과연 극락과 연옥, 천당과 지옥은 존재하는 것일까. 양심(兩心·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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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양심(良心·바른 마음)의 사이에서 어떤 마음을 존중하며 살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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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영웅 세조도 말년 들어 부쩍 겁이 많아졌다. 막상 권력의 정상인 임금 자리에 올라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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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데 왜 그리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괴롭기만 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조카(단종)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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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아버지(세종)와 형님(문종)이 아끼던 신하들의 목숨을 너무 많이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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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자비한 도륙 원각사 지어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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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 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고 독수리보다 더 용맹스러웠다는 증조할아버지(태조고 황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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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우러를 것이며, 불 같은 성품의 할아버지(태종) 앞에 어찌 조아리고 나서겠는가. 세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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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지어 참회하기로 했다. 옛 고려 때 절인 흥복사 터에 어명으로 새 절을 창건케 한
뒤 원각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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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고 탑과 비를 세웠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안에 있는 오늘날의 원각사지(址)로 10층 석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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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호로, 비(碑)는 보물 3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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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치도(治道) 이념으로 내세워 건국한 당시의 조선 국왕이 성안에 절을 짓는다는 건 혁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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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이었다. 집현전과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그래도 세조는 강행했다. 그 후 세조의 증손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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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망주(亡主) 연산군이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방으로 만들어 기생들을 농락하고, 역시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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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때에는 절마저 헐어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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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둘째 왕자로 태어난 세조(1417~1468)는
저승에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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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을 듣는 임금이다. 조카 왕위찬탈, 잔혹한
사육신 도륙, 무력 강압 통치의 일인자라는 수식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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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서한 지 540여
년이 지나도록
붙어 다닌다.
세조가 다시 태어나
그 같은 입장에 또다시 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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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면 이 같은 역사적 원망과 저주를 각오하고라도 다시 왕위에 오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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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종과 단종시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자세히 탐구해 온 사학자들은
세조가 일으킨 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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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1453)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병약한 문종이 승하하며 의정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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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인 김종서·황보인 등에게 유언으로 단종을 부탁했는데 이들의 권력 독점이 지나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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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집현전 학자 정인지·최항·신숙주 등과 후일
사육신이 돼 죽는 성삼문·하위지까지 정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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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을 지켰거나 세조에게 동조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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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역사는 세조의 편으로 기울었다. 세조의 쿠데타 과정에서 뜻을 달리한 수많은 인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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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고문 끝에
죽었거나 귀양 가고 벼슬에서 떨어졌다.
친동생 둘(안평·금성대군)과
계모 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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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씨(세종 후궁)와 그의 아들인 이복동생(한남군·영풍군)도 목숨을 잃었다. 이 모든 것이 병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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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약해져 가는 세조에게는 큰 고통이었고 후회스러운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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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부병 완치 부처 은혜 감동 대장경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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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여름 세조는 강원도 평창 상원사 문수보살이 용하다 하여 그곳을 찾았다. 땀에 찬 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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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微服·임금이 몰래 민정을 살피러 다닐 때 입는 옷)을 벗어 놓고 절 입구 우물에서 등목하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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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였다. 난데없이
어린 동자 하나가 나타나 등을 밀어주었다.
손길이 어찌나 곱고 시원한지 기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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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동자에게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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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야, 너는 어디 가서 임금의 등을 보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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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동자가 등과 목을 골고루 문지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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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는 절대로 문수 동자를 친견했다고 발설해서는 아니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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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세조의 피부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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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저주하며 침을 뱉은 이후 피가 나도록 긁어도 낫지 않는 고질 피부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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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세조의 피부병을
낫게 한 그 우물은 지금도 상원사 입구에 있다.
