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이 예장된 원릉 앞의 비각.영종(英宗)과 영조(英祖)의 묘호가 음각된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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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서(嫡庶)의 신분차별이 숨을 멎게 했던 시대, 숙종의 서자로
태어난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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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야 했던 인간적 비애와 신변 위협은 백척간두에 선 풍전등화와 다를 바 없었다. 영조는 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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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면서 ‘왜 하필이면 생모 최씨가 궁녀들에게 세숫물이나 떠다 바치는 가장
미천한 종인 무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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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이었을까’라는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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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왕 경종의 아들이 있었다거나 다른 왕자가 생존했더라면
영조에게 왕위는 감히 넘볼 자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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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영조는 조정 중신들에게 하시당했고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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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25년(1699) 6세로 연잉군(延 君)에 봉해진 뒤 경종 1년(1721) 왕세제로 책봉되기까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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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22년. 그간 내명부의 질시 암투와 노론-소론 간 당쟁 와중에 목숨 부지한 것만도 천우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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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할 영조의 팔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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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다급했으면
계모 인원왕후(숙종 제2계비)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을 테니 목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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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 달라”고 애걸했겠는가. 이런 영조가 금상으로 즉위하자 영조에게 대들었던 신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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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지화를 각오했다. 예상대로 소론 측 수장들이 주살당하고 주축 세력들이 숙청당해 권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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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에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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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현명한 군주였다. 그는 성장과정을 통해 당쟁의 피폐상을 누구보다 절감했고 종식시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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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국가적 과제로 우선시했다.
영조는 등극하면서 경종 재위 시 신임사화를 유발한 소론 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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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내는 기유처분을 단행했다. 이후 노론 측이 대거 복귀되자 노론 측 강경 세력인 준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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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峻論者)들은
소론 측의 멸문을 획책했다. 영조는 오히려 준론자들을 축출하고 소론 측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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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를 기용하는 영단을 내렸다. 이것이 영조 5년(1729)에 내려진 기유처분으로 탕평책의 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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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론·소론 두 세력 균형 맞춰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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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력이 붙은 영조의 정국해법은 절묘했다.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 인사 정책으로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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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민치중)과 좌의정(소론 이태좌)의 두
앙숙 정승을 등용해 서로 맞대도록 했다. 이조·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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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병조·형조·공조의 육조 역시 두 세력 간 균형을 맞춰 소론이 판서를 맡으면 참판은 노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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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했다. 인사
관리를 맡았던 이조(吏曹)의 경우 판서(노론
김재호), 참판(소론 송인명), 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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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 서종옥), 전랑(노론
신만)을 고루 섞어 놓으니 결코 어느 한 부처에 힘이 쏠린다 해서 이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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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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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의도대로 정국이 수습되자 영조는 탕평책을 더욱 확대했다. 재능에 관계없이 노-소론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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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만 기용하던 벼슬길을 재야 세력인 남인·소북파 등에까지 길을 터 사색당파 시대로 문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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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한 것이다.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발굴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방편이 보편화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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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했던 선비들이 대거 출사표를 던졌다. 이로 인해 영조는 조선 후기 문예 부흥기를 이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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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고 신(新)사조인 실학사상이 봇물을 이뤄 많은 학자들이 배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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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경제·국방 등서 놀라운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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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책으로 신료들의
힘이 분산되고 왕권이 강화되자 영조의 국정운영에는 힘이 실렸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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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국방·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이룩한 영조의 업적은 참으로 방대하다. 가장 야만적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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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던 압슬형(바위로 무릎을 으깨는 고문)을 폐지해 인권을 존중하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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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억울함을 직접 알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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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연하던 사치·낭비 풍조를 엄금시키고 금주령을 내려 풍습을 바로잡는 한편
균역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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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화해 세금제도를 고르게 했다. 영조는 특히 군사정책에 국력을 집중했다. 당시
통용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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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鑄錢)을 무기 제조체계로 전환한 뒤 수어청에 조총을 만들도록 했다. 화차를 제작해 군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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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하고 변방 요새 구축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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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영조는 서자들의 불만해소 방안으로 아버지가 양반인 서얼 출신 모두를 양인이 되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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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로도 채용했다. 신분에 따른 군역(軍役)을 명확히 시행해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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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출생신분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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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영조는 역대 임금들이 시행하지 못한 왕실 내부
문제들을 과감히 매듭지었다. 왕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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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사당(경기전)을 전주에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고
단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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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원비)를 복위시켜 온릉이란 능호도 내렸다. 고조부 되는 인조의 장릉(長陵) 앞 석물에 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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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가 서식한다는 상소가 있자 즉시 천장토록 왕릉 풍수를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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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스스로 학문을 즐기고 독서삼매경에 빠졌으며 다수의 저술도 남겼다. 인쇄술을 개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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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서적을 간행, 반포해 백성들에게 널리 읽혔다. 언문으로 불린 훈민정음이 대량 보급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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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서민 문자화된 것도 이 시기다.
악학궤범 서문과 어제 경세편을 직접 찬술하고 연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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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반계수록(유형원), 도로고(신경준) 등이
동시에 편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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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농업을 장려하며 민생이 안정되도록 통치 이념을 확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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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39년(1763)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오자 구황(救荒)작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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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백성이 널리 심도록 적극 권장했다.
그 후 고구마는 한해나 기근이 극심할 때 아사자를 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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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획기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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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호 비 영종-영조 나란히 세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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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저런 어진 임금에게도 근심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천지신명은 비록 군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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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지라도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려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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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달성부원군 서종제 딸을 원비(정성왕후·1692~1757)로
맞았으나 소생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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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 소생의 대군 적자에 대한 갈망이 남달랐던 영조였다. 66세 되던 해 52세
어린 15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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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김씨(오흥부원군 김한구 딸)를 계비로
맞았으나 역시 적자 후사를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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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후궁 중 제1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장남 효장세자(추존 진종소황제)를 탄출했으나 10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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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하고 말았다. 제2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아들을 보게 되니 바로 사도세자(1735~1762·추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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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의황제)다. 영조 가족사의 참극은 어린 정순왕후와
사도세자의 갈등과 반목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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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극심한 당쟁의
산물로 결국엔 성미 급한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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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 굶겨 죽이고 만다. 기막힌
꼴을 당한 영빈 이씨는 아들보다도 10세 어린 계비 김씨에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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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 수경원(綏慶園)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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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혔다가 1968년 6월
서오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5) 내 묘좌유향으로 이장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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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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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의 동구릉 내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해좌사향) 비각을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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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객들은 의아해한다. 영종(英宗)과 영조(英祖)의 묘호 비가 나란히 있기 때문이다. 조선 임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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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조(祖)보다 종(宗)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재위 시 군왕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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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주름잡던 제왕도 자신의 묘호를 알고 훙서한 임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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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宗)은
계승왈종(繼承曰宗)이라
하여 정상적으로 왕위를 이었다는
의미며 조(祖)는 유공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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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功曰祖)로
승통 당시 정변이 있었거나 공이 있을 경우 지어 올렸다. 영조는 승하 직후 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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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가 후일 영조로 개묘(改廟)됐다.
