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조선왕릉

1대 태조 ∼ 5대 문종

도화골 2017. 2. 10. 13:24

3.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 <1> 태조 이성계와 건원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왕릉 40 / 2010.01.15

 

 

 

 

건원릉 뒤의 풍수 입수처. 산 정기를 모아주는 곳으로 명당에서만 볼 수 있는 병목 지형이다.

 급보를  접한  태조  이성계는  억장이 무너졌다.  다섯째 왕자 방원(芳遠·후일 태종대왕)이 세자

방석과  그의    방번을  죽이고  왕조  개국  일등공신들인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철퇴로

주살했다는 것이다.   평소  지니고  다니던  신궁(神弓) 백우전(白羽箭)을 얼른 집어 들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때 이미 태조는 병이 깊었던 것이다. 1398 8 25, 조선을 개국한 지 7

만의 일이었다.

 태조는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왕위를  둘째  왕자  방과(芳果·정종대왕)에게  물려주고  왕사인

무학(1327~1405)대사와 양주 회암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도대체  임금  자리가 무엇이기에 어린 동생들까지 죽여야 한단 말인가.   내 이럴 줄 알았으면

호랑이  같은  방원이를  세자로  책봉하는  건데….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걸 어찌 하겠는가.

 얼핏 태조의 독백을 들은 무학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상왕 전하,  부디 마음을 내려놓으소서. 돌이켜 보면 인간사 모두가 공망한 것 아니겠사옵니까.

이제부터는 난마같이 얽힌 정사를 모두 잊으시고 남은 여생을 편히 쉬소서.

  이때 둘은 지금의 망우리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당시  태조의  나이  63세로  무학은  8살 위인

71세였다. 멀리 검암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둘은 눈빛만 마주쳐도 속내를 꿰뚫는 사이였다.

   “이젠 뒷방 늙은이 신세가 뭐 바랄 게 있겠소.   천천히  죽어  묻힐  신후지지나  있으면  미리

봐둘까 하오.

 이런 연유로 무학과 함께 잡아 둔 자리가 오늘날의 건원릉이라고 전한다. 태종 8(1408) 태조가

74세로  승하하자  태종은  하륜·김인귀  등 풍수에 능한 조정대신들을 총동원해 능 터를 결정하니

이미 무학대사가 점찍어 둔 바로 그 자리였다.

 조선왕조는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100리 안에 왕과 왕비의 무덤을 조성했다. 4㎞를 10리로

잡았으니까 40㎞에 해당한다.   능제를  지낸  임금이  서둘러  출발하면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왕릉  가운데  도성에서  100리가  넘는  영릉(여주·세종대왕)  장릉(영월·단종대왕)

융릉(수원·사도세자) 건릉(수원·정조대왕) 등에 얽힌 사연은 그때 가서 쓸 것이다.

 정사와  야사를  통해  만나는 태조 이성계의 일생은 파란만장 그대로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무인기질로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용맹한 장수였다.   역성혁명의  기회

앞에서는 무자비하게 피 흘리며 왕조를 창업했지만,  권력의  정상에서는  자식들의 골육상쟁으로

필부필부(匹夫匹婦)만도 못한 고통과 회한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일찍이  정적  관계였던  포은 정몽주는 태조를 일컬어 “풍채는 헌걸차고 씩씩하여 화산(華山)

  용골매요,  지략은  깊숙하고  두드러져  남양(南陽)  와룡(臥龍)이다”라고  받들었다.    때마침

 동구릉을 찾은 날은 100여 년 만에 내린 폭설이 계속되는 강추위로 녹지 않아 그대로 쌓여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후 왕릉 관리가 더욱 강화돼 능상의 촬영은  반드시  관리사무소의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죽고 나서 너나 할 것 없이 땅속에 묻히는 건 다를 바 없다.

여름엔 비 맞고 겨울엔 눈 맞아야 하는 이치 또한 임금이나 평민이나 동일하다는 생각이다.