대장경을 인쇄하고 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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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감을 설치해 금강경언해를 간행한 그의 치적도 불은(佛恩)에 감동한 마음의 시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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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그가 사는 52년 동안 한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영광과 불행은 빠짐없이 경험했다.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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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분으로 태어나 정권의 실세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좌절도 맛보았고 임금이
돼 천하 권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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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고 흔들었다. 세자로
책봉한 아들(의경세자)이 죽었을 때 하늘을 우러러 원망했고
둘째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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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왕비·한명회의 딸)와 손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땅을 치기도 했다. 까닭을 알 수 없이 겹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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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의 불행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의 철권정치는 조정을 더욱 숨 막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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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14년간 경국대전 편찬 등 큰 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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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14년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군제개혁을 통한 국방력 강화, 호패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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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시, 백성을 위한 토지개혁제인 직전제 실시, 경국대전 편찬 등의 업적이 대의명분을 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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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찬탈에 묻혀 버리고 만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라지만 세조와 안평이 단종시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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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만 보고 있었다면 원로 대신들과 집현전 젊은 학자들 간 치열한 권력 다툼이 어찌 됐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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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자들의 염려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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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해 능 관리를 철저히 당부했다. 능호를 광릉(光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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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고 조선왕조 내내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7번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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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광릉은 사적
제197호로 지정돼 있으며 현재까지도 풀 한 포기, 돌 하나의 채취가 엄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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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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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은 세조왕비 정희(貞熹)왕후와 같은 능선
아래의 다른 언덕에 안장된 동원 이강(同原異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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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제이다. 두 능의
중간지점에 정자각을 세운 조선 최초의 능으로 세조의 유언에 따라 현실(玄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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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시신을 안치하는 석실)을 꾸미지 않고 회격으로 대신했다. 봉분 곁의 병풍석도 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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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석만 두른 조선 능제의 일대 변혁을 광릉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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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허가받아 능상에 오르니 세조 능은 자좌오향의 정남향이고
정희왕후 능은 축좌미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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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향이다. 동일 영역 내에 있으면서도 내룡맥에 따라 이처럼 좌향이 달라지는 게 풍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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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형이다.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권의 번창을 위해 당대 최고의 국풍(國風·왕릉 터를 잡는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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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터를 골랐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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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 뒤 입수(入首) 용맥은 결인(結咽·병목 현상을 이뤄 기를 모았다가 밀어주는 산세)을 잘 이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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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청룡,
우(서)백호, 북현무, 남주작의 사신사가 겹겹인 데다 안산과 조산이 첩첩이다. 여기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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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수(入水)와 파수(破水)의 물길 하나 소홀함 없이 사격(砂格)을
두루 갖췄다. 정희왕후 능 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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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는 큼직한 옥새석이 자리하고 있다. 능 앞의 옥새석은 최고의 길격(吉格)으로 왕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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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한다. 이후 조선왕실의 대통은 세조와 정희왕후 혈손으로 이어졌다.
1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8대>예종원비 장순왕후 공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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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짧은 생애…조선왕릉 중 가장 단순 / 2010.03.26
세자빈 신분으로 승하해 능역 조영물이 초라한 장순왕후의 공릉. 단릉으로 한명회의 셋째 딸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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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비가 되기 전인 17세에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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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 정자각 앞의 홍살문. 속세와 능역을 가르는 상징문으로 잡귀의 범접을 막는 역할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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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전문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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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남자가 움직이는데 세상을
움직이는 그
남자는 여자가 움직인다고 했다. 특히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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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횡의 시대였던 조선왕조에는 이 말이 더욱 적중했다. 낮은 벼슬아치가 고위직 관료를 직접
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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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을 때 ‘안방마님’이나 ‘그의 여인’을 통해 뜻한 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곤 했던 것이다. 이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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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다 ‘베갯잇 송사’라 해 의기 투합하거나 뇌물만 적절히 공여하면 일이 잘 되는 건 맡아 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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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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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27대왕 519년 역사를 통해 초기에
속하는 단종→ 세조→ 덕종(추존)→ 예종→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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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시대의 왕실 여인들만큼 치열하고 처절한 삶도 없었다. 불과 40여 년의 통치 기간에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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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全史)가 투영될 만큼 온갖 권모와 결탁이 포개져 있기 때문이다. 여섯
명의 임금이 교체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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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에서 왕위에 오르기 전 남편이 죽고
설상가상으로 반정까지 일어나 ‘왕의 여자’들의 한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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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진 삶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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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 독비 인과관계 난마같이 얽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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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가 재위 기간이 짧거나 임금이 단명하는 데서
비롯된다. 성종시대 이후는
그때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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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정순왕후(단종), 정희왕후(세조),
인수대비(덕종), 안순왕후(예종 계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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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역정을 약술하고자 한다.