26.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1대>영조 원비 정성왕후 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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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낭군님 빈 자리엔 휑하니 바람만 불어 외롭고 야속한
200여년 세월이여 / 201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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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안에 있는 원비 정성왕후의 홍릉. 오른쪽 빈 터가 영조 자리였으나 손자 정조의 미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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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영조는 동구릉 내 원릉에 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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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 입수 용맥이 급해 급경사로 복토된 홍릉 사초지. 조선 유일의 건위공지(乾位空地) 단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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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98호
서오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에 가면
능침 오른쪽을 비워 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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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껏 낭군님을 기다리는 외롭고 애달픈 왕비릉이 있다.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대왕
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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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貞聖)왕후 달성 서씨(1692~1757)의 홍릉(弘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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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님은 “자신도 죽으면 옆 자리로 오겠노라”고 철석같이 굳은 맹세를 했건만
머나먼 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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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93호·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안 원릉(元陵)에 계비 정순(貞純)왕후 경주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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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1805)와 영면에 들어 여태껏 안 오고 있다. 인생사 고통 중 가장 큰 괴로움이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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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대인난(待人難)이라 했건만 못 오는 님에게도 까닭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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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후와의 약속 물거품처럼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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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1694~1776)는 자신보다 두 살 위였던 정성왕후를 무척이나 애모하며 존중했다. 달성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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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제 딸이었던 왕후는 예의범절이 남달랐고 특히 비천한 무수리 출신의
생모를 극진히 모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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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를 감동시켰다. 후궁(첩)
소생이란 출신 성분이 평생 한이었던 영조는 정성왕후한테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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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를 얻어 대통을 잇는 게 일생일대의 대원이었다. 그러나 그 뜻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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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왕후는 33년을
곤위(坤位·왕비 자리)에 있다가
영조 33년(1757) 창덕궁 관리각에서 66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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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하했다. 대문장가로 풍수에도 달통했던 영조는 애책(哀冊·추도사)을 직접 내리고 홍릉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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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히 택지하며 왕후와 묵언의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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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지제(虛右之制)로 광중 오른쪽을 비워 두고 죽은 뒤 함께 묻힐 것인데 무엇을 근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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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누가 인생의 앞날을 장담할 것인가. 무릇 눈앞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사라지고 열 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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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하는 사내 없다 했다. 천지가 개벽할 듯한 견딜 수 없는 슬픔도 세월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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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네 후궁의 몸에서 2남 11녀를 득출했지만 대군으로 왕통을 잇고자 하는 열망은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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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더해만 갔다. 어느덧 정성왕후와도 사별한 지 2년이
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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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영조는 새 장가를 가기로 결심했다. 영조 35년(1759) 66세 임금이
52세나 어린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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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와 재혼의 가례를 올리니 바로 계비 정순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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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來)한
영조에겐 꽃보다 더 고운 어린 왕후가 입 안의 혀였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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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이었다. 이때부터
정순왕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며 조선 왕실에는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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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암투와 모함이 난무하고 불길한 조짐의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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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숙했던 정성왕후보다 악명 높은 정순왕후를 더 회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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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명부 수장으로 별다른 궤적이 없었던 정성왕후가 영조 원비였음은 물론 서오릉
안 홍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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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능이라는 사실조차 낯설기만 하다는 탐방객들의 표정이다. 그러나 정성왕후가 이곳 홍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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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되고 정순왕후로 왕실 안주인이 교체되며 조선 후기사에 던진 역사적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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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영조)가 아들(사도세자)을 뒤주 속에 가둬 굶겨 죽이고 할머니(정순왕후)가 손자(은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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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아들)를 사약 내려 목숨을 끊는 전대미문의 왕실 참사가 계비 정순왕후로부터 기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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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돼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던 천주교가 왕실에까지 파고들자 정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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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서슴지 않았다. 천주교를 국가 주적(主敵)으로 간주하면서 교인들이 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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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와 인명살상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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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의 숙청 서슴지 않는 정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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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리는 천명을 어느 누가 거역하랴만 이 또한 원비 정성왕후 서씨가 영조보다 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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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척하고 어린 계비 정순왕후가 입궐하면서 야기된 역사의 분란이다. 이 모두 당쟁의 소용돌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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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어낸 슬픈 역사이니 당시 신료들은 나라 위해 일하지 않고 어이해서 사람 죽이는 데 목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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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쳤는지 후일의 사가들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이후 계비는 서(庶)손자 정조가 등극한 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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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자신의
무고로 아사한 사도세자 아들이 용상에 올랐으니 마음 편할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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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 세력 모두를 기용 않고 소론파를 고루 섞어 등용하는 탕평책도
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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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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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의혹 속에 정조가 예척하자 계비 김씨는 11세 된 증손자 순조를 등극시켰다. 정순왕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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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어린 주상을 수렴청정하며 5년 동안 조정을 휘젓다가 순조 5년(1805) 61세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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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비는 눈을 감으며 원릉의 영조대왕 곁에 가겠다고
유언했다. 이리하여 홍릉은 정성왕후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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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을 영구히 빈터로 남겨둔 채 단릉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역대 조선왕릉 중 생전 임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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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릉(壽陵·군왕이 살아서 능 터를 잡아 두는 것)지를 택지했다가 공터로 남겨진 건 홍릉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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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향에 가까운 을좌신향(乙坐辛向)의
홍릉은 입수 용맥이 매우 급해 능침 앞의 사초지를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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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토했다. 좌청룡에서 물이 흘러 우백호를 감싸는 좌수우도(左水右倒) 형국으로 이런 지세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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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 급한 후손이 나와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수많은 고금 서적을 독파해 풍수에 관통했던
정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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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을 간과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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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죽인 영조 끝까지 미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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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아버지를 굶겨 죽인 할아버지 영조를 끝까지 미워했다. 영조는 부왕(숙종)이 영면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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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안 명릉 가까이 묻히고자 했지만 손자 왕의 명에 따라 동구릉 내로 가게 된 것이다. 하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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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를 듯한 살아생전의 권세가도 죽고 나면 이 지경이 되는 법이다. 이래서 조선 선비들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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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고 애를 쓰며 자신의 행적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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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예장된 원릉
자리 또한 예사로운 터가 아니었다. 일찍이
제17대 효종대왕을 안장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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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寧陵) 초장지로 능침 석물에 금이 가자 광중에 물이 난다 하여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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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으로 천장한 곡절 있는 자리다. 이 또한 치열한 당쟁의 산물이었지만 여기에는 왕릉풍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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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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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사가에서조차 파묘한 묘 자리는 지기가 샜다 하여 다시 쓰지 않았는데 하물며 왕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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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나위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정조는 할아버지 능지를 굳이 영릉을 파묘한 자리로 옮겨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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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내심은 당시 묘제를 면밀히 살펴보면 금세 드러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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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의 장법에 따르면 일반 묘의 광중은 3자(약 1m) 정도를 팠고 왕릉의 현궁(玄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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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왕기설에 따라 열 자(약 3m) 깊이로 팠다. 十척(尺)의 깊이에 임금의 시신을 안치하고 석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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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으면 곧바로 王자였다. 따라서 일반 사가에서 십 척 깊이로 매장함은 역모에 해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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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영릉(英陵)은 광주 이씨 문중의 선조 묘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천년길지 명당 기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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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이 바로 이 같은 사가와 왕릉풍수의 다른 점에 있으나 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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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는 이미 효종을 예장하며 열 자 깊이로 판 파혈지(破穴地)다. 할아버지가 미워 기가 샌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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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능침을 조영한 정조는 참으로 무서운 군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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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정성왕후 서씨는 현재의 홍릉에 혼자 있는 편이 낫다.
27.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2>추존 장조의황제 융릉 |
뒤주 속 숨 거둔 사도세자 향한 `孝心'의 결정체 /
2010.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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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장조의황제의 융릉.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천추 한을 덜기 위해 능침 앞
정자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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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껴 세운 정조대왕 효심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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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의 원찰 화성 용주사. 정조가 심은 대웅전 앞 회양나무가 괴사한 채 쓸쓸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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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1735~1762)가 열네 살이던 해 늦가을. 영조대왕이 세자를 대동한 채 시종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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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느리고 궁궐 뜰을 거닐며 국정 국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터를
바라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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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부왕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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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마마, 왜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으시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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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재정이 부족해 중건하기가 어려운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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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요·순 임금은 무엇이든 하고자 하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호응했다던데 아바마마께옵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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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경복궁 하나를 중창하지 못하시옵니까? 혹시 성군이 못되신 것은 아니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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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대왕의 용안이 주토빛으로 변했다. “이런 발칙한 놈 같으니라구. 네 녀석은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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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치도를 잘하는지 내 몸소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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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조정 안 노론 측 중신들이 세자의 서정(庶政) 대리를 영조에게 건의해 왔다. 차기 임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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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일종의 정무 수업으로 금상 밑에서 사소한 국사 처리를 익히는 제왕 실습이었다. 이듬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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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5년·1749)
대왕은 열다섯 살 된 세자 선에게 서정을 위임하며 서릿발 같은 엄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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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세자는 조정의 대·소사 일체를 모두 품의하여 처결토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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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의 속을 모르는 세자가 열심히 정사를 돌보며 사사건건 주상께 아뢰었다. 작은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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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의하면 “그것도 해결 못해 알리느냐”고 꾸중했다. 용기를 내 단독으로 행하면 “작은 것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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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고하라 했거늘 왜 혼자 처결했느냐”고 문책하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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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세자 행동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왕 앞에서 눈조차 제대로 못뜨고
|
대신들과 마주치면 슬슬 피했다. 영조의 세자에 대한 증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주눅 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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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에게서 어느 날 갑자기 서정 대리권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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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향일성(向日性)이란
무정하기 이를 데 없는 법이다. 부왕의 버림을 받은 세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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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부터 허수아비였다. 동궁에 혼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 때로는 큰
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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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렀다.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면 5년 전(10세) 가례를 올린 세자빈 혜경궁 홍씨(1735~1815)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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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통함을 토로했다. 홍씨는
노론 측 핵심 인물인 영의정 홍봉한(풍산 홍씨)의 딸로
매우 총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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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한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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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이상행동은 어릴 적부터 감지됐다. 천자문을 배우다가 사치할 치(侈)자를 짚고 입은 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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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사치”라고 벗어 던졌다. 영조가 소싯적 쓰던 칠보 감투를
씌우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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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더 큰 사치”라며 끝내 거절했다. 안타까운 의대(衣帶) 결벽증이었다. 열 살이 되면서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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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안목까지 생겨 부왕과 조정 중신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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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세자는 신임사화에 연루됐던 소론을 몰락시킨 노론 측 처사를 호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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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사화는 장희빈
아들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파와 숙빈 최씨 아들 영조 편에 섰던 노론파 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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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 주도권 싸움으로, 경종이 즉위(1721)하며 노론 측이 몰살당한 정변이다. 권력은 무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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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어서 영조가 즉위(1725)하자 이번에는 노론이 소론을 몰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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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정 안 세력 균형은 노론이 우세했으나 영조의 절묘한 탕평책으로
소론 세력도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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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다. 이런 판국에서
세자는 부왕을 용상에 등극시킨 노론 측을 철없이 매질한 것이다. 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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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은 자파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일찌감치 세자를 견제하는 게 상책이라고 중론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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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은 영조의 가장 큰 열등감인 적통대군 탄출을 자극했다. 이런 연유로 66세의 영조가 52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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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경주 김씨에게 새 장가를 가니 계비 정순왕후(1745~1805)다. 당시 열다섯 살이었던 계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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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중추 세력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사도세자보다 열 살 아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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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계모를 모시게 된 사도세자의 정신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순간 발작과 착란 증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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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졌고 궁녀를 목 베어 죽이는가 하면 여승을 몰래 입궁시켜 희롱까지 했다. 영조 37년(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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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평안도 관찰사 정희량의 계교에 말려 비밀리에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여색에도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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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비행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려는 김한구·홍계희·윤급 등의 음모로 계비에게 전달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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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는 더욱 부풀려 영조에게 고했다. 이럴 즈음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오점 10여 조목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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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에게 상주(上奏)했다. 여기에 폐숙의 문씨와 그 오라버니 문성국도 가세했다. 대로한 영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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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언을 목 베고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내린 뒤 자결할 것을 명했다. 영조 38년(1762) 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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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스물 여덟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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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엎드린 채 고두배를 하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으나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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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늦었다. 자진을 거부하자 영조는 “소주방에 있는 쌀 담는 궤를 가져오라”고 엄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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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의 세손(정조)이 할바마마 곤룡포를 붙잡고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간청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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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라”는 불호령만 받았다.
