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조선왕릉

21대 영종대왕 ∼남영군 이구

도화골 2017. 2. 7. 20:35

25.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21>영조대왕 원릉<>

붕당정치 탕평책 `·정조 르네상스' 개화 국정운영 순풍에 / 2010.10.08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영빈 이씨의 묘 수경원. 영조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생모다.

 

 

영조대왕이 예장된 원릉 앞의 비각.영종(英宗)과 영조(英祖)의 묘호가 음각된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적서(嫡庶)의 신분차별이 숨을 멎게 했던 시대, 숙종의 서자로 태어난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인간적 비애와 신변 위협은 백척간두에 선 풍전등화와 다를 바 없었다.   영조는 철이

들면서  ‘왜 하필이면  생모 최씨가  궁녀들에게 세숫물이나 떠다 바치는 가장 미천한 종인 무수리

출신이었을까’라는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형왕  경종의  아들이 있었다거나 다른 왕자가 생존했더라면 영조에게 왕위는 감히 넘볼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영조는 조정 중신들에게 하시당했고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들었다.

숙종  25(1699)  6세로  연잉군(  )   봉해진 뒤 경종 1(1721) 왕세제로 책봉되기까지의

세월이 22. 그간 내명부의 질시 암투와 노론-소론 간 당쟁 와중에 목숨 부지한 것만도 천우신조

라 할 영조의 팔자였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계모 인원왕후(숙종 제2계비)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을 테니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했겠는가.   이런  영조가  금상으로  즉위하자  영조에게  대들었던  신료들은

멸문지화를 각오했다.   예상대로  소론 측 수장들이  주살당하고 주축 세력들이 숙청당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영조는 현명한 군주였다. 그는 성장과정을 통해 당쟁의 피폐상을 누구보다 절감했고 종식시켜야

할 국가적 과제로 우선시했다.   영조는  등극하면서  경종  재위  시 신임사화를 유발한 소론 측을

몰아내는  기유처분을  단행했다.   이후  노론  측이  대거  복귀되자  노론 측 강경 세력인 준론자

(峻論者)들은  소론  측의  멸문을  획책했다.   영조는  오히려  준론자들을 축출하고 소론 측 일부

인재를 기용하는 영단을 내렸다. 이것이 영조 5(1729)에 내려진 기유처분으로 탕평책의 효시다.

○ 노론·소론 두 세력 균형 맞춰 인사

 탄력이  붙은  영조의  정국해법은 절묘했다.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 인사 정책으로 영의정

(노론 민치중)  좌의정(소론 이태좌)  두 앙숙  정승을  등용해 서로 맞대도록 했다. 이조·호조·

예조·병조·형조·공조의  육조  역시  두 세력 간  균형을 맞춰 소론이 판서를 맡으면 참판은 노론이

차지했다.   인사 관리를  맡았던  이조(吏曹)  경우  판서(노론 김재호), 참판(소론 송인명), 참의

(소론 서종옥), 전랑(노론 신만)을 고루 섞어 놓으니 결코 어느 한 부처에 힘이 쏠린다 해서 이기는

싸움이 아니었다.

 임금의 의도대로 정국이 수습되자 영조는 탕평책을 더욱 확대했다. 재능에 관계없이 노-소론 측

인사만  기용하던  벼슬길을  재야  세력인 남인·소북파 등에까지 길을 터 사색당파 시대로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발굴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  인사방편이 보편화되자

은둔했던  선비들이  대거  출사표를  던졌다.  이로 인해 영조는 조선 후기 문예 부흥기를 이끌 수

있었고 신()사조인 실학사상이 봇물을 이뤄 많은 학자들이 배출됐다.

○ 정치·경제·국방 등서 놀라운 업적

 탕평책으로  신료들의 힘이 분산되고 왕권이 강화되자 영조의 국정운영에는 힘이 실렸다. 정치·

경제·국방·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이룩한 영조의 업적은 참으로 방대하다. 가장 야만적 형벌

이었던  압슬형(바위로 무릎을 으깨는 고문)  폐지해  인권을  존중하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직접 알리게 했다.

 당시  만연하던  사치·낭비  풍조를  엄금시키고  금주령을 내려 풍습을 바로잡는 한편 균역법을

합리화해  세금제도를  고르게  했다.   영조는  특히  군사정책에 국력을 집중했다. 당시 통용되던

주전(鑄錢)을 무기 제조체계로 전환한 뒤 수어청에 조총을 만들도록 했다.   화차를 제작해 군병에

보급하고 변방 요새 구축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영조는 서자들의 불만해소 방안으로 아버지가 양반인 서얼 출신 모두를 양인이 되게 하고

관리로도 채용했다. 신분에 따른 군역(軍役)을 명확히 시행해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자신의 출생신분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기도 했다.

 아울러  영조는  역대 임금들이 시행하지 못한 왕실 내부 문제들을 과감히 매듭지었다.   왕실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사당(경기전)을 전주에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고 단경왕후

(중종 원비)를 복위시켜 온릉이란 능호도 내렸다.   고조부 되는 인조의 장릉(長陵) 앞 석물에 뱀과

벌레가 서식한다는 상소가 있자 즉시 천장토록 왕릉 풍수를 동원했다.

 영조는 스스로 학문을 즐기고 독서삼매경에 빠졌으며 다수의 저술도 남겼다.  인쇄술을  개량해

수많은 서적을 간행, 반포해 백성들에게 널리 읽혔다.  언문으로  불린 훈민정음이  대량 보급되며

본격적인 서민 문자화된 것도 이 시기다.  악학궤범  서문과  어제 경세편을 직접 찬술하고 연행록

(홍대용), 반계수록(유형원), 도로고(신경준) 등이 동시에 편찬됐다.

 무엇보다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농업을 장려하며 민생이 안정되도록 통치 이념을 확고히 했다.

영조 39(1763)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오자 구황(救荒)작물로

온 백성이 널리 심도록 적극 권장했다.  그 후 고구마는 한해나 기근이 극심할 때 아사자를 줄이는

데 획기적 역할을 했다.

○ 묘호 비 영종-영조 나란히 세워져

 백성들은 저런 어진 임금에게도 근심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천지신명은  비록  군왕이라

할지라도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려주지 않았다.

 영조는 달성부원군 서종제 딸을 원비(정성왕후·1692~1757)로 맞았으나 소생을 얻지 못했다.

정비  소생의  대군  적자에  대한  갈망이  남달랐던  영조였다.  66세 되던 해 52세 어린 15세의

정순왕후 김씨(오흥부원군 김한구 딸)를 계비로 맞았으나 역시 적자 후사를 잇지 못했다.

 네  후궁    1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장남 효장세자(추존 진종소황제)를 탄출했으나 10세 때

요절하고  말았다.   2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아들을 보게 되니 바로 사도세자(1735~1762·추존

장조의황제). 영조 가족사의 참극은 어린 정순왕후와 사도세자의 갈등과 반목에서 비롯된다.

 이 또한 극심한  당쟁의 산물로 결국엔 성미 급한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못

박아 굶겨 죽이고 만다.    기막힌 꼴을 당한 영빈 이씨는 아들보다도 10세 어린 계비 김씨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  수경원(綏慶園)

묻혔다가  1968 6  서오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5) 내 묘좌유향으로 이장된 뒤

오늘에 이르렀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해좌사향) 비각을 본

참배객들은 의아해한다. 영종(英宗)과 영조(英祖)의 묘호 비가 나란히 있기 때문이다. 조선 임금들

은 조()보다 종()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재위 시 군왕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천하를 주름잡던 제왕도 자신의 묘호를 알고 훙서한 임금은 없다.

 종()  계승왈종(繼承曰宗)이라 하여  정상적으로 왕위를 이었다는 의미며 조()는 유공왈조

(有功曰祖)  승통  당시  정변이  있었거나  공이 있을 경우 지어 올렸다. 영조는 승하 직후 영종

이었다가 후일 영조로 개묘(改廟)됐다.

 

 

 

26.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1>영조 원비 정성왕후 홍릉

낭군님 자리엔 휑하니 바람만 불어 외롭고 야속한 200여년 세월이여 / 2010.10.22

 

서오릉 안에 있는 원비 정성왕후의 홍릉. 오른쪽 빈 터가 영조 자리였으나 손자 정조의 미움을

사 영조는 동구릉 내 원릉에 예장됐다.

 

 

능침 입수 용맥이 급해 급경사로 복토된 홍릉 사초지. 조선 유일의 건위공지(乾位空地) 단릉이다.

  사적  198호 서오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에 가면 능침 오른쪽을 비워 둔 채

아직껏  낭군님을  기다리는  외롭고  애달픈  왕비릉이  있다.   조선  21대 임금 영조대왕 원비

정성(貞聖)왕후 달성 서씨(1692~1757)의 홍릉(弘陵)이다.

 

     님은  “자신도 죽으면 옆 자리로 오겠노라”고 철석같이 굳은 맹세를 했건만 머나먼 동구릉

(사적  193호·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2-1)  안 원릉(元陵)  계비 정순(貞純)왕후 경주 김씨

(1745~1805)와 영면에 들어 여태껏 안 오고 있다.   인생사  고통    가장    괴로움이  사람을

기다리는 대인난(待人難)이라 했건만 못 오는 님에게도 까닭은 있는 법이다.