왕실의 ‘4대 독비(獨妃)’ 얘기로 모두가 동시대를 살면서 난마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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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힌 인과관계가 한맺힌 이슬로 응어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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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4대 독거왕비가 태어나게 된 배경은 이렇다. 어린 장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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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왕위를 빼앗고 죽여 버려 정순왕후(여산 송씨·1440~1521)를
어린 생과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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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장남 의경세자(덕종)를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20세로 요절하니 인수대비(청주 한씨·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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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가 홀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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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둘째 아들(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당시 최고 권력가였던 한명회의 셋째
딸을 세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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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맞았는데 그가 바로 추존된 장순왕후(청주 한씨·1445~1461)다. 장순(章順)왕후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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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대군을 낳았는데 산후병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7세 되던 해 모자가 함께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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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간택한 왕비가 안순왕후(청주 한씨·1445~1498)인데
이번에는 예종이 일찍 죽어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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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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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서 차마 겪지 못할 참혹한 꼴을 당한 세조마저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재위 13년 3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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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승하하니 정희왕후(1418~1483)도 독거 신세가 됐다. 이 모두가 18년 만에 생긴 왕실 내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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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命婦)의 변고였다. 이때 왕실의 최고 어른은 당연히 정희왕후였다. 왕실에
과부가 넷이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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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인의 감정은 미묘하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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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정순왕후(단종왕비)는 동대문 성 밖 정업원에서 홀로 연명하며 한많은 여생을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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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인연을 잘못 만나 임금이던 남편을 잃고 친정 가문마저 멸문지화를 당한 판에 무슨
희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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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고 낙을 바랐겠는가. 매일 새벽 뒷산 동망봉에 올라 먼저 간 단종을 그리며 통곡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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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였다. 다만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시숙부(세조)의 집안 돼 가는 꼴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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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무섭고도 섬뜩한 일이었다. 생몰연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정순왕후는 82세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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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인 장수를 했다. 조정에서도 후환이 염려스럽긴 했으나 대를 이을 자식도 없고 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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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권에서도 벗어나 천수를 누리도록 내버려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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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속이 뒤집어진 건 인수대비였다. 친정아버지 한확이 세조 등극에 공이 커 조정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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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무시 못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남편이 일찍 죽어 사가(私家)에 나가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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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둘(월산대군·자을산군)이 있었지만 왕위는 이미 시동생(예종)에게 넘어가 젊은 나이에 뒷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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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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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러운 건
조정의 실세 한명회의 넷째 딸(후일 성종원비 공혜왕후·1456~1474)이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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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여서 큰 위안이었다. 당대의 최고 권세가 한명회도 셋째 딸이 예종 원비였다가 일찍
죽은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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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어서 인수대비와 사위되는 자을산군에 대한 예우와 보살핌이 극진했다. 여기에는 또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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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을 움직이려는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큰 뜻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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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순왕후 위상·영향력 급격히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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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안순왕후 처지는
딱했다. 아버지 한백륜이 우의정으로 명문가 청주 한씨 출신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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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의 세력을 덮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남편
예종이 장수만 했어도 어린 남매(제안대군·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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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가 있어 앞날이 보장됐으나 즉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뜨니 왕실 내에서의 위상과 영향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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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히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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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서 더더욱 참기 어려운 건 손위 동서 인수대비의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사가에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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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자신더러 중전마마라 했는데 자을산군이 왕이 되면서 갑자기 대비마마가 돼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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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뒷전이고 시어머니 정희왕후와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상전 위(位)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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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희왕후는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었다. 남편(세조) 덕에 출세한 조정 대신들이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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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리며 돈수백배했고 어린 왕의 수렴청정을 하면서도 그녀의 말 한마디는 곧 어명이었다.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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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장악하고 있는 한명회의 두 딸을 이미 며느리와 손자 며느리로 맞아들여 권력의 누수는 염려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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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됐다. 외손자가 왕이 될 판인데 딴 맘 먹을 자 그 누구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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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 자을산군 등극 성종시대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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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했던 예종이 승하하자 정희왕후는 한명회를 불러 상의했다. 종묘사직의 후사를 결정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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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사였다. 이때 인수대비의 장남 월산대군은 16세였으나 소양공 박중선의 딸(순헌 박씨)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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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를 가 처가 덕은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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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술수가 결탁으로 맞아떨어졌다. 두 사람은 흔들림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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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유지를 위해 13세의
자을산군을 그날로
등극시키니 바로 성종이다.
조선왕조를 통해 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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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하한 날 차기 왕으로 등극한 건 성종이 처음이다. 인수대비 입장에선 누가 왕이 되더라도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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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임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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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시름을 마다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이가 장순왕후다. 비록 대통을 이어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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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아버지 꿈을 못 이뤘지만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4-1에 세자빈의 예로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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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호는 공릉(恭陵)으로 홀로 모셔진 단릉(單陵)이며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다수의 석물이 생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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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친동생이면서 조카 며느리 촌수가 되는 공혜왕후(성종원비)의 순릉과 제21대 영조의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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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추존)과 효순왕후의 영릉이 조성되면서 공순영릉 또는 파주삼릉으로 불리고 있다.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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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5호로 벽제화장터에서 문산 방향으로 가는 도중 오른쪽의 이정표를 유심히 살펴야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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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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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앞의 금천교 (禁川橋·왕릉과 속계를 가르는 풍수상의 물길) 를 지나 능상에 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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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좌(戌坐)진향(辰向)의 동남향으로 당대의 국풍(國風)이
잡은 자리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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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은 장순왕후의 짧은 생애와 함께 별다른 행적이 없어 조선왕릉
40기 중 가장 단순한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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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녀의 요절이 가져다 준 왕실대통의 지각변동은
한 인간으로서의 몫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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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하지 못 한다는 측면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바가 크다.