세자는 순순히 어명을 받으면 부왕의 진노가 풀릴까 하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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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주 속에 들어갔다. 영조는 서둘러 대못을 치게 하고 편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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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아버님! 소자가 잘못하였사오니 빛을 보게 해 주소서. 이제는 아바마마가 하랍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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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하고 글도 잘 읽으며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부디 이리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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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째 되던 날 기척이 없어 뒤주 속을 열어 보니 세자는 쪼그리고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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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세자 주검을 확인한 영조가 망연자실했다. 세자가 죽은 뒤 양주 배봉산에서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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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내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영우원(永祐園)으로 부르도록 했다. 그리고는
세손(정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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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 큰아버지 되는 효장세자 앞으로 입양시켜 대통을
이었다. 그러나 영조가 승하한
뒤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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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으로 등극하며 첫 옥음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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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효장세자 아들이 아니고 사도세자 아들임을 분명히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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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정조 1년(1776)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어머니 홍씨 궁호를 혜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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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惠慶)으로 추상했다. 정조 13년(1789) 영우원을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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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슭으로 천장하며 현륭원(顯隆園·사적 제206호)이라
고친 뒤 근처의 용주사를 크게 중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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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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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고종황제 광무 3년(1899)
10월 장조(莊祖)대왕과 헌경왕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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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된 뒤 같은 해 11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와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상하고 능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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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隆陵)으로 격상됐다. 비록 왕위에는 못 올랐지만 정조 이후 조선 임금 모두가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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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손이란 점에서 후기 왕실사에 장조의황제는 자리매김이 큰 추존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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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정향(서로 15도 기운 남향)의 융릉은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는 화려한 상설을 갖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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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세자 신분의 묘인데도 병풍석을 설치하고 무인석까지 세웠다. 정조는 융릉 앞 정자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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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며 어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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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
앞 좌향을 피해 정자각은 우측에 세우도록 하라. 뒤주 속 암흑에서 죽어 간 아버지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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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까지 막아 답답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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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을 조영하던 대소신료 모두가 대성통곡했다. 이래서 융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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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 정면과 비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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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2>추존 장조의황제 융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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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 기구한 운명 閑中錄<한중록:혜경궁 홍씨의 회고 집필록>은 恨中錄인가 … / 20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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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융릉의 소나무 군락지. 솔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를 정조가 씹은
후 능침 앞 솔숲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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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충이 범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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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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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선( )을 둘러싼 영조대왕 당시 왕실 내명부와 조정 분위기는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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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하나 세자편이 돼 거들어 주기는커녕 말 그대로 절해고도에 유리된
고립무원의 사면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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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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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衣帶)결벽증과 기상천외한 언행으로 일찍이 부왕 눈 밖에 난 사도세자와 함께, 해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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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벽으로 측근 신료들을 불안케 하기는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이인좌의 난(영조 4년·1728년) 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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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상한 의심 행태를 자주 보였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은 즉위 초 탕평책을 급히 서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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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축에서 밀려난 소론 측이 왕권을 뒤엎으려 한 역모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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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조는 죽을 사(死)자와 돌아갈 귀(歸)자를 보면 신경질적으로 과민반응했다.
조의(朝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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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나 외출 시 입었던 옷은 반드시 갈아입었고 불길한 말을 하거나 들었을 경우 양치질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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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씻었다. 심지어는 서정대리를 분담시킨 세자한테 대답을 들은 뒤에도 서둘러 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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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은
부전자전이라며 크게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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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는 것이 상책이나 세손이 서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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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모 영빈 이씨도 아들 사도세자의 자결을 명한 남편 영조에게 통곡하며 사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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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이 점점 깊어 이미 중병이 되었음을 어찌 책망하오리까. 소인이 차마 모자 간 정리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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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할 일이오나 대처분을 내리시되 세손(정조) 모자만은 보살펴서 종사를 편안케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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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 혜경궁 홍씨 또한 시아버지 영조의 냉혹한 결단을 돌이키기엔 대세가 글렀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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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는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閑中錄)에
당시의 피할 수 없는 여인의 숙명을 이렇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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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차마 그의 아내 입장에서 이 처분을 옳다고는 못하겠으나 일인즉 할 수 없는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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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따라 죽어서 모르는 것이 상책이겠으나 어린 세손이 있어 결행치 못하다. 다만 세자와 만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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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을 서러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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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측 핵심 인물이었던 장인 홍봉한도 사도세자 편이 아니었다. 천방지축의 세자는 집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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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중신들과 대립각을 세워 후일 등극하면 축출해 버리겠다며 벼르고 있던 터였다. 목전의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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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혈연이 대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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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봉한은 아우 홍인한과 함께 대소신료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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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것도 같은 격간도동(膈間挑動)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세자 증세를 공개하며 한숨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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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철총민했던 어린 세손은 저간의 이런 정국 구도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영조에 이어
왕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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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할아버지(영조), 서조모(정순왕후), 외할아버지(홍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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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조부(홍인한)를 죽을 때까지 미워했다. 영조 명으로 양주 배봉산에 묻힌 아버지
묘(영우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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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명당으로 천장해 현륭원으로 격상시켰다. 세자 신분의 원(園)을 화려한 왕릉격으로 조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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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고 비통하게 굶어 죽은 아버지를 못 잊어 자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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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융릉의 송충이 씹으며 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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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모춘(暮春) 융릉에 다시 온 정조가 갑자기 발길을 멈춰섰다. 능침 앞 솔잎을 송충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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갉아먹고 있는 것이었다. 냉큼 손으로 잡아 입으로 씹으며 구슬피 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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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무리 인간사와 무관한 미물일지언정 어찌 감히 이곳
송엽을 먹이 삼아 연명하는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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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설운 사연은 북망산 뜬 구름도 알겠거늘 미천한 그대 미물이야말로 덧없이 미망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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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사도세자 능역은 배종했던 고관대작들과 궁궐 나인들의 통곡소리로 진동했다. 능행을 호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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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까지 모두 합세해 송충이를 잡아 씹어 없앴다. 이후부터 융릉 앞 소나무에는 송충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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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충이 범접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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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사도세자는 이처럼 아들 잘 둔 덕에 추존 황제위까지 오르지만 정작 그의 권속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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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을 살다 갔다. 혜경궁 홍씨는
81세까지 장수하나 표독한 연하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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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등쌀에 오금 한번 펴지 못한 채 기구한 생을 마감한다. 설상가상으로 아들 정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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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에 대한 보복으로 한은 깊어만 갔다. 2남(의소세자·정조) 2녀(청연·청선공주)를 뒀으나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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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소(懿昭)세자는 3세 때 조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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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제1후궁
