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조선왕릉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

도화골 2017. 2. 10. 14:11

1.능에서 만난 조선임금

조선왕조 500 `살아있는 역사'

 

 

 

 

  보물 제177호로 지정된 종로 사직단.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 제사 올리는

제단으로 종묘와 함께 국가의 상징이다.

 

 

 

조선 임금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가 73년 만의 폭설로 눈에 덮였다. 국보 제227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지정한 조선왕릉.

40기는 조선시대 유교사상과 사후세계 및 조형예술은 물론 자연경관을 활용한 풍수사상까지

결집한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조선왕릉 40기를 돌아보며

깜짝 놀랐다. 어떻게 500년이 넘은 왕조의 무덤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모두 남아있단 말인가.

그들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제출한 조선왕릉에 대한 평가결과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했다.

 2009 6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이 신청한

‘조선왕릉군()’을 만장일치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유네스코는 1972년 총회에서

채택한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에 관한 협약’에 따라 매년 6월 정기총회를 열어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하고 있다. 결정에 앞서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자연보호연맹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전문가를 파견해 현지조사를 시행한다.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창업(1392)한 이래 조선은 순종 4(1910) 경술국치로 멸망할 때까지

27대왕 519년 동안 이 땅을 다스려 왔다. 한 성씨가 단일왕조로 대를 이어 500년 넘게 나라를

통치한 예는 세계 역사상 조선왕조가 유일하다. 천 년 사직의 신라는 박ㆍ석ㆍ김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어 왔고 고려는 34대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망하지 않는

왕조가 없었고 죽지 않는 사람 또한 없다.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 즉 정신이 빠져나간 체백을 수습하는 장묘문화는 세계 각국의 민족과

지역의 기후적 특성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이와 같은 전통과 풍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 민족,

혹은 사회에 있어서 문화의 척도로 간주하곤 했다. 그중에서도 왕릉은 장묘문화의 꽃이며 뛰어난

조형적 예술가치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과 사후 세계관까지 내포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선뜻 내키지 않으면서도, 또 들으면 들을수록 무궁무진하고 흥미진진한 게 무덤에

관한 얘기다. 거기에다 땅의 이치인 풍수지리까지 가미되면 바야흐로 점입가경에 이르고 만다.

산 능선을 뒤덮은 도처의 공원묘지마다 기막힌 곡절과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하물며 한 시대를

통치했던 임금의 능묘야말로 일러 무엇 하겠는가.

42기의 조선왕릉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齊陵ㆍ태조의 원비 신의고황후 능)과 후릉(厚陵

2대 정종대왕과 정안왕후의 능)을 뺀 26명의 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 40기를

만나는 것이다.

 옛날의 왕들은 명령만 내리면 누구나 조아리고 들어 주어 편하고 좋았을 것 같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견딜 수 없는 모함과 죽음의 위기 순간을 수없이

넘어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등극했으나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야 했고

심지어는 폐위당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지에서 분사(憤死)하기도 했다.

 왕과 왕비들은 죽어서도 편치가 않았다. 권력 다툼에서 패한 어린 왕(단종)의 시신은 영월 동강

물 위에 둥둥 떠다녀야 했고, 왕위찬탈을 꿈에서 나무란 왕비(현덕왕후)의 무덤은 파헤쳐져

살아서보다 더 큰 능욕을 당하기도 했다.

재위시절 광란과 폭정으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 주()로 강등돼 능이 아닌 묘가 돼 역사적 통한을

품는 왕(연산군ㆍ광해군)들도 있다. 이래서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은 아직도 못다 한 말들이 남아

있다.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처신이 있기 마련이다. 사회를 이끄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물일수록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타의 본이 되거나 표적이 되기도 한다. 하물며 나라를 영위하는

군왕의 자리에서야 말할 나위가 없다. 거기에는 반드시 당사자 삶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후일의

역사적 평가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한 국가를 운용함에는 언제나 임금과 신하의 동행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신념과 절의를 지켜