11.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9대>성종원비 공혜왕후 순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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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화 덧없고 부귀공명이 낙화유수 같네 / 201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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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의 넷째 딸 공혜왕후 순릉. 영의정 한명회는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냈으나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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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도 안 돼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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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릉 앞의 배위(拜位). 능침에 오르기 전 임금과 신하들이 절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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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앞에 장사 없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천하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거머쥔들 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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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른 자식의 죽음 앞에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산해진미가 입에 당길 것이며 무슨 말의
위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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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들어오겠는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있는 영의정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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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1487)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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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마마, 억지로라도 수라를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이 나라 종묘사직의 앞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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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께 달렸사온데 어서 툭툭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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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8년(1474) 4월,
이때 한명회와 부인 민씨는 벌써 몇 달째 대궐 안 구현전(求賢殿)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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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딸이며 성종 원비인 공혜왕후를 병구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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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단 물이 소태보다 더 써서 못 넘기겠습니다.
아무래도 일어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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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혜왕후 한씨가 친정어머니 민씨를 힘없이 바라보며 겨우 대답했다. 그리고는 눈을 슬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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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감았다. 민씨
부인이 기겁하고 깜짝 놀라 남편 한명회를 찾았다. 뒤이어 시할머니 정희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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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비)와 시어머니 인수대비(추존 덕종비), 시숙모 안순왕후(예종 계비) 삼전(三殿)이 황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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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왔다. 겨우 눈을 다시 뜬 공혜왕후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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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나 단지 한스러운 것은 삼전의 기대를 저버려
끝까지 효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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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부모님께 근심을 끼쳐 송구할 뿐이옵니다.” 마지막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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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회 두 딸 왕후 스무 살도 안돼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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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는 땅을 치며 앙천통곡했다.
이 무슨 인간이 감당 못할 끔찍한 재앙이란 말인가. 일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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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원비로 시집
보낸 셋째 딸 장순왕후도 17세로 죽었는데
이번에는 19세의
넷째 딸을 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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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14년 만에
두 딸을 앞세우는 참척(慘慽)이 두렵기도 했지만, 겉으로는 의연했다. 각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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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같은 불행한 남의 가족사를 자칫 계유정난(세조의 왕위 찬탈) 당시
‘살생부 주살사건’과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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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킬까 봐서였다. 비록
자신의 외손으로 왕통을 잇는 대망이 무산되긴 했지만, 권력은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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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역사의 전개는 한명회 편으로 기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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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인심이란 참으로
냉혹하고 비정한 법이다. 살아생전엔 그 사람 없이 안 될 성싶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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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나면 곧 잊히고 마는 게 인지상정이다. 의로운 한 사람의 죽음이 나라 발전의 동력
요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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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하는가 하면, 지탄받는 자의 장수가 역사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부상되기도 한다. 권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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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야 천하가 내 것일 듯싶지만, 태양이 하루 종일 중천에 떠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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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시대 국모는 내명부의 지존으로 한시도 비워둘 수 없는 자리다. 수렴청정 중이던 정희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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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숙의로 있던 후궁 파평 윤씨를 계비로 앉혔다. 성종은 후사 없이 떠난 공혜왕후를 잊고
미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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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중한 윤씨에 빠져들어 세자를 낳으니 곧
연산군이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된 성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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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장성하면서 후궁들을 끼고 살았다. 자신 이외에도 열 명의 후궁을 더 두게 되자 계비
윤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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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는 생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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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대비의 생각은 달랐다. 세조 이래 왕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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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고 일찍 죽는 데에 근심이 태산 같았던 것이다. 조정 벼슬아치들의 양갓집 규수를 골라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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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들였다. 대신들은 혼기 찬 여식들을 두고 고심했지만 싫은 내색도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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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운 딸을 임금 첩으로 보내는 게 안타까울뿐더러 자칫하면 가문이 몰락하는 멸문지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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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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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비 윤씨는 세조가 왕위에 늦게 올라 후궁(근빈 박씨)이
하나밖에 없는 연유로 시할머니가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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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모르고, 시어머니는 남편(추존 덕종)이 일찍 죽어 첩 꼴을 안 당해 봐 남의 일로 생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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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겼다. 남편 시앗
꼴은 못 봐 도 아들 시앗은 눈 감아 준다고 했다. 왕실 대권을 쥔 두 과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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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심에 불타는 윤씨와의 반목은 곧 내명부의 지각 변동으로 비화됐다. 윤씨는 성종을 보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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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볶아댔고 마침내는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깊은 상처를 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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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인해 계비 윤씨는 폐비가 돼 끝내는 사약을 받아 죽고 또 다른 숙의 윤씨(정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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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연산군을 키웠다. 성종은
연산군을 왕재로 안 봤으나 승하 당시 장성한 왕자가 없어 어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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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왕위를 이어받게 한다. 이로 인한 무수한 인명 살상과 학정의 피폐는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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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혜왕후 죽음으로 왕실 내명부 물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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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권력을 한 손에 잡고 쥐락펴락했던 천하의 한명회도 죽은 뒤
견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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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능욕을 당하고 만다. 윤씨의
폐비 사건에 가담했다 하여 연산군한테 부관참시(관을 파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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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라는 극형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중종 때 신원이 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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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후손들이 당했을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공혜왕후의 요절에서 비롯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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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면 역사는 애달파지고
마는 것이다. 나라에 큰 일 하려는 지도자나 인재들에겐 건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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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바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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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시름을 마다한 채 공혜왕후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 4-1 순릉(順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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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돼 있다. 사적 205호로 12세 위 친언니이자 시숙모가 되는 장순왕후(예종 원비)의 공릉과 추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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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영조의 장남)의 영릉이 있어 공순영릉, 또는 파주 삼릉으로도 불린다. 남편인 성종(선릉)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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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떨어져 외롭겠지만, 오른쪽 언덕에 언니가 가까이 있어 위안이 될 것이란 생각은 산
사람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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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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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풍수에 조예를 쌓으려면
당시의 시대상과 권력 배경에 관통해야 한다.