숙빈 임씨에게서 3남 은언군과 4남 은신군을 득출하고 제2후궁 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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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한테 5남 은전군을 얻는다. 비록 세 왕자는 사사되거나 양자로
대를 잇지만 말기 조선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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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이 이들에 의해 승계됨을 주목해야 한다. 어느 누가 다난한 인생사를 장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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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영조는 자신이 굶겨 죽인 아들을 통해 조선왕조가 문닫을 때까지 왕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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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군은 서학(천주교)을 몰래 접했다가 할머니 정순왕후한테 발각돼 사약받고 분사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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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군· 풍계군· 전계군 삼형제를 남겼다. 이 중 막내 전계군이 제25대 철종대왕 생부가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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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全溪)대원군이다. 철종은 후사 없이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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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군 가계는 양자로 이어지는 극적 반전을 거듭한다. 숙종의 6남 연령군(영조 이복동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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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 없이 서세하자 영조는 부왕이 아꼈던 연령군 앞으로 자신의 손자 은신군을 입양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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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奉祀)토록
했다. 은신군 역시 계대를 잇지 못하자 이번에는 왕손
이병원(인조 3남·인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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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손)의 아들 남연군을 다시 양자로 들여 후사를 도모했다. 남연군은 흥녕군·흥완군·흥인군·흥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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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들을 낳아 왕실을 번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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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막내아들 흥선군이 제26대 고종황제의 생부되는 희대의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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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왕실계보상 후일 흥선군 아들이 보위에 오르리라 예상한 사람은 조선 천지간 단 한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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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그러나 왕실 계촌으로 따지자면 흥선군은 당당한 영조대왕의 고손자가 되는 항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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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날 밟 듯 살아 온 일생사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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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전군은 홍대간 등이 역모를 일으켰을 때 왕으로 추대됐다는 죄목으로 이복형 정조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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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당했다. 은언군 2남 풍계군을 입양해 대를 이었으나 순조→헌종→철종조에 이르는 안동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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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세도 치하에 수명을 다하고 죽은 사도세자 왕손은 불과 손꼽을 정도다. 정조 역시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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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24대 헌종이 후사를 못 이어 왕실 대통은 이어지나 자신의 혈통은 단절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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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홍씨가 회갑 되던 해(영조 19년·1795년) 친정 조카 홍수영의 간곡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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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청으로 쓰여진 회고록이다. 61·67·68·71세 등 네 번에 걸쳐 집필됐으며 당시 붕당의 미묘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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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 끼치는 온갖 무서운 사건 속에서 칼날을 밟으며 살아 온 일생사가 산문체 형식으로
서술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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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한중록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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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장희빈 아들·영조 이복형) 계비 선의왕후 어씨가 거처하던 저승전이 빈집 된 지
오래인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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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도세자가 강보에 싸인 남의 아기를 데려다 홀로 두게 했다. 취선당(장희빈이 인현왕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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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하던 곳)에는 소주방을 만들어 자신의 유흥 오락처로 만들었다. 또한 저승전에서 퇴출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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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들을 다시 불러들여 새로 입궁한 궁녀들과 싸우게 했다고 적고 있다. 영조는 장희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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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으로 인해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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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과 사도세자가
부자지간으로 얽힌 뼈저린 악연-. 그래도
역사는 ‘어찌 아비가 자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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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수 있느냐’고 아들 정조의 한이 서린 융릉 능상에서 장탄식을 몰아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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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24대>헌종대왕 경릉(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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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청정·당쟁에 두손 묶인 `허수아비 제왕' / 201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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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삼연릉으로 조영된 헌종대왕 경릉. 원래 선조대왕 천장지로 동구릉 내 있으며 오른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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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중앙 효현왕후, 왼쪽 효정왕후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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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묵’에 수록된 헌종 어필. 천하명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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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사를 섭렵하다 보면 왕은 왕이었으되 치적이 묘연한 임금이 더러 있다. 이를테면
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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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제13대 명종, 제18대 현종, 제20대
경종이 대표적인데 제24대 헌종대왕(1827~1849)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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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에 올라 뭘 했는지 모르는 임금이다. 이들 모두 재위 기간이 짧거나 단명한 탓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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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청정이나 당쟁·
세도에 말려 ‘남의 인생’을 살다 간 비운의 제왕들이다. 이 중에는 천수를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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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고 독살당한 군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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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했던 아버지(추존 문조익황제)가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희생당할 때(순조 30년·1830) 헌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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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이었다. 새까맣게 속이 탄 할아버지(순조)가 왕세손으로 책봉해 놓고 시름시름 앓더니 4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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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하(登遐)했다. 이해 8세로
제24대 왕위에 오르니 조선 역대 임금 중 최연소 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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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에 임금 오른 조선 최연소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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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초등학교 1학년생이 삼천리 강토를 통치할 수 있겠는가. 조정 권력은 당연히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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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왕후·안동 김씨) 수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죽음의 내막을 훤히 아는
어머니(신정왕후·풍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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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 또한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일찍이 할아버지가 안동 김씨 세도평정을 위해 정략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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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이한 며느리였다. 그래도 조정 권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순원왕후 명에 따라 조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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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상에 앉은 어린 임금 뒤에 발을 치고 내리는 순원왕후의 어명은 동지섣달 얼음장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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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왔다. 국사의 모든 결재는 할머니한테 나왔고 헌종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있더라도 순원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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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테 품의한 뒤에야 시행했다.
등극 직후 아버지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한 뒤 할머니는
|
대왕대비로, 어머니는 왕대비로 진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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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왕의 어명을 빙자해 순원왕후는 무소불위의 전권을 휘둘렀다. 부정한 과거 조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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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족들의 대거 등용을 비호하는가 하면 매관매직으로 국가 기강이 무너지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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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록
민심은 등을 돌렸고 ‘인간 모두가 태어날 적부터 평등하다’는 서학(천주교)의 가르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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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됐다. 보다 못한 헌종이 옥음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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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장에 사사로이 들어와 염문한 자는 과장(科場)을 어지럽히고 어명을 거역한 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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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릴 것이오. 세상에 나올 때부터 과장의 법을 어겼는데 후일 어떤 일을 그에게 맡길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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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왕후 수렴청정 국가기강 무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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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세도 권력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삼정마저 문란시켰다. 질병·재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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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지경에 있는 농민들 땅을 헐값에 매입하고, 권문세가 자식들 군역은 교묘히 면제받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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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복들이 대신했다. 더더욱
격분한 건 환정의 조작이었다. 봄철 춘궁기 양식을 대여해 주고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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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기 때 배로 거둬들이는 곡식에 모래를 섞고 저울눈까지 속인 것이다. 마침내 민초들이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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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왕후는 민심의 표적을 엉뚱한 서학쪽으로 급선회시켰다. 팽배한 사회적 혼란 원인을 서학의
|
민심교란 탓으로 돌려 천주교 압살에 착수한 것이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를 처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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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길·장하상 등 수많은
국내 천주교인을 학살했다. 헌종 5년(1839)의 기해박해로 한국 최초
|
김대건 신부도 이때 처형돼 군문효수됐다.
오가작통법으로 교인들을 색출하고 천주교를 엄금하는
|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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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같은 질곡의 세월도 유장할 수만은 없는 법. 금상의 나이 15세(헌종 7년·1841)가
되자
|
국법에 따라 순원왕후도 철렴(撤簾)했다. 23세에 청상과부가 돼 34세가 된 ‘조 대비’ 신정왕후
|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조 대비는 시어머니가 하던 대로 친정 풍양 조씨 일문을 조정의 핵심요직에
|
배치했다. 아버지 조만영은 주상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겸직하고 숙부
|
조인영, 조카 조병헌, 조병구(조만영 아들) 등이 실세로 부각됐다.
|
헌종은 또 허수아비가 됐다.