 

○ 왕후와의 약속 물거품처럼 꺼져

 

영조(1694~1776)는 자신보다 두 살 위였던 정성왕후를 무척이나 애모하며 존중했다.  달성부원군

서종제  딸이었던  왕후는  예의범절이  남달랐고 특히 비천한 무수리 출신의 생모를 극진히 모셔

영조를 감동시켰다.   후궁()  소생이란  출신  성분이  평생 한이었던 영조는 정성왕후한테 대군

왕자를 얻어 대통을 잇는 게 일생일대의 대원이었다. 그러나 그 뜻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정성왕후는  33년을 곤위(坤位·왕비 자리)에 있다가 영조 33(1757) 창덕궁 관리각에서 66세로

승하했다.   대문장가로  풍수에도  달통했던 영조는 애책(哀冊·추도사)을 직접 내리고 홍릉 자리를

친히 택지하며 왕후와 묵언의 약속을 했다.

 

 “허우지제(虛右之制)로 광중 오른쪽을 비워 두고 죽은 뒤 함께 묻힐 것인데 무엇을 근심하랴.

 허나 누가 인생의 앞날을 장담할 것인가.    무릇 눈앞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사라지고 열 계집

마다하는 사내 없다 했다. 천지가 개벽할 듯한 견딜 수 없는 슬픔도 세월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영조는    후궁의  몸에서  2  11녀를  득출했지만  대군으로 왕통을 잇고자 하는 열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어느덧 정성왕후와도 사별한 지 2년이 돼 갔다.

 

 마침내  영조는  새 장가를 가기로 결심했다.   영조 35(1759) 66세 임금이 52세나 어린 15

경주 김씨와 재혼의 가례를 올리니 바로 계비 정순왕후다.

 

   노래()  영조에겐  꽃보다    고운  어린  왕후가    안의  혀였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지경이었다.    이때부터 정순왕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며 조선 왕실에는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암투와 모함이 난무하고 불길한 조짐의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현숙했던 정성왕후보다 악명 높은 정순왕후를 더 회자하고 있다.

 

 내명부  수장으로  별다른  궤적이  없었던  정성왕후가 영조 원비였음은 물론 서오릉 안 홍릉이

그녀의 능이라는 사실조차 낯설기만 하다는 탐방객들의 표정이다. 그러나 정성왕후가 이곳 홍릉에

예장되고 정순왕후로 왕실 안주인이 교체되며 조선 후기사에 던진 역사적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아버지(영조)가 아들(사도세자)을 뒤주 속에 가둬 굶겨 죽이고 할머니(정순왕후)가 손자(은언군·

사도세자 아들)를 사약 내려 목숨을 끊는 전대미문의 왕실 참사가 계비 정순왕후로부터 기인된다.

이미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돼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던 천주교가 왕실에까지 파고들자 정순왕후

는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서슴지 않았다. 천주교를 국가 주적(主敵)으로 간주하면서 교인들이 당한

박해와 인명살상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 피의 숙청 서슴지 않는 정순왕후

 

 하늘이  내리는  천명을  어느  누가  거역하랴만  이 또한  원비 정성왕후 서씨가 영조보다 일찍

예척하고 어린 계비 정순왕후가 입궐하면서 야기된 역사의 분란이다.   이 모두 당쟁의 소용돌이가

빚어낸  슬픈  역사이니  당시  신료들은  나라  위해 일하지 않고 어이해서 사람 죽이는 데 목숨을

바쳤는지 후일의 사가들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이후 계비는 서()손자 정조가 등극한 후에도

금상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자신의 무고로 아사한 사도세자 아들이 용상에 올랐으니 마음 편할 리

없었다.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 세력 모두를 기용 않고 소론파를 고루 섞어 등용하는 탕평책도 성에

차지 않았다.

 

  온갖 의혹 속에 정조가 예척하자 계비 김씨는 11세 된 증손자 순조를 등극시켰다.   정순왕후는

철없는 어린 주상을 수렴청정하며 5년 동안 조정을 휘젓다가 순조 5(1805) 61세로 숨을 거뒀다.

계비는  눈을  감으며 원릉의 영조대왕 곁에 가겠다고 유언했다.   이리하여  홍릉은  정성왕후 

오른쪽을 영구히 빈터로 남겨둔 채 단릉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역대  조선왕릉  중 생전 임금이

수릉(壽陵·군왕이 살아서 능 터를 잡아 두는 것)지를 택지했다가 공터로 남겨진 건 홍릉이 유일하다.

 정서향에 가까운 을좌신향(乙坐辛向)의 홍릉은 입수 용맥이 매우 급해 능침 앞의 사초지를 높이

복토했다.   좌청룡에서  물이  흘러  우백호를 감싸는 좌수우도(左水右倒) 형국으로 이런 지세에선

성미 급한 후손이 나와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수많은 고금 서적을 독파해 풍수에 관통했던 정조가

이 점을 간과했을 리 없다.

 

○ 아버지 죽인 영조 끝까지 미워해

 

 정조는 아버지를 굶겨 죽인 할아버지 영조를 끝까지 미워했다. 영조는 부왕(숙종)이 영면해 있는

서오릉 안 명릉 가까이 묻히고자 했지만 손자 왕의 명에 따라 동구릉 내로 가게 된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살아생전의 권세가도 죽고 나면 이 지경이 되는 법이다.   이래서  조선  선비들은 바로

살려고 애를 쓰며 자신의 행적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

 

 영조가  예장된 원릉 자리 또한 예사로운 터가 아니었다.   일찍이 제17대 효종대왕을 안장했던

영릉(寧陵)  초장지로  능침  석물에  금이  가자  광중에  물이 난다 하여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

곁으로  천장한  곡절  있는  자리다.   이 또한 치열한 당쟁의 산물이었지만 여기에는 왕릉풍수의

무서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자고로 사가에서조차 파묘한 묘 자리는 지기가 샜다 하여 다시 쓰지 않았는데 하물며 왕릉이야

말할 나위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정조는 할아버지 능지를 굳이 영릉을 파묘한 자리로 옮겨 썼다.

정조의 내심은 당시 묘제를 면밀히 살펴보면 금세 드러나고 만다.

 

   고금의  장법에  따르면  일반  묘의  광중은  3( 1m)  정도를  팠고  왕릉의  현궁(玄宮)

십자왕기설에 따라 열 자( 3m) 깊이로 팠다.  ()의 깊이에 임금의 시신을 안치하고 석관을

덮으면 곧바로 자였다. 따라서 일반 사가에서 십 척 깊이로 매장함은 역모에 해당됐다.

 

 세종대왕 영릉(英陵)은 광주 이씨 문중의 선조 묘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천년길지 명당 기운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이  바로 이 같은  사가와  왕릉풍수의 다른 점에 있으나 원릉

자리는 이미 효종을 예장하며 열 자 깊이로 판 파혈지(破穴地). 할아버지가 미워 기가 샌 자리에

 일부러 능침을 조영한 정조는 참으로 무서운 군왕이었다.

 

 차라리 정성왕후 서씨는 현재의 홍릉에 혼자 있는 편이 낫다.

 

 

27.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2>추존 장조의황제 융릉 
뒤주 속 숨 거둔 사도세자 향한 `孝心'의 결정체 / 2010.11.05 

 

 

 

 

추존 장조의황제의 융릉.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천추 한을 덜기 위해 능침 앞 정자각을

비껴 세운 정조대왕 효심이 돋보인다.

 

 

 

융릉의 원찰 화성 용주사. 정조가 심은 대웅전 앞 회양나무가 괴사한 채 쓸쓸히 서 있다.

  사도세자(1735~1762)  열네  살이던    늦가을.   영조대왕이  세자를  대동한  채 시종들을

거느리고 궁궐 뜰을 거닐며 국정 국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터를 바라보던

세자가 부왕에게 물었다.

 “아바마마, 왜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으시옵니까?

 “나라의 재정이 부족해 중건하기가 어려운 것이로다.

 “중국 요·순 임금은 무엇이든 하고자 하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호응했다던데 아바마마께옵서는

저 경복궁 하나를 중창하지 못하시옵니까? 혹시 성군이 못되신 것은 아니옵니까?

 순간,   대왕의  용안이  주토빛으로  변했다.   “이런 발칙한 놈 같으니라구.   네 녀석은 얼마나

성군치도를 잘하는지 내 몸소 지켜볼 것이다.

 때마침 조정 안 노론 측 중신들이 세자의 서정(庶政) 대리를 영조에게 건의해 왔다. 차기 임금에

대한 일종의 정무 수업으로 금상 밑에서 사소한 국사 처리를 익히는 제왕 실습이었다.   이듬해 봄

(영조 25년·1749) 대왕은 열다섯 살 된 세자 선에게 서정을 위임하며 서릿발 같은 엄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세자는 조정의 대·소사 일체를 모두 품의하여 처결토록 하라.

 부왕의  속을  모르는  세자가  열심히  정사를  돌보며 사사건건 주상께 아뢰었다.    작은 일을

품의하면 “그것도 해결 못해 알리느냐”고 꾸중했다.    용기를 내 단독으로 행하면 “작은 것이라도

모두 고하라 했거늘 왜 혼자 처결했느냐”고 문책하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마침내  세자  행동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왕 앞에서  눈조차 제대로 못뜨고

대신들과  마주치면  슬슬  피했다.   영조의 세자에 대한 증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주눅 든

세자에게서 어느 날 갑자기 서정 대리권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권력의  향일성(向日性)이란  무정하기  이를    없는  법이다.    부왕의  버림을  받은 세자는

이튿날부터 허수아비였다. 동궁에 혼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 때로는 큰 소리도

질렀다.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면 5년 전(10) 가례를 올린 세자빈 혜경궁 홍씨(1735~1815)에게

분통함을 토로했다.  홍씨는 노론 측 핵심 인물인 영의정 홍봉한(풍산 홍씨)의 딸로 매우 총명하고

조신한 여자였다.