비록 장순왕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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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혜왕후가 20세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죽어 불쌍할 것 같지만 두 왕후의 친정 아버지는
나는 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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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박에 떨어뜨린다는 권세가
한명회였다. 당대 일류 신풍(神風)들이
알아서 설설 기며 천하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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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터를 골랐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래서 역사와 풍수는 동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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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어서도 신분이
있다. 공혜왕후는 성종이 등극한 후 왕비 신분으로 승하해 난간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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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인석 등 조형물이 완벽히 갖춰져 있다. 묘좌유향의 정동향으로 능 뒤의 꿈틀대는 입수
용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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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능 앞을 감아 도는 물길 모두 누가 봐도 길지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언니는 세자빈 신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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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능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세자빈으로 죽은 딸의 무덤을 왕릉으로
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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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월권은 당시 한명회로서도 어쩔 수 없는 왕실과 사회의 규범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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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씨 왕비시대'서 `윤씨 왕비시대'로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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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대의 역사를 후대의 판단으로
교정하거나 새로운 정의를 내리려 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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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이를테면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의 폐위가 부당하다 하여 지금에 와 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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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킨들 역사적 정당성과 가치를 누가 인정하겠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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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혜왕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실 내명부의 물갈이로 반전되면서 또 다른 골육상쟁을 불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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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치게 된다. 지금까지 청주 한씨가 독점해 오던 ‘한씨 왕비시대’가 끝나고 ‘파평 윤씨
왕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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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교체되면서 조정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만다.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정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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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생모), 장경왕후(인종 생모), 문정왕후(명종 생모)가 내명부를 휘저으며 조선 중기의 역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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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탄에 빠지고 만다. 이들 모두가 파평 윤씨다.
12.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10>추존 덕종대왕과 경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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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상우하(左上右下)' 남녀 위치 뒤바뀐 조선 첫 왕릉 / 201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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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좌여우의 매장 위치가 뒤바뀐 조선 최초의 왕릉 경릉. 서오릉 내에 있으며 보이는
오른쪽이 추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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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이고 왼쪽이 인수대비다.
승하
당시 세자 신분이어서 난간석조차 없이 초라한 덕종릉. 인수대비는 왕비여서 모든 석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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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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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맏아들 장(暲·1438∼1457)은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착했다. 할아버지(세종대왕)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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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賢同)이라는
아명을 하사받고
일곱 살 때는
정의대부(正義大夫·조정에서 종친에게 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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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2품 벼슬)에 제수되면서 도원군(桃源君)으로 책봉됐다. 신중한 성격으로 학문에 몰두해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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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물론 성균관 스승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다. 특히 해서체에 뛰어나 주위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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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워했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타고난 체질이 허약해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잔병치레까지
잦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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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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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군 성장기의 나라 안도 태평이었다. 할아버지가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은 편안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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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버지(문종)는 차기 임금으로 군왕 수업에
열중이었다. 세 살 아래의
사촌동생 홍위(弘暐·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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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1457)와도 친한 사이였다. 일찌감치 차차기 임금인 세손(世孫)으로 정해져 부럽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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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궁궐에 들어가면 안부도 물으면서 세상 얘기를 나누곤 했다. 다만 큰어머니(현덕왕후)가 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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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것이 불쌍하게 생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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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 왕위찬탈하며 세자로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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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군 나이 13세 때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겼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아버지가 임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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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몸이 약했던 큰아버지마저 2년 4개월 만에
돌아가시더니 사촌동생 홍위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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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도원군 집에는 한명회·권남·홍윤성·양정 등 많은 사람이 몰려와 밤늦게까지 심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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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를 하다가 돌아갔다. 어머니 윤씨(정희왕후)의 입단속과 표정으로 보아 급박한 정국 상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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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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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되던 해에는 나라에 더 큰 변고가 생겼다. 아버지(세조)가 김종서·황보인 등 조정 대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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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계유정난) 병조판서(현 국방부장관)를 겸한 영의정이 된 것이다. 모든 권력은 아버지 휘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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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됐다. 2년 뒤인 18세(1455) 때에는
사촌동생(단종)이 임금 자리를 내놓아 마침내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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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올랐다. 그해 7월에는 의경(懿敬)세자로 책봉되면서 차기 임금으로 대통을 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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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슴 벅차고 행복해야 할 의경세자의 나날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궁중의 보살핌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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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히 행해지는 세자 수업이 고역이었다.