안동 김씨·풍양 조씨 문중 간 정권 교체기에 파생된 온갖 가렴주구
|
와 인명살상의 고통은 모조리 무고한 민초들 몫이었다. 생업을 포기한 유민들이 도처에 속출하고
|
임금 노동자나 광부로 전락한 빈민들은 사회불안 요인으로 집단화됐다. 우려는 곧 현실로 닥쳐왔다.
|
헌종 2년(1836)에는 남응중·남경중 등이
은언군(사도세자 3남)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려다 누설돼
|
능지처참당했다. 8년
뒤엔 의원 출신 민진용이 또 다른 은언군 손자를 옹립하려는 역모가 발각돼
|
멸문지화를 입었다. 이 같은 일련의 모반 사건들은 조정 기반이나 정치적 세력이 전무한 중인·몰락
|
양반들이 작당한 것이어서 사회적 충격은 더욱 컸다. 누구나 넘볼 수 있을 만큼 왕권이 우습게
|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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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난리 통에 헌종은 전국에 창궐하던 천연두까지 걸려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소생했다.
|
설상가상으로 금상에게 후사가 없고 옥체마저 미령해지자 외척세도는 끝간 줄을 몰랐다. 사소한
|
트집으로도 안동 김씨 세력과 사생결단해 민생은 피폐되고 아사자는 산적했다. 백성들은 또다시
|
이
땅에 태어난 걸 원망하며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길 고대했다.
|
헌종은 일찍부터 학문을 가까이하며 호색은 멀리했다. 11세 때 가례를 올린 원비 효현(孝顯)왕후
|
안동 김씨(1828~1843· 영흥부원군 김조근 딸)는 후사 없이 16세로 일찍 승하했다. 이듬해
|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1831~1903·남양 홍씨)을 계비 효정(孝定)왕후로 맞았으나 역시 태기가
|
없자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는 초조해졌다.
|
왕권 무너지고 민초들은 살길 `막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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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어머니는 왕실 대통을 잇기 위해 제1후궁 숙의 김씨, 제2후궁 경빈 안동 김씨, 제3후궁
|
정빈 파평 윤씨를 정해 연일 합방토록 강권했으나 헌종은 이를 기피했다. 숙의 김씨가 유일한
|
혈육인 옹주를 출산(1848)했으나 해산 당일 사망했다. 헌종은 계비전과 후궁전에서 나올 때마다
|
다리를 휘청거렸고 두 눈엔 눈곱이 꼈다. 명 재촉을 한 것이다.
|
호색엔 철골도
녹아난다 했다. 1849년 운기 허탈로 누운 지 18일 만에 창덕궁
정침에서
|
훙서했다. 펴보지도 못한 나이 23세였다. 재위 14년 6개월 19일 동안 순원왕후가 7년을
|
수렴청정했고 수재·역병·기근·역모로 시달린 세월이 9년이었다. 조정에서는 원비 효현왕후가 묻힌
|
동구릉 내 경릉(景陵) 우편에 예장하고 능호는 그대로 쓰기로 했다.
|
경릉을 찾은 참배객들은 조선 최초의 3연릉(三連陵)에
의아해 한다.
광무 7년(1903) 계비
|
효정왕후가 승하하며
함께 안장됐기 때문이다. 좌(頭)에서 향(足)쪽을
바라볼 때 맨 오른쪽이
|
헌종대왕이고 중앙이
원비 김씨, 왼쪽이 계비 홍씨다.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왕릉풍수 법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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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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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곡장 안에 세 개의 능이 조영된 특이한 구조며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이 하나의 곡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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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돼 거대한 장방형을 이룬다.
부부가 모두 한 방을 쓰는 격이다. 능지에는 경좌갑향(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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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도 기운 동향)으로 기록돼 있으나 실제 측정한 좌향은
유좌묘향의 정동향에 가깝다. 향법(向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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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나경으로 15도 오차는 후손 발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각도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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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경릉 자리는 제14대 선조대왕을 초장했던 목릉 터다. 왕실이 발흥하는 길지 명당이었으면
|
왜 천장을 했겠는가. 후사를
잇지 못한 임금은 죽어서도 서러운 법이다.
헌종과 효현왕후는 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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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1899)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와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로 각각 추존되고, 효정왕후는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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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로 살아서 진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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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5대>철종대왕 예릉<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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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왕후<안동 김씨>,
철저한 감시 속 허수아비 임금 만들어 / 2011.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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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철종 대왕과 철인왕후의 예릉. 조선왕릉 상설제도에 따른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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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으로 석물들이 우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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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읍에 있는 철종 생장가. `용흥궁'이란
편액은 흥선대원군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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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헌종이 23세로 예척(1849)하자 왕실 내명부(內命婦·왕비와 후궁을 일컫는 총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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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손(祖孫) 3대 과부가 동석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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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세의 안동 김씨 순원왕후(순조비·1789~1857), 42세의 풍양
조씨 신정왕후(추존 문조익황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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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1890), 19세의 남양 홍씨 효정왕후(헌종
계비·1831~1903)였다. 조정 안에는 미묘한 기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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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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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 문중 간 대결은 재빠른 기지로 옥새를 확보한 순원왕후의 안동 김씨 측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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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갓 넘긴 노련한 순원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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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연명하는 19세 떠꺼머리총각 원범(元範)을 데려다 임금(철종·1831~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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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혀 놓고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다. 졸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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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포돼 와 생사기로에 선 죄인처럼 떨고 있는 철종에게 순원왕후가 엄히 분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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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은 똑똑히 들으시오.
사람이 책을 읽지
않고 고사(故事)에
어두우면 나라를 다스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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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소이다. 전에 배운
학문이 현달하지 못함을 탓하지
말고 강관(講官)의 가르침에 따라 환골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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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換骨奪胎)토록 매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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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목숨을 거두지 않고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아무리 배운 게 없어도 조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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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군 부부)· 종조부(은전군)· 아버지(전계대원군)· 백부(상계군)·
이복형(회평군) 모두가 왕이 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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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는 역모에 연루돼 몰살당한 걸 알고 있었다. 용상이나 왕관보다 사는 게 우선이었다. 땅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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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린 채 고두배하며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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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랍시는 대로 따르겠사오니 목숨만은 부지케 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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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이후 철종은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철저한 감시 속에 허수아비 임금이 됐다. 거처는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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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곁으로 정했고 수라상도 같은 주방에서 조리해 진상토록 했다. 생사가판(生死可判)권을 맡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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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금상은 미동도 않으면서 대소사를 대비한테 품의해 결정했고 그 세월이 9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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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철종 2년·1851)에는 영은부원군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1837~1878)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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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했다. 6세
연하의 인물 곱고 조신한 규수였다. 당대
권문세가 처녀를 각시로 맞은
철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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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강화도령’으로 농사나 짓고 있다면 엄두도 못 낼 배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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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 침전에 꽃다운 후궁들 강제 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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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임금이 된 3년째로 22세(1852) 되던 해. 대비 김씨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주상이 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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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록 했다. 어떤
명분으로도 스물이 넘은 임금을 망석중이로 만들 순 없었던 것이다. 서당 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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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무지렁이 촌부로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철종이었지만 당시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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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왕사들로부터 습득한 학문은 개안(開眼)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치도(治道)와 치세(治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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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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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권 입장에선
날로 학문이 깊어가는 철종이 위협적 존재로 다가왔다. 남자를 망가뜨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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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술과 여자만 한 게 또 있겠는가. 때마침 15세로
간택된 중전 김씨에겐 수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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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순원왕후 엄명으로 주상 침전에 꽃다운 후궁들이 강제로 입실했다. 최음제가 섞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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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주에 기름진 안주가 밤낮없이 철종을 녹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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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도 처음엔 이게 바로 무릉도원인가 싶었다. 중전 김씨를 포함해 ▲제1후궁
귀인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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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후궁 귀인 조씨 ▲제3후궁 귀인 이씨 ▲제4후궁 숙의 방씨
▲제5후궁 숙의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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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후궁 숙의 범씨 ▲제7후궁 궁인 박씨(직첩 없음)
▲제8후궁 궁인 이씨(직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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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 후궁 궁인 남씨(직첩 없음) 등
열 명의 여인을 밤마다 번갈아 가며 만취된 채 방사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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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를 처결해야
할 군왕은 침전에서 나올 때마다 휘청거렸고 부액(扶腋) 받아 오르는 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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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헛디뎌 고꾸라지기도 했다.
두 눈에는 누런 눈곱이 덮어 시야를 가렸고, 앉았다 일어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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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개의 별이 어른거렸다.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이럴 때 세도 권신들은 조정인사에 재무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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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조목조목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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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창업 이래 최악의 학정·민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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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이 무얼 안다고 그러시오. 경들이 다 알아서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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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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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대신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어전을 물러 나왔다. 관작(官爵)을 팔고 사는 매관매직이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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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대로 성사된 것이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다 보니 과거제도는 무용지물된 지 오래였고 아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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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만이 보신책의 우선이었다. 어쩌다 정신이 든 철종이 권신들을 향해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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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정실과
세력을 좇기 급급하고 명문가 자제들은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채 발탁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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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사직이 암담하오. 탐관오리 폐해는 홍수·맹수보다 극심해 만백성을 유랑시키고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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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고
굶주리는 백성을 구렁에서 구휼하지 못하는 과인의 처지가 참으로 비감하기만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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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순원왕후조차 친정 척족들에게 벼슬을 내리며 집안 문호(門戶)가 지나치게 영성(盈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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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을 염려했겠는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못살겠다 아우성이었고 말세가 임박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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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참설이 난무했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최악의 학정에 민생고가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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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범람하면
둑이 붕괴하고 독이 넘치면 깨지게 돼 있다.