 세자의 이상행동은 어릴 적부터 감지됐다. 천자문을 배우다가 사치할 치()자를 짚고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사치”라고  벗어 던졌다.   영조가 소싯적 쓰던 칠보 감투를 씌우려 했으나

 “이것은 더 큰 사치”라며 끝내 거절했다. 안타까운 의대(衣帶) 결벽증이었다. 열 살이 되면서부터는

정치에 대한 안목까지 생겨 부왕과 조정 중신들을 놀라게 했다.

 어느 날 세자는 신임사화에 연루됐던 소론을 몰락시킨 노론 측 처사를 호되게 비판했다.

신임사화는  장희빈 아들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파와 숙빈 최씨 아들 영조 편에 섰던 노론파 간의

정국  주도권  싸움으로,   경종이 즉위(1721)하며 노론 측이 몰살당한 정변이다.   권력은 무상한

것이어서 영조가 즉위(1725)하자 이번에는 노론이 소론을 몰살시켰다.

 당시  조정  안 세력  균형은  노론이  우세했으나 영조의 절묘한 탕평책으로 소론 세력도 무시

못했다.   이런 판국에서 세자는 부왕을 용상에 등극시킨 노론 측을 철없이 매질한 것이다.   노론

대신들은 자파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일찌감치 세자를 견제하는 게 상책이라고 중론을 모았다.

노론은 영조의 가장 큰 열등감인 적통대군 탄출을 자극했다.  이런 연유로 66세의 영조가 52세나

어린 경주 김씨에게 새 장가를 가니 계비 정순왕후(1745~1805).  당시 열다섯 살이었던 계비는

노론 중추 세력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사도세자보다 열 살 아래였다.

 젊은  계모를  모시게  된 사도세자의 정신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순간 발작과 착란 증세가

심해졌고 궁녀를 목 베어 죽이는가 하면 여승을 몰래 입궁시켜 희롱까지 했다.   영조 37(1761)

에는 평안도 관찰사 정희량의 계교에 말려 비밀리에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여색에도 빠졌다.

이 모든 비행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려는 김한구·홍계희·윤급 등의 음모로 계비에게 전달됐고,

정순왕후는 더욱 부풀려 영조에게 고했다. 이럴 즈음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오점 10여 조목을 들어

영조에게 상주(上奏)했다. 여기에 폐숙의 문씨와 그 오라버니 문성국도 가세했다. 대로한 영조가

나경언을  목 베고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내린 뒤 자결할 것을 명했다.   영조 38(1762) 세자

나이 스물 여덟 살이었다.

 세자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엎드린 채 고두배를 하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자진을 거부하자 영조는 “소주방에 있는 쌀 담는 궤를 가져오라”고 엄명을 내렸다.

열한  살의  세손(정조)  할바마마  곤룡포를  붙잡고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간청했으나

“나가라”는 불호령만 받았다.  세자는 순순히 어명을 받으면 부왕의 진노가 풀릴까 하는 심정으로

뒤주 속에 들어갔다. 영조는 서둘러 대못을 치게 하고 편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버님, 아버님! 소자가  잘못하였사오니  빛을 보게 해 주소서.   이제는 아바마마가 하랍시는

대로 하고 글도 잘 읽으며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부디 이리 마소서.

 8일째 되던 날 기척이 없어 뒤주 속을 열어 보니 세자는 쪼그리고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가장  먼저  세자  주검을  확인한 영조가 망연자실했다.   세자가 죽은 뒤 양주 배봉산에서 장사

지내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영우원(永祐園)으로 부르도록 했다.    그리고는 세손(정조)

이복  큰아버지  되는 효장세자 앞으로 입양시켜 대통을 이었다.   그러나 영조가 승하한 뒤 정조

임금으로 등극하며 첫 옥음을 내렸다.

 “짐은 효장세자 아들이 아니고 사도세자 아들임을 분명히 하노라.

 그리고는  정조  1(1776)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어머니  홍씨  궁호를   혜빈에서

혜경(惠慶)으로 추상했다.   정조 13(1789) 영우원을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 화산

기슭으로  천장하며  현륭원(顯隆園·사적206)이라  고친 뒤  근처의  용주사를  크게 중창해

원찰로 삼았다.

  이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고종황제 광무 3(1899) 10월 장조(莊祖)대왕과 헌경왕후로

추존된 뒤 같은 해  11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상하고 능호는

융릉(隆陵)으로 격상됐다.   비록  왕위에는    올랐지만  정조 이후 조선 임금 모두가 사도세자

혈손이란 점에서 후기 왕실사에 장조의황제는 자리매김이 큰 추존왕이다.

 계좌정향(서로 15도 기운 남향)의 융릉은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는 화려한 상설을 갖추고

있다.   세자  신분의  묘인데도  병풍석을 설치하고 무인석까지 세웠다. 정조는 융릉 앞 정자각을

세우며 어명을 내렸다.

    “능침 앞 좌향을 피해 정자각은 우측에 세우도록 하라. 뒤주 속 암흑에서 죽어 간 아버지 묘

문까지 막아 답답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능침을 조영하던 대소신료 모두가 대성통곡했다. 이래서 융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능침 정면과 비껴 서 있다.

 

 

28.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2>추존 장조의황제 융릉

혜경궁 홍씨 기구한 운명 閑中錄<한중록:혜경궁 홍씨의 회고 집필록> 恨中錄인가/ 2010.11.12

 

 

 

  사도세자  융릉의  소나무 군락지.  솔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를 정조가 씹은 후 능침 앞 솔숲에는

해충이 범접하지 못한다.

 

 

사 진 설 명

 사도세자 선( )을 둘러싼 영조대왕 당시 왕실 내명부와 조정 분위기는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누구  하나  세자편이  돼 거들어  주기는커녕 말 그대로 절해고도에 유리된 고립무원의 사면초가

처지였다.

 의대(衣帶)결벽증과  기상천외한  언행으로  일찍이 부왕 눈 밖에 난  사도세자와  함께,  해괴한

습벽으로 측근 신료들을 불안케 하기는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이인좌의 난(영조 4년·1728) 평정

이후  이상한  의심  행태를 자주 보였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은 즉위 초 탕평책을 급히 서두르다

권력 축에서 밀려난 소론 측이 왕권을 뒤엎으려 한 역모사건이다.

 이후 영조는 죽을 사()자와 돌아갈 귀()자를 보면 신경질적으로 과민반응했다.    조의(朝議)

때나  외출    입었던  옷은  반드시 갈아입었고 불길한 말을 하거나 들었을 경우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었다. 심지어는 서정대리를 분담시킨 세자한테 대답을 들은 뒤에도 서둘러 귀를 닦았다.

 대신들은 부전자전이라며 크게 우려했다.

○ “죽는 것이 상책이나 세손이 서러워”

 생모 영빈 이씨도 아들 사도세자의 자결을 명한 남편 영조에게 통곡하며 사정했다.

 “고질이  점점  깊어  이미 중병이 되었음을 어찌 책망하오리까.   소인이 차마 모자 간 정리로는

못할  일이오나  대처분을  내리시되  세손(정조)  모자만은 보살펴서 종사를 편안케 하시옵소서.

 세자빈 혜경궁 홍씨 또한 시아버지 영조의 냉혹한 결단을 돌이키기엔 대세가 글렀다고 판단했다.

홍씨는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閑中錄)에 당시의 피할 수 없는 여인의 숙명을 이렇게 적었다.

 “나 차마 그의 아내 입장에서 이 처분을 옳다고는 못하겠으나 일인즉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내가 따라 죽어서 모르는 것이 상책이겠으나 어린 세손이 있어 결행치 못하다.   다만 세자와 만난

연분을 서러워할 뿐이다.

 노론 측 핵심 인물이었던 장인 홍봉한도 사도세자 편이 아니었다.   천방지축의 세자는 집권세력

노론 중신들과 대립각을 세워 후일 등극하면 축출해 버리겠다며 벼르고 있던 터였다.  목전의 권력

앞에 혈연이 대수겠는가.

홍봉한은 아우 홍인한과 함께 대소신료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 것도 같은 격간도동(膈間挑動)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세자 증세를 공개하며 한숨지었다.

 명철총민했던 어린 세손은 저간의 이런 정국 구도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할아버지(영조),  서조모(정순왕후),  외할아버지(홍봉한),

외종조부(홍인한)를 죽을 때까지 미워했다.  영조 명으로 양주 배봉산에 묻힌 아버지 묘(영우원)

화성  명당으로  천장해 현륭원으로 격상시켰다.  세자 신분의 원()을 화려한 왕릉격으로 조영해

놓고 비통하게 굶어 죽은 아버지를 못 잊어 자주 찾았다.

○ 정조, 융릉의  송충이 씹으며 자탄

 어느    모춘(暮春) 융릉에 다시 온 정조가 갑자기 발길을 멈춰섰다.   능침 앞 솔잎을 송충이가

갉아먹고 있는 것이었다. 냉큼 손으로 잡아 입으로 씹으며 구슬피 자탄했다.

 “네  아무리  인간사와  무관한 미물일지언정 어찌 감히 이곳 송엽을 먹이 삼아 연명하는고! 

아비 설운 사연은 북망산 뜬 구름도 알겠거늘 미천한 그대 미물이야말로 덧없이 미망하도다.

순간, 사도세자 능역은 배종했던 고관대작들과 궁궐 나인들의 통곡소리로 진동했다. 능행을 호종한

신하들까지  모두  합세해  송충이를  잡아  씹어 없앴다.   이후부터 융릉 앞 소나무에는 송충이와

해충이 범접 못했다.

