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룬 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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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7일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왕릉은 조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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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모두 42기가 있는데, 북한에 2기가 있고 남한에 40기가 있다.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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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북한 2기를 제외한 남한의
40기가 한꺼번에 등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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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까닭은 이 유산이 잘 관리돼 왔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풍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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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양식이라는 점과 약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례의식이
전승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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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는 무형적 요소가 융합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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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은 유교사상과 풍수지리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압축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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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장례 및 제례 등 조선시대의 장묘문화를 조명할 수 있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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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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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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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은 인류 문명과 자연사에 있어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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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으로, 1972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유산협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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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세계유산위원회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일람표에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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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문화유산과 지구의 역사를 잘 나타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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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유산, 그리고 이들의 성격을 합한 복합유산으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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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은 148개국에 890곳이
등재되어 있다. 이 중 689곳이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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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곳이 자연유산, 25곳이 복합유산이다. 가장 많은 세계 유산을 가진 국가는 이탈리아(44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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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41곳), 중국(38곳)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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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1995년 석굴암·불국사를 시작으로, 해인사 장경판전(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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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1995), 창경궁(1997), 수원화성(1997),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 경주 역사유적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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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조선왕릉(2009)등 8곳이다. 제주도의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은 세계
자연유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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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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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살아있는 신(神)의 정원 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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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은 서울· 경기도 일대에 산재한 능과 강원도 영월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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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6대 단종능), 사후에 추존(推尊)된 왕과 왕비의 능 등 40기다.
왕의 무덤이지만 폐위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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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묘로 조성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의 비 신의왕후의
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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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에서 제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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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은 조선의 역사와 건축양식, 미의식, 생태관, 철학이 담긴 문화의 결정체로 자연 지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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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활용한 경관 때문에 ‘신(神)의
정원’이라 불린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왕릉 40기 전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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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제례가 올려져 왕릉이 박제된 옛 유산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란 점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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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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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왕릉의 조성과정과 관리일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조선의
수준 높은 기록문화도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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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특히 도심 속의 각종 개발 압력에도 불구하고 녹지로 잘 보존되어 있어 현대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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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처이자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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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왕가의 영혼과 애증이 서려있는 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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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나라의 주인이던 조선시대에는 왕이 생전에 살던 곳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죽은 뒤 묻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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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도 정성을 다했다. 왕릉의 규모나 꾸민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 백성의 무덤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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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나 장식 등에서 그 차이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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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사회인 조선시대에 왕과 왕족은 죽어서도 지위에 따라 그 규모와 배치되는 석물의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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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조성되었다. 그
명칭도 능(), 원(園), 묘(墓)로 각기 다르게 조성하였다. 왕과 왕비는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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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나 세자비 및 왕 사친(私親)의
무덤은 ‘원’, 그 외에 왕의 친족인 대군과 공주, 옹주, 후궁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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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은 ‘묘’라 불렀다. 죽어서도 엄격한 신분이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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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단종 왕릉을 제외한 조선왕릉은 주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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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대에 모여 있다. 왕릉을 한양에서 10리(4㎞)~100리(40㎞)떨어진 곳에 조성한 것은 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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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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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의 동구릉이나 고양시 서오릉처럼 일정한 공간 안에 여러 개의 능이나 원을 조성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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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따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지관(地官)과 대신들이 한양에서 100리 안팎의 거리에 풍수가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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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보고 와서 조정에 보고하면 새로 등극한 왕이 결정했다. 그래서 왕릉 자리를 잡고 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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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3~5개월의 기간이 걸렸다. 한편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임시국가기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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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오늘날 장의위원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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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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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조선왕릉에 숨겨진 철학과 비밀유네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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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은 중국·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과 구조를 띤다. 제를 위해 한양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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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리
안팎에 능을 조성한 것도 조선왕릉의 특징 중 하나이며, 왕릉을 통해 조선인들의 효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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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각별했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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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은 우상좌하로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 왕이고 좌측은 비의 무덤이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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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은 왕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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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과 왕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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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함께 묻히지는 못했다. 왕릉은 당대의 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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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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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을 제외하고 왕릉이 도굴된
적은 없다.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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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의 경우 석실 부재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고리로 고정했고, 입구는 ‘이중 돌빗장’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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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 사방은 석회·모래·자갈반죽으로 두껍게 메웠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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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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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의 계단은 측면에 만들었는데, 참배자가 오른쪽(東)으로 들어가 왼쪽(西)으로 나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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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의 섭리를 활용한 것이다. 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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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은 2개이지만 서쪽계단은 1개다. 참배자가 올라갈 때는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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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가고 참배자만 내려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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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주변에는 소나무가 우거졌는데 나무 중의 나무인
소나무를 심은 것은 제왕의 상징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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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조선왕릉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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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철학과 윤리, 역사와 과학, 예술이
종합적으로 숨겨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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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선 왕릉은 우리들만의 유산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함께 지키고 가꿔야 할 세계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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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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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함을 일깨우고, 문화재 보호와 국제적 브랜드화에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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