잠시 눈만 감으면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 청령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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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 간 사촌동생 홍위가 어른거렸다.
때로는 인간으로 차마 상상도 못할 고문 끝에 죽어 간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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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이 내지르는 고함이 귓전을 맴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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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견딜 수 없는 건 큰어머니(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자꾸 어딘가를 함께 가자고
앞장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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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다. 어느
날 밤엔 인자한 모습으로 구름 위를
함께 나는가 하면, 난데없는 낮 꿈엔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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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치는 흉한 몰골로 나타나 “세자 자리를 내놓으라”고도 했다. 이럴 때마다 의경세자는 헛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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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소스라치게 놀라 깼고 의관은 식은땀에 젖어 쥐어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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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 못한 세자가 부왕 세조에게 상의하니 아버지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어머니 정희왕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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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했다. 동생 해양대군(예종)도 그러했다. 여동생 의숙공주도 편할 리가 없었다. 온 가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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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령에 시달림을 보다 못한 세조가 동구릉에 형님(현릉)과
합장돼 있는 형수 유골만을 파내 냇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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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 버렸다. 그렇다고 세조의 가족이 현덕왕후의 영적인 괴롭힘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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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감기 도져 20세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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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세자는 병이 들었다. 20세
되던 해 7월 한여름에 우연히 걸린 감기가 도져 병세가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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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졌다. 8월 동궁(東宮·세자가 거처하는 궁궐 내의 집)에서 나와 세조의 옛 집으로 옮기고 어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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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맥과 탕제로 정양을 받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세조는 영산재(靈山齋·산 사람의 명을 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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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식)에 능한 21명의 승려를 경회루로 불러
지성공양을 드리게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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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는 다음달인 9월 2일 죽고 말았다. 이 같은 의경세자의 짧은 20년 생애는 사실(史實)에 기록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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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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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와 정희왕후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화사 최경과 안귀생을 불러 죽기 전에 그려 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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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경세자 초상화를 보며 하늘을 원망했다. 정무와 저자(시장)를 5일이나 파하고 수라상을 거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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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을 소복으로 지냈다. 그러나 민심은 이와 달랐다. 모두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무고한 신하들
|
을 죽인 업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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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오르지 못해 임금이
안 된 의경세자가
덕종대왕이 된 까닭은 무엇인가. 왕조시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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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자신은 즉위를 못하고 죽었으나 아들이 임금이 되면 사후에 추존해 묘호(廟號)를 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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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에 배향했다. 조선
왕조에는 추존대왕이 모두 넷이
있는데 덕종(제9대 성종의 생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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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제16대 인조의 생부), 진종(제22대 정조의
계부), 장조(사도세자·제22대 정조의 생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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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경세자의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산30-1 서오릉(사적 제198호)에
대군묘 제도인 원(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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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조성됐다. 이후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세자빈 소혜왕후와 함께 덕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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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돼 원이 경릉(敬陵)으로 승격(1471)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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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은 소혜왕후 청주 한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뒀다. 이 소혜왕후가 바로 예종→성종→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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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왕에 걸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인수대비다. 인수(仁粹)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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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어머니에게 지어 올린
휘호다. 덕종보다 한 살(1437) 위였으며 경문에 조예가 깊어 범어·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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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의 3자 체로 불경을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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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영역에 두 능선 택한 동원이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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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의 친정아버지 좌의정 한확(1403∼1456)은 더욱 범상찮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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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인수대비 고모)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여비(麗妃)로 간택돼 조선 조정의 ‘명나라 통’으로 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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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외교마찰이 있을 때마다 무난히
해결했다. 세조는 이런 한확과
사돈을 맺었던 것이다. 세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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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극하자 주청사(중국에 보냈던 사신)로 명나라에
가 왕위 찬탈이 아닌 양위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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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허를 받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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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릉도 한 영역에 두 능선을 택해 각각 안장한 동원이강릉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능 앞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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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을 들어선 참배객들
간 논란이 분분하다. 덕종릉이 오른쪽에 있고 인수대비릉이 왼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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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서다. 이른바 좌상(左上·남자가 위)우하(右下·여자가 아래)의 배치 위치다. 남좌(男左)여우(女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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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도 하는 이 문제는 풍수들의 간산 길에서도 논쟁의 불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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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의 방향 설정은 망자(亡者)의
위치에서 판정하는 것이 예법이다. 남자의 왼쪽에 여자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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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남좌여우다. 그러나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반대다. 예를
들어 조부모의 산소 앞에 섰을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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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할아버지이고 오른쪽이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반대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망자와 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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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긋나거나 풍수 물형의 혈(穴)이
겹칠 때는 부우( 右) 또는 부좌( 左 )라고 비석에 표기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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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히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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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좌곤향(서남향)의 덕종릉에는 병풍석은 물론 난간석도 없는 세자릉 그대로이나 계좌정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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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서 서로 15도 기운 남향)의 인수대비릉은 왕릉 규모를 빠짐없이 갖췄다. 인수대비는 왕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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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덕종릉은 왕으로 추존(追尊)되면서도 왕릉 석물에는 손을 못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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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가 내린 사약을 받고 폐비 윤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며 생모 윤씨
|
묘를 왕릉으로 꾸몄다. 그러나
연산군의 패역으로 폐위되면서 다시 묘로 전락했다. 예나 지금이나
|
자식을 잘 둬야 부모가 대접받는 세상이다. 역사는 이토록 준엄한 것이다.