내기 위해서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때로는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진해 그 길을 택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일신 영달과

자리 보전을 위해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간신 모리배도 있어 왔다. 이 같은

역사적 후환은 모조리 후손들 몫으로 넘겨져 ‘역사연좌’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역사적 화두 성찰

그러나 역사는 따뜻한 눈으로 살펴야 한다는 시각이다. 이제 와서 “삼국통일을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했더라면…”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정벌을 밀고 나갔더라면…”식의 비탄조나

안타까움은 역사의 성숙을 지연시킬 따름이다. 역사를 통찰함에 지나친 가정이나 좌절은 미래에

대한 오판이나 오류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염려해서다.

 조선왕조실록과 완산실록 바탕 위에 정사를 중심으로 집필할 생각이다.

조선조 각 시대상을 심도 깊게 구성한 대하소설들도 인용해 쉽게 풀어내는 왕들의 역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왕이 곧 국가였던 전제군주 시대에 그들이 판단한 정치적 행위가 오늘날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찾아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역사적 화두는 무엇인가도 짚어 보겠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으로 축약되는 왕정시대의 묘제가 풍수와 결코 무관치 않았음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임금의 왕릉이라고 해서 무조건 천하제일 명당일 거라는 선입견은 큰 오산이다.

패주(敗主)의 무덤을 명당에 썼을 리 없을 테고, 간악한 일제가 망국의 황제를 후손이 번성하는

명당자리에 내줬을 리 만무하다. 이 같은 풍수원리를 왕의 일생과 더불어 생생히 되살려 낼 것이다.

저명한 명풍수와 동행하면서 풍수적 물형을 명쾌하게 풀어내고 생생한 현장사진으로 독자들과

만날 것이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은 인류 전체의 자연유산으로 국제사회의 감시와 보호를 받는다.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인류 공통의 문화가 인증되는 것이므로 국가적 브랜드 가치도 높아지게 된다.

현재 세계 145개국 878건이 지정돼 있으며 이 중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은 8건이다. 2010 6월의

34차 총회서 또 다른 세계유산의 지정을 기대한다.

 

 

 2. 유구한 우리의 역사

조선왕릉 40 세계문화유산 등재 조선 500년의 숨결 세계가 함께 지킨다 / 2009.11.25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룬 조선왕릉.

 지난 6 27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왕릉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모두 42기가 있는데, 북한에 2기가 있고 남한에 40기가 있다.   이번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북한 2기를 제외한 남한의 40기가 한꺼번에 등재된 것이다.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까닭은 이 유산이 잘 관리돼 왔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양식이라는 점과 약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례의식이 전승돼

온다는 무형적 요소가 융합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조선왕릉은 유교사상과 풍수지리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압축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왕실의  장례    제례 등 조선시대의 장묘문화를 조명할 수 있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은 인류 문명과 자연사에 있어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으로,  1972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세계유산위원회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일람표에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세계유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문화유산과 지구의 역사를 잘 나타내고 있는

자연유산, 그리고 이들의 성격을 합한 복합유산으로 구분한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은 148개국에 890곳이 등재되어 있다. 이 중 689곳이 문화유산,

176곳이 자연유산,  25곳이 복합유산이다.   가장  많은  세계 유산을 가진 국가는 이탈리아(44),

스페인(41), 중국(38) 순이다.  

  우리나라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1995년 석굴암·불국사를 시작으로,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경궁(1997), 수원화성(1997),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 경주 역사유적지구

(2000),  조선왕릉(2009)  8곳이다.   제주도의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은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 살아있는 신()의 정원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은  서울· 경기도  일대에  산재한  능과  강원도 영월군의

장릉(6대 단종능),  사후에  추존(推尊)  왕과  왕비의  능 등 40기다.    왕의 무덤이지만 폐위돼

대군묘로  조성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의 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에서 제외됐다.  