 비운의  사도세자는  이처럼  아들  잘 둔 덕에  추존  황제위까지  오르지만 정작 그의 권속들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을 살다 갔다. 혜경궁 홍씨는 81세까지 장수하나 표독한 연하 시어머니

 정순왕후  등쌀에  오금  한번  펴지  못한  채 기구한 생을 마감한다.   설상가상으로 아들 정조의

친정에  대한  보복으로 한은 깊어만 갔다.   2(의소세자·정조) 2(청연·청선공주)를 뒀으나 장남

의소(懿昭)세자는 3세 때 조서했다.

 사도세자는  1후궁  숙빈  임씨에게서  3  은언군과  4  은신군을  득출하고 제2후궁 경빈

박씨한테  5  은전군을 얻는다.   비록 세 왕자는 사사되거나 양자로 대를 잇지만 말기 조선왕실

혈통이 이들에 의해 승계됨을 주목해야 한다. 어느 누가 다난한 인생사를 장담할 것인가.

공교롭게도 영조는 자신이 굶겨 죽인 아들을 통해 조선왕조가 문닫을 때까지 왕대를 이었다.

 은언군은  서학(천주교)  몰래  접했다가  할머니  정순왕후한테 발각돼 사약받고 분사했으나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  삼형제를  남겼다.   이 중  막내  전계군이  25대 철종대왕 생부가 되는

전계(全溪)대원군이다. 철종은 후사 없이 승하했다.

 은신군  가계는  양자로  이어지는 극적 반전을 거듭한다.   숙종의 6남 연령군(영조 이복동생)

후사  없이  서세하자  영조는  부왕이  아꼈던  연령군  앞으로  자신의  손자  은신군을  입양시켜

봉사(奉祀)토록  했다.   은신군  역시 계대를 잇지 못하자 이번에는 왕손 이병원(인조 3남·인평대군

6대손)의 아들 남연군을 다시 양자로 들여 후사를 도모했다. 남연군은 흥녕군·흥완군·흥인군·흥선군

네 아들을 낳아 왕실을 번창시켰다.

 이 중 막내아들 흥선군이 제26대 고종황제의 생부되는 희대의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당시  왕실계보상  후일  흥선군 아들이 보위에 오르리라 예상한 사람은 조선 천지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왕실 계촌으로 따지자면 흥선군은 당당한 영조대왕의 고손자가 되는 항렬이다.

○ 칼날 밟 듯 살아 온 일생사 서술

 은전군은  홍대간  등이  역모를  일으켰을 때 왕으로 추대됐다는 죄목으로 이복형 정조에 의해

사사당했다.  은언군 2남 풍계군을 입양해 대를 이었으나 순조→헌종→철종조에 이르는 안동 김씨

60년 세도  치하에  수명을 다하고 죽은 사도세자 왕손은 불과 손꼽을 정도다.   정조 역시 증손자

되는 24대 헌종이 후사를 못 이어 왕실 대통은 이어지나 자신의 혈통은 단절되고 만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홍씨가  회갑 되던 해(영조 19년·1795) 친정 조카 홍수영의 간곡한

소청으로 쓰여진 회고록이다. 61·67·68·71세 등 네 번에 걸쳐 집필됐으며 당시 붕당의 미묘한 문제,

소름  끼치는  온갖  무서운 사건 속에서 칼날을 밟으며 살아 온 일생사가 산문체 형식으로 서술돼

있다. 한중록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경종(장희빈 아들·영조 이복형) 계비  선의왕후  어씨가 거처하던 저승전이 빈집 된 지 오래인 데

어느 날 사도세자가 강보에 싸인 남의 아기를 데려다 홀로 두게 했다. 취선당(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던 곳)에는  소주방을  만들어 자신의 유흥 오락처로 만들었다.   또한 저승전에서 퇴출당한

궁녀들을  다시  불러들여  새로  입궁한  궁녀들과  싸우게  했다고 적고 있다.  영조는  장희빈과

경종으로 인해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장본인이다.

 영조대왕과  사도세자가 부자지간으로 얽힌 뼈저린 악연-.   그래도 역사는 ‘어찌 아비가 자식을

죽일 수 있느냐’고 아들 정조의 한이 서린 융릉 능상에서 장탄식을 몰아쉰다.

 

 

29.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24>헌종대왕 경릉()

수렴청정·당쟁에 두손 묶인 `허수아비 제왕' / 2010.12.31

 

       

 

조선 최초 삼연릉으로 조영된 헌종대왕 경릉. 원래 선조대왕 천장지로 동구릉 내 있으며 오른쪽이

현종, 중앙 효현왕후, 왼쪽 효정왕후 순이다.

 

 

 

 

‘근묵’에 수록된 헌종 어필. 천하명필이었다.

조선 왕조사를 섭렵하다 보면 왕은 왕이었으되 치적이 묘연한 임금이 더러 있다. 이를테면 제12

 인종, 13대 명종, 18대 현종, 20대 경종이 대표적인데   24대 헌종대왕(1827~1849) 또한

보위에  올라    했는지  모르는  임금이다.   이들 모두 재위 기간이 짧거나 단명한 탓도 있지만

수렴청정이나  당쟁· 세도에 말려 ‘남의 인생’을 살다 간 비운의 제왕들이다.   이 중에는 천수를 못

누리고 독살당한 군왕도 있다.

 총명했던 아버지(추존 문조익황제)가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희생당할 때(순조 30년·1830) 헌종은

네 살이었다. 새까맣게 속이 탄 할아버지(순조)가 왕세손으로 책봉해 놓고 시름시름 앓더니 4년 후

등하(登遐)했다. 이해 8세로 제24대 왕위에 오르니 조선 역대 임금 중 최연소 왕이 된 것이다.

8세에 임금 오른 조선 최연소 왕

  요즘의  초등학교  1학년생이  삼천리 강토를 통치할 수 있겠는가.  조정 권력은 당연히 할머니

(순원왕후·안동 김씨) 수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죽음의 내막을 훤히 아는 어머니(신정왕후·풍양

조씨)  또한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일찍이 할아버지가 안동 김씨 세도평정을 위해 정략적으로

맞이한 며느리였다. 그래도 조정 권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순원왕후 명에 따라 조종됐다.

  용상에  앉은  어린  임금  뒤에 발을 치고 내리는 순원왕후의 어명은 동지섣달 얼음장보다 더

차가왔다. 국사의 모든 결재는 할머니한테 나왔고 헌종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있더라도 순원왕후

한테 품의한 뒤에야 시행했다.  등극 직후 아버지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한 뒤 할머니는

 대왕대비로, 어머니는 왕대비로 진상됐다.

 철없는 왕의 어명을 빙자해 순원왕후는 무소불위의 전권을 휘둘렀다.   부정한  과거  조작으로

척족들의 대거 등용을 비호하는가 하면 매관매직으로 국가 기강이 무너지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이럴수록 민심은 등을 돌렸고 ‘인간 모두가 태어날 적부터 평등하다’는 서학(천주교)의 가르침에

 동요됐다. 보다 못한 헌종이 옥음을 내렸다.

   “과거  시험장에  사사로이  들어와 염문한 자는 과장(科場)을 어지럽히고 어명을 거역한 죄로

다스릴 것이오. 세상에 나올 때부터 과장의 법을 어겼는데 후일 어떤 일을 그에게 맡길 수 있겠소.

순원왕후 수렴청정 국가기강 무너져

  부패한  세도  권력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삼정마저 문란시켰다.  질병·재앙으로

아사지경에  있는  농민들  땅을  헐값에  매입하고,  권문세가  자식들  군역은 교묘히 면제받거나

노복들이 대신했다.  더더욱 격분한 건 환정의 조작이었다.  봄철  춘궁기 양식을 대여해 주고 가을

추수기 때 배로 거둬들이는 곡식에 모래를 섞고 저울눈까지 속인 것이다. 마침내 민초들이 분노했다.

 순원왕후는 민심의 표적을 엉뚱한 서학쪽으로 급선회시켰다. 팽배한 사회적 혼란 원인을 서학의

민심교란 탓으로 돌려 천주교 압살에 착수한 것이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를 처형하고

유진길·장하상 등  수많은 국내 천주교인을 학살했다.   헌종  5(1839)  기해박해로  한국 최초

김대건 신부도 이때 처형돼 군문효수됐다.  오가작통법으로 교인들을 색출하고 천주교를 엄금하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했다.

  악몽 같은  질곡의  세월도  유장할  수만은 없는 법.  금상의 나이 15(헌종 7년·1841)  되자

국법에 따라 순원왕후도 철렴(撤簾)했다.   23세에  청상과부가    34세가  된 ‘조 대비’ 신정왕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조 대비는 시어머니가 하던 대로 친정 풍양 조씨 일문을 조정의 핵심요직에

 배치했다.    아버지 조만영은 주상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겸직하고 숙부

조인영, 조카 조병헌, 조병구(조만영 아들) 등이 실세로 부각됐다.

 헌종은 또 허수아비가 됐다.   안동 김씨·풍양 조씨 문중 간 정권 교체기에 파생된 온갖 가렴주구

와 인명살상의 고통은 모조리 무고한 민초들 몫이었다.   생업을 포기한 유민들이 도처에 속출하고

임금 노동자나 광부로 전락한 빈민들은 사회불안 요인으로 집단화됐다. 우려는 곧 현실로 닥쳐왔다.