13.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0대>폐주 연산군 묘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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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들에 흥청·계평 등 직급…`흥청망청' 유래 / 201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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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봉구에 있는 연산군 묘역. 의정궁주(가운데)와 딸·사위(맨 앞) 묘도
함께 있다.
경기 고양시 서삼릉 내에 있는 폐비 윤씨의 회묘. 왕릉 격식을 갖추고 있으나 아들 연산군의
폐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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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묘로 격하된 뒤 묘비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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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에 회자되는 저명인사나 유명인을 만나게 될 때는 흉금의 설렘과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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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러 능이나 묘에 갈 때도 미묘한 심사와
감회가 엇갈리긴 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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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다. 때로는
망자(亡者)와의 상봉을 기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막행막식(莫行莫食)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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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 인명을 살상한 인간 백정들 앞에 서면 섬뜩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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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청룡 우백호 局勢 멀어 후손들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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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사적 제362호로 지정된 연산군 묘를 취재하면서도 예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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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 하도 악명 높은 임금이어서 사지(死地) 구덩이에 매장했을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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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4301㎡(4326평)의 봉긋한 혈장(穴場)에 3대를 적선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자좌오향의 정남향
|
이다. 다만 묘혈을
휘감은 좌청룡과 우백호의 국세(局勢)가 멀어 후손들이 고독을 면키는 어렵겠
|
으나 이만한 자리도 과분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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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묘의 내력을 추적하다
보면 뜻밖에도 왕실 혼인과 권력과의 연결고리가 극명하게 드러
|
난다. 이곳에는 의정궁주(宮主) 조씨와 연산군의 딸과 사위(구문경)까지 다섯
기의 묘가 있다.
|
조씨는 세종 4년(1422) 뒤늦게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됐다. 그해 태종이 훙서하자 빈으로 책봉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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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궁주 작호를 받은 뒤 쓸쓸하게 죽었다. 효자였던 세종대왕은 이 지역을 넷째 왕자
임영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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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패지로 내리고 조씨를 봉사(奉祀)토록
왕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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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대군은 딸을 영의정 신승선에게 시집보냈다. 신승선의 딸이 바로 연산군의 부인이다. 따라서
|
폐비 거창 신씨(愼氏)는 임영대군의 외손녀가 된다. 신승선은 또 아들 신수근(좌의정)의 딸을 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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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에게 시집보냈다. 후일 중종으로 등극하는 진성대군은 이복 형인 연산군을 처 고모부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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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되고 강화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로 쫓겨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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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리안치됐다. 사방을 가시 울타리로 둘러치고 외부 출입과 사람 접촉을 엄금하는 게 위리안치다.
|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어제까지의 임금이 얼마를 견딜 수 있는 생활이었겠는가. 음식과
|
예우는 차치하고라도 주변의 부릅뜬 눈과 손가락질로 연산군은 무너져 갔다. 가슴속에서는
|
용암보다 더 뜨거운 불덩이가 치솟았고 눈만 감으면 끔찍한 괴물들이 쫓아다녔다. 연산군은
석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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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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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혹이 떨어져 나간 격이었다.
유배지 주위에 시신을 묻고 잔정이라도 들까 봐 잡인
|
출입마저 금지시켰다. 세월이 흐른 7년 후. 사가에서 모진 목숨 연명하던 폐비 신씨가 이복
|
시동생이자 친정 조카 사위되는 새 임금 중종에게 눈물로 간언했다. “자식도 다 죽고 연고조차
|
없어졌으니 유골이라도 가까이 있게 해 달라”고. 이런 연유로 연산군은 처 외가 땅으로 이장하게
|
됐다. 매년 4월 2일 연산군 숭모회서 제향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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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비 윤씨 회묘 정자각커녕 비석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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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필자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의 서삼릉을 찾았다. 희릉(중종 제1계비
|
장경왕후)·효릉(제12대 인종)·예릉(제25대 철종)의 세 능이 궁궐의 서쪽에 있다고 해 서삼릉이라
|
일컫는다. 이곳에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묻힌 회묘(懷墓)가 있다. 지금은 농협 산하 젖소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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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소가 점유하고 있어 학술연구나 언론 취재 목적이 아니고서는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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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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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묘에 가서는 두 번 놀란다.