마침내 민중이 봉기했다. 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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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과 새로 창도된 동학(천도교)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고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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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함흥·제주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당황한 철종과 세도정권이 진무사를 파견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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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봉책을 썼으나 불 위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바야흐로 국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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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왕실 내명부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화신 순원왕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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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세로
훙서(철종 8년·1857)한
것이다. 안타까운 역사가 내리막으로
치닫는 전환점이었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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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내 최고 어른은 명실공히 풍양 조씨 신정왕후(조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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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숨 가쁘게
질주하는 유장한 역사와 폐인이 된 철종과는 무관했다. 이미 ‘섹스중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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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병에 든 제왕은 정사를 잊은 지 오래였고 건장했던 육신은 급속도로 쇠잔해졌다.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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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 12. 8)도 금상은 궁궐 후원에서 궁녀를 뒤쫓으며 희롱하다 갑자기 넘어졌다.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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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못했다. 또 국상이 난 것이다. 나무꾼을 끌어다가 억지 왕위에
앉힌 지 14년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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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었다. 1 왕후 9 후궁 속에 후사 하나 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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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살아생전
“내가 죽거든 희릉(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릉) 오른편 언덕에 묻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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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했다. 중종대왕 초장지였으나 문정왕후(제2계비) 시샘으로 억지 천장된 명당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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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등극하며 대리 섭정이 된 흥선대원군은 이곳(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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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좌오향의 정남향으로 장사 지내며 능 호를 예릉(睿陵)으로 정했다. 후일(고종 15년·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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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후가
승하한 뒤 동원 쌍분으로 조영됐다. 오늘날의 서삼릉으로 사적 제200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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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오른지 14년 6개월만에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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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예릉을 조성하며 역대 어느 왕릉 못지않은 규모로 단장했다. 세도권력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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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과시와 함께 철종의 등극 과정이 개천에서 용 난 아들(고종황제) 처지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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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강화의 철종 생장가에 ‘龍興宮’이란 친필 편액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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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예릉은 조선 왕릉의 상설제도에 따라 조영된 마지막 왕릉이라는 데 커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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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철종과 왕비는 광무 3년(1899) 고종에 의해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와 철인장황후 (哲仁章皇后)로 추존됐다. |
31.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5대>철종대왕 예릉<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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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힘없는 왕은 탄식만'
33세에 승하 / 201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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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의 철종 생장가 유허지
비각. 부엌에 방 하나의 오두막집이었다.
강화읍
선원면에 있는 철종대왕 외가. 염종수가 가짜 외삼촌으로 둔갑해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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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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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10년(1859)의 일이다. 금상의 외삼촌을 자처하는 염가(廉哥)란 자가 엄중한 대궐 관문을 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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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와 탑전에 부복했다. 남루한 행색에 피골마저 상접한 염가는 다짜고짜 통곡하며 임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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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선(腺)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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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이 바로 전하께옵서 애타게 찾으시는 외삼촌 염종수이옵니다. 진즉 알현하지 못한 중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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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엄벌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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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취미성(昨醉未醒)으로 몽롱하게 용상에 앉아 졸고 있던 철종은 깜짝 놀랐다. 등극하던
해(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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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일구월심 찾아온 외삼촌이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순간 주상의 용안에선 소나기 같은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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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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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염종수는 조정 요직을 완전히 장악한 안동 김씨 주청에 의해 충청 병마절도사로 제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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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돼 황해병사를 거치더니 1년 만에 서남해안 병권을 총괄하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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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랐다. 그러나 염종수의 마각은 곧 탄로 났다. 무위도식으로 빈둥대던 건달 염가(파주
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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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철종의 외가(용담 염씨) 족보를 위조해
일대 사기극을 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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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가, 가짜 외삼촌 행세 희대의 사기극 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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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철종이
당장 염종수를 포박해 친국하니 과연 가짜였다. 즉각 파직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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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한 뒤 효수했다. 피붙이가 그리웠던 임금은 남모르게 피눈물을 흘렸고
팔도 유민들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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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세도권력을 비웃으며 조롱했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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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우민들이 어진 스승이나 지도자를 만남은 시대적 천복이라 했다. 이때 당시 백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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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은 너무나 질박했다. 그저 세종대왕 버금가는 성군과 황희 정승 같은 청백리
재상을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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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며 누명 쓰고 죽지나 않으면 천명으로 여겼다. 이런 기본권조차 지켜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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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 세도정권이었다. 인피(人皮)를 벗겨 내는 혹독한 가렴주구로 아사자 시체는 도처에 즐비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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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가 광속에서는 쌀과 고기 썩는 악취가 사방을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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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나라 안팎의 정세는 더욱 혼돈 속에 빠져들어 속수무책이었다. ▲철종 2년(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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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해서 지방의 수재·기근 ▲관북지방 화재·기근(1852) ▲호남지방 수재(1854) ▲경기지방 화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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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해서지방 수재(1856)
▲호서지방 수재(1857) ▲관북지방 수재(1860~1861) ▲삼남·관북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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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1862). 여기에다
겨울 홍수와 여름 우박의 괴변이 끊이지 않았다.
백성을 함부로 하는 몹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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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하늘마저 등을 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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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7년(1856)에는 서·남해상에 프랑스
함대와 이양선이 출몰해 조정을 위협하며 개항과 통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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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해 왔다. 이즈음 세계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 열강들의 광범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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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정책과 자원수탈로 약소국들 운명은 풍전등화 신세였다. 국제정세에 어두워 미리 대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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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 국가는 망국의 길만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가혹한 약육강식의 세계질서에 편입 못 한
나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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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참혹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조정에선 망한 지 200년이
넘는 명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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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면서 청나라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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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하무인으로
자만한 세도권력은 가련한 민초들의 고혈을 짜내 연일 흥청망청이었고, 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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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족들이 두려웠던 임금 또한 하나뿐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알아서 주지육림 속에서 흐느적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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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1 왕후에
아홉 명의 후궁을 취해 5남 7녀를 득출했으나 제6후궁
숙의 범씨 소생 영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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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생존해 금릉위 박영효에게 하가했다. 5남 6녀
모두 출생 6개월도 안 돼 세상을 떠났고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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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육인 영혜옹주마저 시집 간 지 3개월 만에 서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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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은 기근·홍수, 밖에선 개항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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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여대로 타향을 떠도는 유민(流民)들은
삼삼오오 떼 지어 다니며 야유하고 수군댔다.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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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따르는 염복(艶福)을 탐내다가는 누구나 저 지경에 이른다며 적수공권의 걸인
신세를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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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았다. 궐내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23세로 청상과부가 돼 안동 김씨 압제하에 가문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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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해버린 풍양 조씨 신정왕후(조대비·추존 문조익황제비)의
철천지한이었다. 조대비는 나이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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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순원왕후·안동 김씨)가 죽기만을 축수했고 머지않아 자신의 세상이 올 것을 확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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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王材)를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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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극을 절묘하게
파고든 희대의 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다. 풍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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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주역에 관통했던 대원군은 살얼음판 같은 염량세태를 마음껏 희롱하며 천하대세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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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 없이 훙서할 금상의 뒷일을 정확히 예측했던 것이다. 조영하(1845~1884·조대비 조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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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섭해 조대비와 은밀히 내통하며 후일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고종황제 아명)을 보위에 앉히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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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약해 두었다. 부패정권을 향한 조대비와 대원군 간 천추의 한이 안동 김씨 몰락을 자초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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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제휴로 가시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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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대한 음모를
알 리 없는 안동 김씨 일문 권세가들은 방심했다. 국익은 안중에도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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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영달에만 미혹된 나머지 뒷날 용상에 오를 만한 영특한 왕손은 역모죄로 옭아 사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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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록 대원군은 굴신과 굴종을 주저하지 않으며 시정잡배 파락호로 위장해 죽지
않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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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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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철종이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모두 할 수 있다’는 권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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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해 용상에서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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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초근목피로도 연명 못해 굶어 죽는데 팔도 관리들이 올린 장계를 보면 선정 아닌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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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소. 어찌해서 수령·방백들마저 민생을 이리도 소홀히 한단 말이오. 그대들이 조정 녹봉을 타 먹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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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들이 맞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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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세도정권은 우이송경이었다. 이미 승하한 임금과 왕비를 칭송하는 시호·존호의 추시(追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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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몰두했고 임금이 내리는 사패지 확보에만 혈안이었다. 철종 8년(1857) 순원왕후가
훙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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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대왕과 합장하며 순종이었던 묘호를 순조로 천묘(遷廟)했다. 후궁 왕자(君)가 재위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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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척하면 일단 종(宗)으로 예우했다가 적통성 시비가 사라지면 조(祖)로 고치는 전례(典禮)에 따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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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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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또 철종의 가계를 신원시켰다. 세도권력이 역모로 몰아 죽인 할아버지(은언군)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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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전계대원군)ㆍ 백부(상계군)ㆍ 이복형(회평군)을 복작 안 시키면 대통승계 법통에 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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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결자해지였으나 소가 웃을 아전인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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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당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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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치세에 힘쓰려 했으나 때는 늦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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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철들어 치세와 치도를 깨닫게 된 철종은 무기력한 군왕의 처지를 비관하며