 헌종 2(1836)에는 남응중·남경중 등이 은언군(사도세자 3)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려다 누설돼

능지처참당했다.   8년 뒤엔 의원 출신 민진용이 또 다른 은언군 손자를 옹립하려는 역모가 발각돼

멸문지화를 입었다. 이 같은 일련의 모반 사건들은 조정 기반이나 정치적 세력이 전무한 중인·몰락

양반들이 작당한 것이어서 사회적 충격은 더욱 컸다.      누구나 넘볼 수 있을 만큼 왕권이 우습게

보였던 것이다.

 이런 난리 통에 헌종은 전국에 창궐하던 천연두까지 걸려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소생했다.

설상가상으로 금상에게 후사가 없고 옥체마저 미령해지자 외척세도는 끝간 줄을 몰랐다.   사소한

트집으로도 안동 김씨 세력과 사생결단해 민생은  피폐되고 아사자는 산적했다.   백성들은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난 걸 원망하며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길 고대했다.

 헌종은 일찍부터 학문을 가까이하며 호색은 멀리했다. 11세 때 가례를 올린 원비 효현(孝顯)왕후

안동  김씨(1828~1843· 영흥부원군  김조근  )  후사  없이  16세로  일찍 승하했다.   이듬해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1831~1903·남양 홍씨)  계비 효정(孝定)왕후로 맞았으나 역시  태기가

없자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는 초조해졌다.

왕권 무너지고 민초들은 살길 `막막'

 할머니와 어머니는 왕실 대통을 잇기 위해 제1후궁 숙의 김씨, 2후궁 경빈 안동 김씨, 3후궁

정빈 파평 윤씨를 정해 연일 합방토록 강권했으나 헌종은 이를 기피했다.      숙의 김씨가 유일한

혈육인 옹주를 출산(1848)했으나 해산 당일 사망했다.    헌종은 계비전과 후궁전에서 나올 때마다

다리를 휘청거렸고 두 눈엔 눈곱이 꼈다. 명 재촉을 한 것이다.

   호색엔 철골도 녹아난다 했다.    1849  운기  허탈로  누운  18일 만에 창덕궁 정침에서

훙서했다.    펴보지도  못한  나이  23세였다.     재위 14 6개월 19  동안 순원왕후가  7년을

수렴청정했고 수재·역병·기근·역모로 시달린 세월이 9년이었다.  조정에서는 원비 효현왕후가 묻힌

동구릉 내 경릉(景陵) 우편에 예장하고 능호는 그대로 쓰기로 했다.

  경릉을  찾은  참배객들은  조선 최초의  3연릉(三連陵)  의아해 한다.   광무 7(1903) 계비

효정왕후가  승하하며 함께  안장됐기 때문이다.  ()에서  ()쪽을  바라볼 때 맨 오른쪽이

헌종대왕이고  중앙이 원비 김씨,  왼쪽이 계비 홍씨다.  우상좌하(右上左下)  왕릉풍수  법도를

철저히 따른 것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세 개의 능이 조영된 특이한 구조며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이 하나의 곡선으로

연결돼 거대한 장방형을 이룬다.   부부가 모두 한 방을 쓰는 격이다.   능지에는 경좌갑향(북으로

15도 기운 동향)으로 기록돼 있으나 실제 측정한 좌향은 유좌묘향의 정동향에 가깝다. 향법(向法)

상 나경으로 15도 오차는 후손 발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각도차이다.

 원래 경릉 자리는 제14대 선조대왕을 초장했던 목릉 터다. 왕실이 발흥하는 길지 명당이었으면

왜 천장을 했겠는가.  후사를 잇지 못한 임금은 죽어서도 서러운 법이다.  헌종과 효현왕후는 광무

3(1899)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와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로 각각 추존되고,   효정왕후는 같은

해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로 살아서 진봉됐다.

 

 

3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5>철종대왕 예릉<>

순원왕후<안동 김씨>, 철저한 감시 허수아비 임금 만들어 / 2011.01.28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철종 대왕과 철인왕후의 예릉. 조선왕릉 상설제도에 따른 마지막

왕릉으로 석물들이 우람

 

 

인천광역시 강화읍에 있는 철종 생장가. `용흥궁'이란 편액은 흥선대원군 친필이다.

  24  헌종이  23세로  예척(1849)하자  왕실  내명부(內命婦·왕비와 후궁을 일컫는 총칭)에는

조손(祖孫) 3대 과부가 동석하게 됐다.

61세의 안동 김씨 순원왕후(순조비·1789~1857),   42세의 풍양 조씨 신정왕후(추존 문조익황제비·

·1808~1890), 19세의 남양 홍씨 효정왕후(헌종 계비·1831~1903)였다. 조정 안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당시 세 문중 간 대결은 재빠른 기지로 옥새를 확보한 순원왕후의 안동 김씨 측이 승리했다.

환갑을 갓 넘긴 노련한 순원왕후였다.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연명하는 19세 떠꺼머리총각 원범(元範)을 데려다 임금(철종·1831~1863)

자리에 앉혀  놓고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다.   졸지에

생포돼 와 생사기로에 선 죄인처럼 떨고 있는 철종에게 순원왕후가 엄히 분부했다.

 “주상은 똑똑히 들으시오.   사람이 책을  읽지 않고  고사(故事)  어두우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소이다.  전에 배운 학문이 현달하지 못함을  탓하지 말고 강관(講官)의 가르침에 따라 환골탈태

(換骨奪胎)토록 매진하시오.

  철종은 목숨을 거두지 않고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아무리 배운 게 없어도 조부모

(은언군 부부)· 종조부(은전군)· 아버지(전계대원군)· 백부(상계군)· 이복형(회평군) 모두가 왕이 되려

했다는 역모에 연루돼 몰살당한 걸 알고 있었다. 용상이나 왕관보다 사는 게 우선이었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고두배하며 조아렸다.

 “그저 하랍시는 대로 따르겠사오니 목숨만은 부지케 해 주옵소서.

   이날 이후 철종은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철저한 감시 속에 허수아비 임금이 됐다.  거처는 대비

내전 곁으로 정했고 수라상도 같은 주방에서 조리해 진상토록 했다. 생사가판(生死可判)권을 맡긴

것이다. 금상은 미동도 않으면서 대소사를 대비한테 품의해 결정했고 그 세월이 9년이었다.

  2년 후(철종 2년·1851)에는 영은부원군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1837~1878)

간택했다.   6세 연하의 인물 곱고 조신한 규수였다.   당대 권문세가  처녀를 각시로 맞은 철종은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강화도령’으로 농사나 짓고 있다면 엄두도 못 낼 배필이었다.

 주상 침전에 꽃다운 후궁들 강제 입실

  꼭두각시 임금이 된 3년째로 22(1852) 되던 해.  대비 김씨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주상이 친정

토록 했다.  어떤 명분으로도  스물이 넘은  임금을 망석중이로 만들 순 없었던 것이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무지렁이 촌부로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철종이었지만 당시 최고

문장의 왕사들로부터 습득한 학문은 개안(開眼)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치도(治道)와 치세(治世)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세도정권 입장에선 날로 학문이 깊어가는 철종이 위협적 존재로 다가왔다. 남자를 망가뜨리는

데 술과 여자만 한 게 또 있겠는가. 때마침 15세로 간택된 중전 김씨에겐 수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었다.   순원왕후  엄명으로  주상  침전에  꽃다운  후궁들이  강제로 입실했다.  최음제가 섞인

감로주에 기름진 안주가 밤낮없이 철종을 녹여냈다.

   임금도  처음엔  이게 바로  무릉도원인가 싶었다.  중전 김씨를 포함해  ▲제1후궁 귀인 박씨

 ▲제2후궁 귀인 조씨    ▲제3후궁 귀인 이씨   ▲제4후궁 숙의 방씨   ▲제5후궁 숙의 김씨

 ▲제6후궁 숙의 범씨    ▲제7후궁 궁인 박씨(직첩 없음)    ▲제8후궁 궁인 이씨(직첩 없음)

 ▲제9 후궁 궁인 남씨(직첩 없음) 등 열 명의 여인을 밤마다 번갈아 가며 만취된 채 방사를 치렀다.

      국사를 처결해야 할 군왕은 침전에서 나올 때마다 휘청거렸고 부액(扶腋) 받아 오르는 용상

계단을 헛디뎌 고꾸라지기도 했다.   두 눈에는 누런 눈곱이 덮어 시야를 가렸고, 앉았다 일어서면

수십 개의 별이 어른거렸다.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이럴 때 세도 권신들은 조정인사에 재무결재

까지 조목조목 아뢰었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최악의 학정·민생고

 “과인이 무얼 안다고 그러시오. 경들이 다 알아서 하시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조정 대신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어전을 물러 나왔다. 관작(官爵)을 팔고 사는 매관매직이 모두

뜻대로 성사된 것이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다 보니 과거제도는 무용지물된 지 오래였고 아첨과

뇌물만이 보신책의 우선이었다. 어쩌다 정신이 든 철종이 권신들을 향해 일갈했다.

    “과거는 정실과 세력을 좇기 급급하고 명문가 자제들은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채 발탁되니

종묘사직이 암담하오. 탐관오리 폐해는 홍수·맹수보다 극심해 만백성을 유랑시키고 있소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을 구렁에서 구휼하지 못하는 과인의 처지가 참으로 비감하기만 하오.

 오죽하면 순원왕후조차 친정 척족들에게 벼슬을 내리며 집안 문호(門戶)가 지나치게 영성(盈盛)

하는  것을  염려했겠는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못살겠다  아우성이었고 말세가 임박했다는

도참설이 난무했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최악의 학정에 민생고가 겹쳤다.