조선 역대 어느
왕릉 못지않은 규모의 ‘왕릉’이 ‘묘’라는 사실과
|
이런 ‘능’ 앞에 정자각은커녕 사가
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비석조차 없다는
것이다. 근무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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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없이는 ‘희한한 능’ 쯤으로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 모두가 자식을 잘못 둔 탓이다. 폐비 윤씨와
|
연산군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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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이 여러 후궁을 두고 자신을 멀리하자 윤씨는 임금의 용안을 손톱으로 긁어 깊은 상처를
|
냈다. 왕손의 번성이
곧 종묘사직의 번창이었던 왕실 법도였다. 마땅히 왕비는 군왕의 바람을
|
탓하지 않으며 참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일로 윤씨는 폐비돼 서인이 된 후 사약받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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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모의 분사(憤死)를
뒤늦게 안
연산군은 어머니 잘못은 생각 않고 극악무도한 살인마로
|
돌변했다. 사람을 죽여도 그냥 죽이질 않았다. 필설로 옮기기조차 끔찍한 포락(단근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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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흉(가슴 빠개기), 촌참(寸斬·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飄風·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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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형 수단이었다. 모두가 연산군일기 첫머리 사평(史評)에 있는 기록들이다.
| |
이런 연산군도 어머니를 추모하는 모정은 눈물겨웠다. 성종이 내린 ‘회묘’란 묘명을 회릉(懷陵)
|
으로 격상시키고 유좌묘향의 정동향인 회룡고조혈에 천장했다. 그때 조성해 놓은 석물들이
|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덧없는 한때의 영화는 순간의 포말(泡沫)로 스러지는
|
법이다.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능은 다시 묘로 격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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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문장에 능했다. 일기에 전하는 시만 해도
130여 수나 된다. 한번은 어머니 묘에 다녀와
|
이런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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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효사묘에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 술 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 간절한 정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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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이 없건만 /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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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열보다 간신 한 명이 나을 때가 있다고 했다. 무오사화(1498)로 선비들의 기를 꺾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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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1504)로 충신들을 제거해 버린 연산군은 기고만장했다. 간신 임사홍과 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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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숭재를 채홍사(採紅使)와 채홍준사(採紅駿使)로 삼아 전국의 처녀들과 좋은 말들을 징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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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도에 운평(運平)이란
기생 양성소를 두고 용모와 재예가 뛰어난 기생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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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비로 먹이고 입히며 화장품까지 대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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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새로운 명칭과 이름도 잘 지었다. 이들 기생들을 흥청(興淸)·계평(繼平)·속홍(續紅)으로
|
나눠 직급을 정한 뒤 왕과 동침한 기생은 천과(天科)흥청, 왕을 가까이
모신 기생에겐 지과(地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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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 흥청의 보증인에겐 호화첨춘(護花添春)이란 직위를 부여했다. 돈을 절제 없이 함부로 쓰며
|
흥청거리는 걸 ‘흥청망청’이라
하는데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기생
흥청이 나라를 망하게 했던
|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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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첫 쿠데타 `중종반정'으로 폭정 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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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이것으로도 충족이 안 돼 얼굴 반반한 여염집 규수를 끌어다 무차별 겁탈하고 친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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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상간도 서슴지 않았다. 큰아버지
되는 월산대군 집 여종 장녹수를 궁으로 불러들여 놀아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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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권을 내주고 끝 날에는 큰어머니 순헌 박씨를 억지로 겁간했다. 사냥놀이를 위해 양주·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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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등의 100리 거리 민가를 철거하고 허가 없이 통행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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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분한 박씨 동생 박원종이 성희안·유순정·홍경주 등과 모의해 폭정을 종식시킨 게 중종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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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왕권을 뒤엎은 조선조 최초의 쿠데타 사건이다. 잘못된 권력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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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히려면 무고한 희생이 수반되는 게 역사다. 이 반정으로 희생된 인명들을 논하자면 역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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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비참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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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한 사람의 행보가 역사의 지평을 돌려 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후 거창 신씨 문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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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과 함께 멸문지화를 당했고 명문거족의 꿈을 접어야 했다. 모두가 사위 하나 잘못 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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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의 산물이다. 붉은 옷에 찢어진 갓을 쓰고 앉아 있는 연산군 가마가 김포를 지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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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서 줄지어 구경하던 촌로와 학동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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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그 가마에서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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