탄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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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지새웠다. 자신이 겪은 민생고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남다른 애정으로 백성을 살피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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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이루지 못했다. 야생마보다 강인했던 타고난 건강도
어느덧 무너져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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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상에 오른 지 14년째 되던 해(1863) 초가을. 쇠잔해진 육신을 부액받으며 서삼릉에 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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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이 희릉·인릉·소경원·효창원 등을 돌아보며 독백했다. 죽음을 직감한 영물(靈物)의 예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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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육신 죽어 왕릉이나 원(園)에 묻힌들 크게 대수로울 일이며 무명잡부 묘에 진토가 돼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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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귀천이 따로 있으랴. 어찌 인간의 한평생이 이리 허망할 수 있단 말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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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환궁 이후 철종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33세였다. 강화에 있는 철종 생장가(용흥궁)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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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강화읍 선원면) 동네 사람들은 슬피 울었다. 원범이가 임금이 안 되고 농부로 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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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도 더 했을 것이라며 한양 하늘을 원망하며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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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노니, 도대체 그대들의 권력이 무엇이기에 한 사람 일생을 이토록 망쳐 놓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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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26대> 고종황제 홍릉<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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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
"이하응 둘째 아들을 양자로 입승대통케 하라" / 2011.0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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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황제릉으로 조영된 고종황제 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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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으로 미운에 간 명성황후 민씨와 합폄으로 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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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8일. 제25대 철종이 후사 없이 돌연 등하(登遐)하자 조정 안이 발칵 뒤집혔다. 제26대
|
옥좌에 과연 누가 오를 것인가. 그 당시 모든 결정권은 왕실의 수장인 익종(翼宗·효명세자)비
|
신정왕후(조 대비)가 쥐고 있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시절, 숱한 의혹을 남긴 세자의 갑작스러운
|
의문사로 시어머니 순원왕후(안동 김씨)와 원수지간이
된 조 대비(풍양 조씨)는 이때만을 고대하고
|
있었다. 그녀의 윤지는 곧 국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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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성군으로 봉해 익종대왕 양자로 입승대통(入承大統)케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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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 세도가를 비롯한 다른 근신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조정 안팎이 일순간에 의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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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린 것이다. 권신들 모두 이 위기를 제압 못하면 다음 수순이 궤멸임은 자명했다. 이판사판, 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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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작정하고 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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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마마, 익성군이 익종대왕 법통을 승계한다면 헌묘(憲廟·제24대 헌종)와 대행(大行·예장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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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임금 신분·철종) 마마는
어찌 종묘에 봉안하오리까. 총명을 밝혀 통촉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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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도전이었다. 헌종은 형이 되고 철종은 아저씨 항렬인데 어떻게 한 묘(廟)를 건너뛰어
|
익성군이 보좌에 등극할 수 있느냐는 항명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조 대비도 속수무책, 피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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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애절벽의 기로였다. 그러나 조 대비 윤음은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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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가 형에게 절하고 질항(姪行·조카)이
숙항(叔行·아저씨)에게 예를 표함은 천륜 법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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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겠소. 경들도
알다시피 대행이 헌묘에 복배(伏拜)하고 입사(入嗣)해야 하는 만고의 역보(逆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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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오히려 천지 궤변이고 꿈만 같소이다. 모두 입들 닥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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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 앞의 일(日)자각. 역대 왕릉의 정(丁)자각과 달리 황제릉 앞에만 세울 수 있는 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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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 권신들에겐 자신들이 저지른 자업자득의 외통수였다. 또 다른 대신이 나서 주청하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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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대비의 표독스런 안광 살기가 좌중을 압도했다.
23세에 과부가 된 후 33년을 청상으로 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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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하며 56세 초로(初老)가 된 여인의 한에 누구 하나 대항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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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전하는 법통을 논한다면 정조→순조→익종→헌종 4대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승통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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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이오이다. 그런데
대행(철종)은 헌종의 아저씨로 순조의 계자가 돼 입후(入後)되니 하늘·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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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됐소. 고매한
경들은 그대 가묘(家廟)에 가서 죽은 아들에게 절할 수 있겠소이까.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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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성군은 익종의 둘째 아들로 입승되었으니 헌종은 황형(皇兄)이 되며 대행은 황숙고(皇叔考)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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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것이오. 어찌 여기에 두 개의 법통이 있다는 의심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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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성군이 곧 제26대 고종황제(1852~1919)다. 고종의 혈계는 사학자들조차 혼돈될 지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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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다. 생가 혈통으로는 인평대군(제16대 인조의 3남) 8대손으로
남연군의 친손자며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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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들이나, 입양
혈계는 사도세자(제21대 영조 아들) 고손자로 제22대 정조에게는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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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이 된다. 사가에서도
일단 양자를 보내면 친부 족보에서 할보(割譜)돼
버려 친형제 간에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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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수를 달리 계촌(計寸)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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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으로 치닫는 고종 시대에는 생경한 수사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병인양요·신미양요·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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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조약·임오군란·갑신정변·갑오경장·을미사변·을사보호조약·경술국치 등이 대표적이다. 세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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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육갑(六甲)’이라 지칭하는 이른바 육십갑자를 모르고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암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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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다. 천간(天干) 10개(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와 지지(地支) 12개(자·축·인·묘·진·사·오·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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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술·해)로 구성돼 있는 육십갑자는 양(하늘·남자)과 음(땅·여자)으로 배합돼 각각 우주섭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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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한다. 천간의 갑과 지지의 자가 만나 ‘갑자’가 되고 을(천간)과 미(지지)가 짝이 되면 ‘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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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해가 된다. 12개
지지는 10개의 천간 아래 따라붙어 6회의 변신을 거듭하며 오묘한 조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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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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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등극한 해인 1864년은 우연히도 갑자년이어서 육십갑자만 암기하면 계수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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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하다. 이를테면 병인양요(1866)는 병인이
육갑 순서 3번이어서 고종 3년이고, 갑오경장(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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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갑오가 육갑 서열 31이어서 고종 31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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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의 고종은
용상에 오르면서 양어머니인
조 대비 조종을 받다가 곧바로 대리 섭정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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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시키는 대로 좇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종은 대원군의 말을 잘 듣는 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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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었다. 이성에 눈떠 가던 고종은 궁녀 이씨(후일
귀인 이씨)를 총애했다. 조 대비와 대원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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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전 간택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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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부인 민씨가 친정 조카뻘 되는 여성부원군 여흥 민씨 민치록의 딸 민정호(閔貞鎬·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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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를 천거했다. 고종보다 한 살 위였다. 안동 김씨 60년 세도에 몸서리친 대원군은 부인 소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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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납해 왕비로 간택했다. 곧
명성황후다. 경기도 여주
산골의 영락(零落) 양반 여식으로 9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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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을 잃고 고아나 진배없이 자란 사고무친 환경이 대원군을 솔깃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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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알겠는가. 수모와 간난(艱難)을 극복하며 처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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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대원군이 자초한 일생일대 최악의 실수였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 대결은
우연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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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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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년(1866) 민씨(15세)를 정비로 맞이한 고종은 인물 없고 영악스러운 명성황후를
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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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틈새에 귀인 이씨가 완화군(1866)을 낳자 대원군은 세자 책봉을 서두르려 했다. 며느리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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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삭신을 부들부들 떨며 시아버지 대원군을 증오했다. 억겁을 환생해도 풀지 못할 이 구부(舅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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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앙숙대결은 마침내 500년 조선왕조를 문닫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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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마다 고종은 참담했다. 처음엔 대원군 기세에 눌려 조정을 내맡겼으나 대리 섭정 10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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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던 1873년 친정을 선포하며 부자 간 인연을 끊어버렸다. 22세 때다. 주마가편(走馬加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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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하무인이 된 명성황후는 즉각 여흥 민씨 척족정권을 수립하고 내정은 물론 천정부지의 무소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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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권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왕조 역사상 내명부 수장
중전이 외교권까지 행사하긴 명성황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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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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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난에 찬 고종의 행장들은 오늘의 근·현대사와 연결되는 사실(事實)들이어서 우리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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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사실(史實)이다. 고종은 조선왕조가 멸망한 9년 뒤인 1919년(기미)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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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를 전후해 갑자기 붕어했다. 전날까지 무탈했던 고종태황제가 급서하자 망국의 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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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받친
조선 민중들은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며 의분에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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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릉(洪陵·사적 제207호)에 고종황제가 예장되던 인산(因山)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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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3월 1일이었다. 이날 서울 탑골공원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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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다. 우리
민족이 종교· 이념· 신분을 초월해 다함께 참여한 3·1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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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에 가면 산릉제를
봉행하는 제각(祭閣)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역대 조선왕릉 앞에 세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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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丁)자각이
아니라 일(日)자각이다. 황제릉 앞에만 건립할 수 있는 능제(制)다. 을좌(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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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15도) 신향(서에서 북으로 15도)의 능침엔 을미사변(1895) 때 시해당한 명성황후와 합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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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안장돼 있다. 일인들이 조선황실 번성하라고 명당을 골라 택지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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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6>남연군 이구 묘<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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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親<남연군>묘 이장한 지 7년만에 고종 황제<흥선대원군 둘째 아들>
득남 / 201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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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황제 탄생이 두려워 일제가 끊어놓은 남연군
묘 후룡맥. 산 양쪽의 절단 흔적이 역력하다.