   강물이 범람하면 둑이 붕괴하고 독이 넘치면 깨지게 돼 있다.  마침내 민중이 봉기했다. 서학

(천주교)과 새로 창도된 동학(천도교)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고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진주·함흥·제주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당황한 철종과 세도정권이 진무사를 파견하는 등

미봉책을 썼으나 불 위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바야흐로 국난이었다.

  이즈음 왕실 내명부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화신 순원왕후가

 69세로 훙서(철종 8년·1857)한 것이다.  안타까운 역사가 내리막으로 치닫는 전환점이었다. 이제

왕실 내 최고 어른은 명실공히 풍양 조씨 신정왕후(조대비)였다.

   그러나 숨 가쁘게 질주하는 유장한 역사와 폐인이 된 철종과는 무관했다.   이미 ‘섹스중독’의

중병에  든 제왕은  정사를  잊은 지  오래였고  건장했던  육신은  급속도로  쇠잔해졌다.    이날

(1863. 12. 8)  금상은  궁궐  후원에서  궁녀를 뒤쫓으며 희롱하다 갑자기 넘어졌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또 국상이 난 것이다.    나무꾼을 끌어다가 억지 왕위에 앉힌 지 14 6개월

 만이었다. 1 왕후 9 후궁 속에 후사 하나 남기지 못했다.

      철종은 살아생전 “내가 죽거든 희릉(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릉) 오른편 언덕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중종대왕 초장지였으나 문정왕후(2계비) 시샘으로 억지 천장된 명당 자리다.

고종이  등극하며  대리  섭정이    흥선대원군은 이곳(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좌좌오향의  정남향으로  장사  지내며    호를  예릉(睿陵)으로 정했다.   후일(고종 15년·1878)

 철인왕후가 승하한 뒤 동원 쌍분으로 조영됐다. 오늘날의 서삼릉으로 사적 제200호다.

왕위에 오른지 14 6개월만에 서거

    흥선대원군은 예릉을 조성하며 역대 어느 왕릉 못지않은 규모로 단장했다. 세도권력에 대한

왕권 과시와 함께 철종의 등극 과정이 개천에서 용 난 아들(고종황제) 처지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강화의 철종 생장가에 ‘龍興宮’이란 친필 편액을 내렸다.

특히 예릉은 조선 왕릉의 상설제도에 따라 조영된 마지막 왕릉이라는 데 커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철종과  왕비는  광무  3(1899)  고종에  의해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철인장황후

(哲仁章皇后)로 추존됐다.

 

 

31.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5>철종대왕 예릉<>

`혼돈의 시대힘없는 왕은 탄식만' 33세에 승하 / 2011.02.11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의 철종 생장가 유허지 비각. 부엌에 방 하나의 오두막집이었다.

 

 

    강화읍 선원면에 있는 철종대왕 외가. 염종수가 가짜 외삼촌으로 둔갑해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현장이기도 하다

철종 10(1859)의 일이다. 금상의 외삼촌을 자처하는 염가(廉哥)란 자가 엄중한 대궐 관문을 뚫고

찾아와  탑전에  부복했다.   남루한  행색에  피골마저  상접한 염가는 다짜고짜 통곡하며 임금의

누선()을 자극했다.

  “소인이 바로 전하께옵서 애타게 찾으시는 외삼촌 염종수이옵니다.  진즉 알현하지 못한 중죄를

크게 엄벌해 주소서.

 작취미성(昨醉未醒)으로 몽롱하게 용상에 앉아 졸고 있던 철종은 깜짝 놀랐다. 등극하던 해(1849)

부터 일구월심 찾아온 외삼촌이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순간 주상의 용안에선 소나기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이후 염종수는 조정 요직을 완전히 장악한 안동 김씨 주청에 의해 충청 병마절도사로 제수됐다.

얼마 안 돼  황해병사를  거치더니  1년 만에 서남해안 병권을 총괄하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직에

올랐다.   그러나  염종수의  마각은 곧 탄로  났다.   무위도식으로 빈둥대던 건달 염가(파주 염씨)

주제에 철종의 외가(용담 염씨) 족보를 위조해 일대 사기극을 벌였던 것이다.

염가, 가짜 외삼촌 행세 희대의 사기극 벌여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철종이 당장 염종수를 포박해 친국하니 과연 가짜였다. 즉각 파직시키고

참수한    효수했다.   피붙이가  그리웠던 임금은 남모르게 피눈물을 흘렸고 팔도 유민들은 다시

한번 세도권력을 비웃으며 조롱했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었다.

  자고로  우민들이  어진  스승이나  지도자를  만남은 시대적 천복이라 했다.  이때 당시 백성들

소원은  너무나  질박했다.   그저  세종대왕  버금가는 성군과 황희 정승 같은 청백리 재상을 만나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며 누명 쓰고 죽지나 않으면 천명으로 여겼다. 이런 기본권조차 지켜내지

못한 세도정권이었다.  인피(人皮)를 벗겨 내는 혹독한 가렴주구로 아사자 시체는 도처에 즐비한데

세도가 광속에서는 쌀과 고기 썩는 악취가 사방을 진동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라 안팎의 정세는 더욱 혼돈 속에 빠져들어 속수무책이었다.   ▲철종 2(1851)

관서·해서 지방의 수재·기근 ▲관북지방 화재·기근(1852) ▲호남지방 수재(1854) ▲경기지방 화재와

영남·해서지방 수재(1856)   ▲호서지방 수재(1857) ▲관북지방 수재(1860~1861) ▲삼남·관북지방

민란(1862).  여기에다 겨울 홍수와 여름 우박의 괴변이 끊이지 않았다.   백성을 함부로 하는 몹쓸

권력에 하늘마저 등을 돌린 것이다.

 철종 7(1856)에는 서·남해상에 프랑스 함대와 이양선이 출몰해 조정을 위협하며 개항과 통상을

압박해 왔다. 이즈음 세계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 열강들의 광범위한

식민정책과 자원수탈로 약소국들 운명은 풍전등화 신세였다.    국제정세에 어두워 미리 대처하지

못한 국가는 망국의 길만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가혹한 약육강식의 세계질서에 편입 못 한 나라와

민족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참혹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조정에선 망한 지 200년이 넘는 명나라를

섬기면서 청나라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안하무인으로 자만한 세도권력은 가련한 민초들의 고혈을 짜내 연일 흥청망청이었고, 처가

척족들이 두려웠던 임금 또한 하나뿐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알아서 주지육림 속에서 흐느적댔다.

철종은  1 왕후에 아홉  명의 후궁을 취해 5 7녀를 득출했으나 제6후궁 숙의 범씨 소생 영혜옹주

만이 생존해 금릉위 박영효에게 하가했다. 5 6녀 모두 출생 6개월도 안 돼 세상을 떠났고 유일한

혈육인 영혜옹주마저 시집 간 지 3개월 만에 서세했다.

나라 안은 기근·홍수, 밖에선 개항 요구

 남부여대로 타향을 떠도는 유민(流民)들은 삼삼오오 떼 지어 다니며 야유하고 수군댔다. 여자가

  따르는  염복(艶福)  탐내다가는  누구나  저 지경에 이른다며 적수공권의 걸인 신세를 위안

삼았다.   궐내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23세로  청상과부가 돼 안동 김씨 압제하에 가문마저

몰락해버린 풍양 조씨 신정왕후(조대비·추존 문조익황제비)의 철천지한이었다. 조대비는 나이 많은

시어머니(순원왕후·안동 김씨)  죽기만을  축수했고  머지않아  자신의 세상이 올 것을 확신하며

왕재(王材)를 찾고 있었다.

    이 간극을 절묘하게 파고든 희대의 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다. 풍수와

명리·주역에 관통했던 대원군은 살얼음판 같은 염량세태를 마음껏 희롱하며 천하대세를 읽었다.

후사  없이  훙서할  금상의  뒷일을  정확히 예측했던 것이다. 조영하(1845~1884·조대비 조카)

포섭해 조대비와 은밀히 내통하며 후일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고종황제 아명)을 보위에 앉히기로

내약해 두었다.   부패정권을  향한  조대비와  대원군 간 천추의 한이 안동 김씨 몰락을 자초하는

연계제휴로 가시화된 것이다.

   이런 거대한 음모를 알 리 없는 안동 김씨 일문 권세가들은 방심했다. 국익은 안중에도 없었고

가문 영달에만 미혹된 나머지 뒷날 용상에 오를 만한 영특한 왕손은 역모죄로 옭아 사사시켰다.

이럴수록  대원군은  굴신과  굴종을  주저하지  않으며 시정잡배 파락호로 위장해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

    어느 날 철종이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모두 할 수 있다’는 권신들을

향해 용상에서 꾸짖었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도 연명 못해 굶어 죽는데 팔도 관리들이 올린 장계를 보면 선정 아닌 것이

없소. 어찌해서 수령·방백들마저 민생을 이리도 소홀히 한단 말이오. 그대들이 조정 녹봉을 타 먹는

백관들이 맞소이까.

 그래도 세도정권은 우이송경이었다. 이미 승하한 임금과 왕비를 칭송하는 시호·존호의 추시(追諡)

  몰두했고  임금이  내리는 사패지 확보에만 혈안이었다. 철종 8(1857) 순원왕후가 훙서하자

순조  대왕과  합장하며  순종이었던  묘호를  순조로  천묘(遷廟)했다. 후궁 왕자()가 재위한 뒤

예척하면 일단 종()으로 예우했다가 적통성 시비가 사라지면 조()로 고치는 전례(典禮)에 따른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또 철종의 가계를 신원시켰다. 세도권력이 역모로 몰아 죽인 할아버지(은언군)

아버지(전계대원군)  백부(상계군)ㆍ 이복형(회평군)  복작  안 시키면  대통승계 법통에 중대

하자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결자해지였으나 소가 웃을 아전인수의

자가당착이었다.