 조선왕릉은 조선의 역사와 건축양식, 미의식, 생태관, 철학이 담긴 문화의 결정체로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경관 때문에 ‘신()의 정원’이라 불린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왕릉 40기 전체에서

매년  제례가  올려져  왕릉이 박제된 옛 유산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란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왕릉의  조성과정과  관리일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조선의 수준 높은 기록문화도 볼 수

있다.   특히  도심  속의  각종  개발  압력에도  불구하고  녹지로  잘 보존되어  있어 현대인들의

휴식처이자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 왕가의 영혼과 애증이 서려있는 조선왕릉

  왕이 나라의 주인이던 조선시대에는 왕이 생전에 살던 곳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죽은 뒤 묻히는

무덤에도 정성을 다했다.   왕릉의  규모나  꾸민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 백성의 무덤과는

규모나 장식 등에서 그 차이가 뚜렷하다.

 계급사회인  조선시대에  왕과  왕족은  죽어서도 지위에 따라 그 규모와 배치되는 석물의 수가

다르게 조성되었다.   그 명칭도 능(), (), ()로 각기 다르게 조성하였다.    왕과 왕비는 ‘능’,

왕세자나 세자비 및 왕 사친(私親)의 무덤은 ‘원’, 그 외에 왕의 친족인 대군과 공주, 옹주, 후궁들의

무덤은 ‘묘’라 불렀다. 죽어서도 엄격한 신분이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강원도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단종  왕릉을  제외한 조선왕릉은 주로 서울,

경기일대에 모여  있다.   왕릉을  한양에서  10(4)~100(40)떨어진 곳에 조성한 것은 왕이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다.  

 구리의  동구릉이나  고양시  서오릉처럼  일정한  공간 안에 여러 개의 능이나 원을 조성하기도

하고, 따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지관(地官)과 대신들이 한양에서 100리 안팎의 거리에 풍수가 좋은

자리를 보고 와서 조정에 보고하면 새로 등극한 왕이 결정했다.   그래서  왕릉  자리를  잡고 능을

조성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3~5개월의 기간이 걸렸다.  한편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임시국가기구인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오늘날 장의위원회와

같은 일을 했다.

. 조선왕릉에 숨겨진 철학과 비밀유네스코

 조선왕릉은 중국·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과 구조를 띤다. 제를 위해 한양으로부터

 100리 안팎에 능을 조성한 것도 조선왕릉의 특징 중 하나이며,    왕릉을 통해 조선인들의 효행이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왕릉은  우상좌하로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 왕이고 좌측은 비의 무덤이다.   다만

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은 왕세자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과 왕비가

항상  함께  묻히지는 못했다.   왕릉은 당대의 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을 제외하고 왕릉이 도굴된 적은 없다.  세종

영릉의 경우 석실 부재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고리로 고정했고, 입구는 ‘이중 돌빗장’을 채웠다.

석실 사방은 석회·모래·자갈반죽으로 두껍게 메웠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  

 정자각의 계단은 측면에 만들었는데, 참배자가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西)으로 나오게 했다.

이는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의 섭리를 활용한 것이다.    동쪽

계단은 2개이지만 서쪽계단은 1개다. 참배자가 올라갈 때는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가고 참배자만 내려오기 때문이다.  

  왕릉  주변에는  소나무가 우거졌는데 나무 중의 나무인 소나무를 심은 것은 제왕의 상징이며,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조선왕릉은  우리

선조들의 철학과 윤리, 역사와 과학, 예술이 종합적으로 숨겨진 곳이다.  

 이제  조선  왕릉은  우리들만의  유산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함께 지키고 가꿔야 할 세계인의

유산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문화재 보호와 국제적 브랜드화에 앞장서야 한다.

 

 

 

 

 

 

'역사 > 조선왕릉' 카테고리의 다른 글

1대 태조 ∼ 5대 문종  (0) 2017.02.10
6대 단종 ∼ 10대 연산군  (0) 2017.02.10
11대 중종 ∼ 16대 인조  (0) 2017.02.10
17대 효종 ∼ 20대 경종비  (0) 2017.02.10
21대 영종대왕 ∼남영군 이구  (0) 2017.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