남연군 묘 건너편의 보덕사 극락전.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가야사에 불을 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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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등극 후 새로 지어준 비구니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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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묘 입구에 자리한 거북이 물형의 구사봉.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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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갈급했던 자가 졸지에 득세하면 세상이 만만해지는 법이다. 하옥 김좌근(1797~1869)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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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서찰을 품에 넣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조선 천지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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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하옥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경기·충청 지역에 소문부터 냈다. 비록 ‘상갓집 개’로 괄시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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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였지만 철권군주 영조 대왕의 엄연한 고손자였다. 세상에선 ‘남의 집 옥벼루 빌려 상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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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낸 게 겨우 아버지 묘 이장이냐’고 대원군을 소인배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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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리부동으로 득의양양한
대원군이 지사(地師) 정만인과 덕산 상가리를 다시 찾았다. 꾀죄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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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대원군이 아니었다. 어딜 가나 하옥의 서찰만 들이밀면 수령·방백 모두가 삭신을 오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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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사 대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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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로 몇날며칠 여러고을 민폐 끼치며 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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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사, 자네는 어인 연유로 이 혈(穴)을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로 소점(所點)했는가. 흥선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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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히 궁금하니 어서 지평(地評)을
확인해 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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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대감께서 더 소상히 아시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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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아, 돌다리도 두들겨 본 후 건너고 아는 길도 물어가는 법이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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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기 아는 게 최고라고 거들먹거리는 놈일세. 풍수에 정답이 어디 있겠나. 욕심을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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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탐(物貪)을 비워야 명경지수처럼 땅속이 드러나 보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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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인은 대원군이 신풍(神風)인 줄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이미 선경에 든 그의 경지를 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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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탄했다. 그가 풀어낸 해박한 풍수 비결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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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에서 자미원(紫微垣)은 북극 소웅좌 부근에 있는 명당이다. 오직 천제(天帝)만이 소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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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힐 수 있는 궁궐이나 왕릉 터로 전해 오는 천하제일의 명당 이름이다. 자미원 물격(物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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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짐없이 갖춘 길지를 자미원국(局)이라
하는데 우리 한반도에서도 여러 곳이 입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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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낭림산맥은 평안북도로부터 흘러 강계 부근에 맨
처음 천시원국(天市垣局)을 형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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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았다. 그 맥이 묘향산으로 낙맥한 뒤 번신(飜身)하면서 평양 근교를 자미원국으로 결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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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향산맥은 또 마식령 중추맥으로 이어지며 송도(개성)
일대에 다시 자미원국을 펼치니 만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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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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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달리 함경도 개마고원에서 내리뻗은 백두대간 정기가 토함산 지맥까지 연연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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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連連出龍)해 돌출혈로 융기하니 신라 천년 도읍지 경주 자미원국이다. 부산 금정산까지 연결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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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을 지칭한다. 또 하나의 자미원국은 백두산 정상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이 함경도 두류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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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쳐 급강하하다 원산에서 갈라선다.
이 한북정맥 속기처(束氣處)에 혈장(穴場)을 맺으며 우뚝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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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틀임한 대명당이 북악산 아래 경복궁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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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경청하던 흥선대원군도 정만인의 숨겨진 내공에 내심 탄복했다. 그러나 대원군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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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장한 후 천자가 태어날 덕산 묏자리가 당장 더 화급했다. 술술 풀어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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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인의 부아를 은근히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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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안다는 게 겨우 양택지뿐이라던가.그렇다면 이땅에 음택지 자미원은 가당찮다는 말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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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인이 깜짝 놀랐다. 나경을 들고 얼른 대원군 곁으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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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올시다. 바로
대감이 점지한 이 자리가 황제필출 자미원이로소이다. 임금 제(帝)자 형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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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조산(祖山·혈처 뒤의 먼 산) 산세와
온갖 귀봉들이 자리한 주변 국세가 그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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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이번에는
응축됐던 정만인의 비장 음택풍수 한 수 한 수가 누에고치에서 명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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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듯 연이어 되살아났다.
①음택 자미원 입구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월봉(日月峰)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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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파구를 막아야 하니 곧
일월한문(日月悍門)이다. ②이 물 곁에 거북이나 물고기 형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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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봉(龜蛇峰)이 자리해 ③소와 기러기를 상징하는 금수봉(禽獸峰)에 물을 공급해야 상생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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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④묘
앞 오방(午方·남쪽)에는 좌룡우마의 용마봉(龍馬峰)이 받쳐줘 입궐을 대기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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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북두칠성을 닮은 영험한 화표봉(華表峰)이
잡신 근접을 막아야 최고의 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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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도굴 실패로 1만명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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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덕산면
상가리 입구부터 숨겨진 양 산록의 5격(五格)이 정만인 입을 통해 재확인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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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틀림없는 왕생지지임을 더욱 믿게 됐다. 이장할 명당에 올라선 대원군은 다시 한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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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엄장대한 산세가 거대 계곡으로 중첩돼 적이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 요새처럼 안온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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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을 이장할 혈처에는 가야사(伽倻寺) 산신각 탑이 봉안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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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생각은 치밀하고도 용의주도했다. 예산 수덕사 본사(本寺)에서 대법회가 있다고 속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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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이 절을 비운 사이 가야사에 불을 질렀다. 대원군은 기왕 폐허가 된 몹쓸 땅을 묏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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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면
나중에 새 절을 지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훗날 흥선대원군 둘째 아들 명복이 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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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에 오른 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지은 절이 남연군
묘 건너편에 있는 오늘날의 보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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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報德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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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 춘향으로 천하명당을
얻어낸 대원군은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는 남연군 묘를 파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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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까지 거창하고 화려한 상여로 이운(移運)했다. 몇날
며칠을 여러 고을에 민폐 끼칠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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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하옥 대감 친필 서한을 은근히 꺼내 보였다. 안동 김씨 권문세가들도 흥선대원군이
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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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며 이장하는 줄은 알았으나
“그까짓 흥선군이 뭘 알겠느냐” 며 실소하며 방치했다.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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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 유골이 장지에 이르자 대원군은 정만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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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재혈(裁穴)을
어찌하겠는가.
천하에 둘 없는 자미원도 유골을 모시는 재혈이 어긋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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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로 돌아가는 법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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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이 자리는 돌로 둘러싸인 석곽에 광중 자리에만 흙이 있는 석중지토혈(石中之土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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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시다. 당판에 놓인 저 옥새석을 보소서. 뒷날
소인을 괄시하면 아니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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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향(坤向 · 서에서 남으로 45도) 득수(물길이 들어옴)에 손향(巽向 · 동에서 남으로 45도) 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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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이 나감)이니 좌향은 건좌(乾坐·서에서 북으로 45도) 손향(巽向)이라. 파수와 향이 똑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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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향의 당문파(물길이 직선으로 나감)이긴 하나
남주작이 가로막아 후손 발복에 큰 영향은 못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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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건(좌)과 곤(득수)이 정배(正配·바른 짝)를 이루니 풍수를 아는 지관치고 어느 누가 고개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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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이랴. 주역에서 건(乾)은 하늘이고 아버지요, 곤(坤)은 땅이며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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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묘 뒤쪽의 거대한 후룡맥 완전히 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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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 묘(기념물 제80호·1989년 지정)를 이장(1846)한
지 7년(1852)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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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가 되는 둘째아들 명복을 얻었다. 이 묘를 잘못 건드려 역사에 끼친 파장은 필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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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언키
어렵다. 고종 등극 후 독일 상인 오페르트와 천주교인들이 합세해 미수에 그친 남연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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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 실패로 1만 명 가까운 교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섭정 대원군의 외국인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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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극도로 악화돼 국운을 가로막은 쇄국정치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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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순종 이후 또 다른 황제 출현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묘의 거대한 후룡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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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절단해 놓았다. 남연군 묘 현장에는 그 소행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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