뒤늦게 치세에 힘쓰려 했으나 때는 늦어

 뒤늦게  철들어  치세와  치도를  깨닫게  된 철종은 무기력한 군왕의 처지를 비관하며 탄식으로

밤을 지새웠다. 자신이 겪은 민생고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남다른 애정으로 백성을 살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야생마보다 강인했던 타고난 건강도 어느덧 무너져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용상에  오른 지  14년째  되던  (1863) 초가을.  쇠잔해진  육신을 부액받으며 서삼릉에 들른

철종이 희릉·인릉·소경원·효창원 등을 돌아보며 독백했다. 죽음을 직감한 영물(靈物)의 예시였다.

 “한  육신  죽어  왕릉이나 원()에 묻힌들 크게 대수로울 일이며 무명잡부 묘에 진토가 돼간들

빈부귀천이 따로 있으랴. 어찌 인간의 한평생이 이리 허망할 수 있단 말인고.

 이날  환궁  이후  철종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33세였다. 강화에 있는 철종 생장가(용흥궁)

외가(강화읍 선원면)  동네  사람들은  슬피  울었다.    원범이가 임금이 안 되고 농부로 살았으면

백수도 더 했을 것이라며 한양 하늘을 원망하며 울부짖었다.

 “묻노니, 도대체 그대들의 권력이 무엇이기에 한 사람 일생을 이토록 망쳐 놓는단 말인가.

 

32.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26> 고종황제 홍릉<>

신정왕후 "이하응 둘째 아들을 양자로 입승대통케 하라" / 2011.03.18

 

 

 

 

조선 최초의 황제릉으로 조영된 고종황제 홍릉.

을미사변으로 미운에 간 명성황후 민씨와 합폄으로 예장돼 있다.

1863 12 8. 25대 철종이 후사 없이 돌연 등하(登遐)하자 조정 안이 발칵 뒤집혔다. 26

옥좌에  과연  누가  오를  것인가.    그 당시  모든 결정권은 왕실의 수장인 익종(翼宗·효명세자)

신정왕후(조 대비)가 쥐고 있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시절, 숱한 의혹을 남긴 세자의 갑작스러운

의문사로 시어머니 순원왕후(안동 김씨)와 원수지간이 된 조 대비(풍양 조씨)는 이때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녀의 윤지는 곧 국법이었다.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성군으로 봉해 익종대왕 양자로 입승대통(入承大統)케 하라.

 안동 김씨 세도가를 비롯한 다른 근신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조정 안팎이 일순간에 의표를

찔린 것이다. 권신들 모두 이 위기를 제압 못하면 다음 수순이 궤멸임은 자명했다. 이판사판, 죽기

를 작정하고 대들었다.

 “대비마마, 익성군이 익종대왕 법통을 승계한다면 헌묘(憲廟·제24대 헌종)와 대행(大行·예장하기

전의  임금  신분·철종) 마마는  어찌  종묘에  봉안하오리까.   총명을   밝혀  통촉하시옵소서.

 정면  도전이었다.   헌종은  형이  되고  철종은  아저씨  항렬인데 어떻게 한 묘()를 건너뛰어

익성군이  보좌에  등극할  수 있느냐는  항명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조 대비도 속수무책, 피차가

단애절벽의 기로였다. 그러나 조 대비 윤음은 단호했다.

 “아우가  형에게  절하고  질항(姪行·조카)  숙항(叔行·아저씨)에게  예를  표함은  천륜  법도가

아니겠소.  경들도 알다시피 대행이 헌묘에 복배(伏拜)하고 입사(入嗣)해야 하는 만고의 역보(逆譜)

가 오히려 천지 궤변이고 꿈만 같소이다. 모두 입들 닥치시오.

 

 

 

홍릉 앞의 일()자각. 역대 왕릉의 정()자각과 달리 황제릉 앞에만 세울 수 있는 제각이다.

 세도 권신들에겐 자신들이 저지른 자업자득의 외통수였다. 또 다른 대신이 나서 주청하려 했으나

 조 대비의 표독스런 안광 살기가 좌중을 압도했다.     23세에 과부가 된 후 33년을 청상으로 와신

상담하며 56세 초로(初老)가 된 여인의 한에 누구 하나 대항치 못했다.

 “나라를  전하는  법통을  논한다면  정조→순조→익종→헌종 4대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승통돼

정법이오이다.   그런데 대행(철종)은 헌종의 아저씨로 순조의 계자가 돼 입후(入後)되니 하늘·땅이

전복됐소.   고매한 경들은 그대 가묘(家廟)에 가서 죽은  아들에게  절할 수  있겠소이까.   따라서

익성군은  익종의  둘째  아들로  입승되었으니 헌종은 황형(皇兄)이 되며 대행은 황숙고(皇叔考)

되는 것이오. 어찌 여기에 두 개의 법통이 있다는 의심이 있을 것인가.

 익성군이 곧 제26대 고종황제(1852~1919).   고종의  혈계는  사학자들조차  혼돈될 지경으로

복잡하다. 생가 혈통으로는 인평대군(16대 인조의 3) 8대손으로 남연군의 친손자며 흥선대원군

둘째 아들이나,  입양 혈계는  사도세자(21대 영조 아들)  고손자로  22  정조에게는  증손자

항렬이 된다.  사가에서도 일단 양자를 보내면 친부 족보에서 할보(割譜)돼 버려 친형제 간에도 한

촌수를 달리 계촌(計寸)하는 법이다.

 망국으로 치닫는 고종 시대에는 생경한 수사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병인양요·신미양요·병자

수호조약·임오군란·갑신정변·갑오경장·을미사변·을사보호조약·경술국치 등이 대표적이다. 세간에서

흔히 ‘육갑(六甲)’이라 지칭하는 이른바  육십갑자를  모르고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암호 같은

단어다. 천간(天干) 10(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와 지지(地支) 12(자·축·인·묘·진·사·오·미·신·

유·술·해)  구성돼  있는 육십갑자는  (하늘·남자)  (땅·여자)으로  배합돼  각각 우주섭리를

주관한다. 천간의 갑과 지지의 자가 만나 ‘갑자’가 되고 을(천간)과 미(지지)가 짝이 되면 ‘을미사변’

의 해가 된다.     12개 지지는 10개의 천간 아래  따라붙어 6회의  변신을 거듭하며 오묘한 조화를

생성시킨다.

   고종이 등극한  해인  1864년은  우연히도  갑자년이어서  육십갑자만  암기하면  계수하기가

편리하다. 이를테면 병인양요(1866)는 병인이 육갑 순서 3번이어서 고종 3년이고, 갑오경장(1894)

은 갑오가 육갑 서열 31이어서 고종 31년이 된다.

 열두 살의  고종은 용상에 오르면서  양어머니인 조 대비 조종을 받다가 곧바로 대리 섭정이 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시키는 대로 좇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종은 대원군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임금이었다. 이성에 눈떠 가던 고종은 궁녀 이씨(후일 귀인 이씨)를 총애했다. 조 대비와 대원군은

중전 간택을 서둘렀다.

대원군 부인  민씨가  친정  조카뻘 되는  여성부원군 여흥 민씨 민치록의 딸 민정호(閔貞鎬·1851~

1845)를 천거했다. 고종보다 한 살 위였다. 안동 김씨 60년 세도에 몸서리친 대원군은 부인 소청을

가납해 왕비로 간택했다.   곧 명성황후다.    경기도 여주 산골의 영락(零落) 양반 여식으로 9세 때

모친을 잃고 고아나 진배없이 자란 사고무친 환경이 대원군을 솔깃하게 했다.

 누군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알겠는가. 수모와 간난(艱難)을 극복하며 처절하게

살아온  대원군이  자초한  일생일대 최악의 실수였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 대결은 우연찮게

발단됐다.

 고종 3(1866) 민씨(15)를 정비로 맞이한 고종은 인물 없고 영악스러운 명성황후를 멀리했다.

이 틈새에 귀인 이씨가 완화군(1866)을 낳자 대원군은 세자 책봉을 서두르려 했다. 며느리 명성황후

는 삭신을 부들부들 떨며 시아버지 대원군을 증오했다.   억겁을 환생해도 풀지 못할 이 구부(舅婦)

간 앙숙대결은 마침내 500년 조선왕조를 문닫게 했다.

 이럴 때마다 고종은 참담했다. 처음엔 대원군 기세에 눌려 조정을 내맡겼으나 대리 섭정 10년째

되던 1873년 친정을 선포하며 부자 간 인연을 끊어버렸다.      22세 때다. 주마가편(走馬加鞭)으로

안하무인이 된 명성황후는 즉각 여흥 민씨 척족정권을 수립하고 내정은 물론 천정부지의 무소불위

전권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왕조 역사상 내명부 수장  중전이 외교권까지 행사하긴 명성황후가

사상 초유다.

  이후 고난에 찬 고종의 행장들은 오늘의 근·현대사와 연결되는 사실(事實)들이어서 우리 모두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사실(史實)이다. 고종은 조선왕조가 멸망한 9년 뒤인 1919(기미) 1 21

새벽 6시를 전후해 갑자기 붕어했다.     전날까지 무탈했던  고종태황제가  급서하자  망국의 한이

 북받친 조선 민중들은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며 의분에 떨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릉(洪陵·사적207)에 고종황제가 예장되던 인산(因山) 일은

마침 3 1일이었다.     이날 서울 탑골공원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우리 민족이 종교· 이념· 신분을 초월해 다함께 참여한 3·1운동이다.

   홍릉에 가면 산릉제를 봉행하는 제각(祭閣)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역대 조선왕릉 앞에 세워진

()자각이  아니라  ()자각이다.      황제릉 앞에만 건립할 수 있는 능제(). 을좌(동에서

남으로 15) 신향(서에서 북으로 15)  능침엔  을미사변(1895) 때 시해당한 명성황후와 합폄

으로 안장돼 있다. 일인들이 조선황실 번성하라고 명당을 골라 택지했을 리 없다.

 

 

33.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6>남연군 이구 <>

先親<남연군> 이장한 7년만에 고종 황제<흥선대원군 둘째 아들> 득남 / 2011.02.25

 

새 황제 탄생이 두려워 일제가 끊어놓은 남연군 묘 후룡맥. 산 양쪽의 절단 흔적이 역력하다.

 

 

 

남연군  묘 건너편의  보덕사  극락전.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가야사에 불을 지르고

고종 등극 후 새로 지어준 비구니 사찰이다.

 

남연군묘 입구에 자리한 거북이 물형의 구사봉.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변신한다.

권력에 갈급했던 자가 졸지에 득세하면 세상이 만만해지는 법이다.    하옥 김좌근(1797~1869)

청탁서찰을 품에 넣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조선 천지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대원군

은 하옥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경기·충청  지역에 소문부터 냈다.    비록 ‘상갓집 개’로 괄시받는

신세였지만 철권군주 영조 대왕의 엄연한 고손자였다.    세상에선 ‘남의 집 옥벼루 빌려 상납하고

얻어낸 게 겨우 아버지 묘 이장이냐’고 대원군을 소인배라 비웃었다.

 표리부동으로  득의양양한 대원군이 지사(地師) 정만인과 덕산 상가리를 다시 찾았다. 꾀죄죄한

예전의 대원군이 아니었다. 어딜 가나 하옥의 서찰만 들이밀면 수령·방백 모두가 삭신을 오그리며

칙사 대접을 했다.

상여로 몇날며칠 여러고을 민폐 끼치며 이운

 “정 지사, 자네는 어인 연유로 이 혈()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로 소점(所點)했는가. 흥선이가

심히 궁금하니 어서 지평(地評)을 확인해 주게나.

 “그야 대감께서 더 소상히 아시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아, 돌다리도 두들겨 본 후 건너고 아는 길도 물어가는 법이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 자기 아는 게 최고라고 거들먹거리는 놈일세. 풍수에 정답이 어디 있겠나. 욕심을 내려놓고

물탐(物貪)을 비워야 명경지수처럼 땅속이 드러나 보이는 거지.

 정만인은 대원군이  신풍(神風)인 줄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이미 선경에 든 그의 경지를 새삼

경탄했다. 그가 풀어낸 해박한 풍수 비결은 이러하다.

 풍수에서 자미원(紫微垣)은 북극 소웅좌 부근에 있는 명당이다.   오직 천제(天帝)만이 소유하고

묻힐  수 있는  궁궐이나  왕릉  터로 전해 오는 천하제일의 명당 이름이다.   자미원 물격(物格)

빠짐없이 갖춘 길지를 자미원국()이라 하는데 우리 한반도에서도 여러 곳이 입증됐다.

 한반도의  낭림산맥은  평안북도로부터 흘러 강계 부근에 맨 처음 천시원국(天市垣局)을 형성해

놓았다. 그 맥이 묘향산으로 낙맥한 뒤 번신(飜身)하면서 평양 근교를 자미원국으로 결혈시켰다.

이 묘향산맥은 또 마식령 중추맥으로 이어지며 송도(개성) 일대에 다시 자미원국을 펼치니 만월대

궁궐터다.

 이와는  달리  함경도  개마고원에서  내리뻗은  백두대간  정기가  토함산  지맥까지  연연출룡

(連連出龍)해 돌출혈로 융기하니 신라 천년 도읍지 경주 자미원국이다.  부산 금정산까지 연결되는

낙동정맥을 지칭한다. 또 하나의 자미원국은 백두산 정상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이 함경도 두류산을

거쳐 급강하하다 원산에서 갈라선다.   이 한북정맥 속기처(束氣處)에 혈장(穴場)을 맺으며 우뚝 서

용틀임한 대명당이 북악산 아래 경복궁 터다.

 말없이  경청하던  흥선대원군도  정만인의 숨겨진 내공에 내심 탄복했다.    그러나 대원군에겐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장한 후 천자가 태어날 덕산 묏자리가 당장 더 화급했다. 술술 풀어내고 있는

정만인의 부아를 은근히 질렀다.

“자네는 안다는 게 겨우 양택지뿐이라던가.그렇다면 이땅에 음택지 자미원은 가당찮다는 말이렷다.

 정만인이 깜짝 놀랐다. 나경을 들고 얼른 대원군 곁으로 다가섰다.

 “아니올시다.  바로 대감이 점지한 이 자리가 황제필출 자미원이로소이다. 임금 제()자 형국의

저 조산(祖山·혈처 뒤의 먼 산) 산세와 온갖 귀봉들이 자리한 주변 국세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응축됐던  정만인의  비장  음택풍수  한 수 한  수가  누에고치에서 명주실

풀리듯 연이어 되살아났다.    ①음택 자미원 입구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월봉(日月峰)이 있어

물의 파구를 막아야 하니  곧 일월한문(日月悍門)이다.    ②이 물 곁에  거북이나  물고기  형상의

구사봉(龜蛇峰)이 자리해    ③소와 기러기를 상징하는 금수봉(禽獸峰)에 물을 공급해야 상생할 수

있다.     ④묘 앞 오방(午方·남쪽)에는 좌룡우마의 용마봉(龍馬峰)이 받쳐줘 입궐을 대기해야 하고

⑤북두칠성을 닮은 영험한 화표봉(華表峰)이 잡신 근접을 막아야 최고의 길격이다.

묘 도굴 실패로 1만명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대원군은  덕산면 상가리 입구부터 숨겨진 양 산록의 5(五格)이 정만인 입을 통해 재확인되자

이곳이 틀림없는 왕생지지임을 더욱 믿게 됐다. 이장할 명당에 올라선 대원군은 다시 한번 놀랐다.

웅엄장대한 산세가 거대 계곡으로 중첩돼 적이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 요새처럼 안온했다. 그러나

남연군을 이장할 혈처에는 가야사(伽倻寺) 산신각 탑이 봉안돼 있었다.

 대원군 생각은 치밀하고도 용의주도했다.     예산 수덕사 본사(本寺)에서 대법회가 있다고 속여

승려들이  절을 비운  사이 가야사에 불을 질렀다.   대원군은 기왕  폐허가 된 몹쓸 땅을 묏자리로

 내주면 나중에 새 절을 지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훗날 흥선대원군  둘째 아들 명복이 왕위

(고종 황제)에 오른 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지은 절이 남연군 묘 건너편에 있는 오늘날의 보덕사

(報德寺).

 억지 춘향으로  천하명당을 얻어낸  대원군은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는  남연군 묘를 파묘해

예산까지 거창하고 화려한 상여로 이운(移運)했다.      몇날 며칠을 여러 고을에 민폐 끼칠 때마다

대원군은 하옥 대감 친필 서한을 은근히 꺼내 보였다. 안동 김씨 권문세가들도 흥선대원군이 소란

피우며 이장하는 줄은 알았으나  “그까짓 흥선군이 뭘 알겠느냐” 며 실소하며 방치했다.    마침내

남연군 유골이 장지에 이르자 대원군은 정만인을 재촉했다.

 “자네  재혈(裁穴)  어찌하겠는가.    천하에 둘 없는 자미원도 유골을 모시는 재혈이 어긋나면

수포로 돌아가는 법일세.

 “대감,  이 자리는  돌로  둘러싸인  석곽에  광중 자리에만 흙이 있는 석중지토혈(石中之土穴)

올시다. 당판에 놓인 저 옥새석을 보소서. 뒷날 소인을 괄시하면 아니 되십니다.

 곤향(坤向 · 서에서 남으로 45)  득수(물길이 들어옴)  손향(巽向 · 동에서 남으로 45) 파수

(물길이 나감)이니  좌향은  건좌(乾坐·서에서 북으로 45) 손향(巽向)이라.     파수와 향이 똑같은

손향의 당문파(물길이 직선으로 나감)이긴 하나 남주작이 가로막아 후손 발복에 큰 영향은 못 준다.

여기에  ()과 곤(득수)이 정배(正配·바른)를 이루니 풍수를 아는 지관치고 어느 누가 고개 안

숙이랴. 주역에서 건()은 하늘이고 아버지요, ()은 땅이며 어머니다.

일제, 묘 뒤쪽의 거대한 후룡맥 완전히 절단

 흥선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 묘(기념물 제80호·1989년 지정)를 이장(1846)한 지 7(1852) 만에

고종 황제가 되는 둘째아들 명복을 얻었다. 이 묘를 잘못 건드려 역사에 끼친 파장은 필설로

 형언키 어렵다. 고종 등극 후 독일 상인 오페르트와 천주교인들이 합세해 미수에 그친 남연군 묘

도굴  실패로  1만 명 가까운 교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섭정  대원군의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돼 국운을 가로막은 쇄국정치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순종 이후 또 다른 황제 출현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묘의 거대한 후룡맥을

완전히 절단해 놓았다. 남연군 묘 현장에는 그 소행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