 태조는 한평생 군인으로 팔도강산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지만 늘 함흥 고향땅을 잊지 못했다.

원래  관향(성씨의  고향)  전주였으나  그의 4대조  안사(安社)가 당시 전주 지주사(知州事)와의

불화로 삼척으로 이주했다.   악연은  이어져  그 지주사가 다시 관동안렴사로 부임해 오자 머나먼

땅까지 피신해 살게 된 것이다.

  당시  국경은 현재의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닌 철령 일대를 가로지르는 경계였다.   이미 망조가

들어 북원으로 쫓겨 간 원나라는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히며 감당 못할 공물을 요구해 왔다.

걸핏하면 쳐들어와 국경은 수시로 변했다.   태조의  조상들은  대를  이어가며 지방 무장호족으로

고려를 위해 싸우다가 조정에서 홀대하면 원나라로 가 벼슬도 했다. 말 타고 활 쏘며 칼 쓰던 시절

국경을 맞댄 지방 호족들의 일상이었다.

  이즈음  황해도 곡산에서 후일 태조의 운명을 가르게 되는 계비 신천 강()씨를 만난다.   당시

벼슬아치들은 고향에 둔 부인을 향처(鄕妻)라 했고 서울에 사는 부인은 경처(京妻)로 불렀다. 특히

전쟁터를 누비는 무장들에게는 오늘날의 ‘바람끼’가 아닌 현지 수발자의 조력자 개념이었다.

신덕고황후 강씨는 정릉 편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1335  화령부(현재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이자춘과  최씨(최한기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이성계는 나면서부터 무골(武骨)이었다. 이 무렵 14세기 중반의 중국 대륙은 명의 주원장이

원을 위협하고 만주지역에서는 여진족이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빈번한 노략질로 문관보다는 무관이 우월적 지위에 있을 때다.

  이성계는 홍건적을 물리치고 왜구를 섬멸하는 등 국운이 위태로운 전쟁에서 승승장구해 어느덧

고려 조정의 신흥군벌 세력으로 우뚝  서게 된다.   공민왕의 부원군(임금의 사돈)으로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 장군과의 숙명적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사이의 역사적 운명은

위화도 회군으로 판가름 나 최영은 처형당하고 이성계는 조선 임금으로 등극해 태조가 된다.

  후일의  사가들은  이 당시  두 장군의 군사적 대결을 두고 아직까지도 견해가 엇갈린다.  그 후

원나라는  멸망해  자취를 감추었고 신흥세력 명나라는 1644년 망국에 이를 때까지 300년 가까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처럼 천운을 타고나 왕조를 창업한 태조에게도 시국을 판단함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    왕조 개국의 일등공신인 방원을 제쳐두고 어린

방석을 후일의 임금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만일  이때  태조가  계비  강씨와  정도전  등의  소청을  물리치고 호랑이 같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더라면  국초의  조선이 얼마나 평탄했겠느냐는 돌이킬 수 없는 탄식이다.   이로 인해 계비

소생 방번과 방석은 비명에 죽고  조선경국전을 쓴 삼봉  정도전도  절명하고  말았다.   태조가 이

역사를  되풀이한다면  다시 그런 결정을 할까 하는 생각이 눈 쌓인 건원릉 입수(入首·산의 정기가

묘지로 들어오는 볼록한 곳) 지점에서 스쳐간다.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산재한 조선 왕릉을 답사하면서 궁금한 점이 있을 것이다.  왜 건원릉에만

갈대가 무성할까. 능상의 갈대는 태조의 고향 함흥에서 직접 옮겨온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의 흙과 갈대를 이식하라 했고 사초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유언이  600년이 넘도록

지켜지고 600년 동안 무탈하게 살아 있는 갈대가 경이롭기만 하다.

 천하의 무학대사가 잡은 건원릉의 좌향은 무엇일까 궁금해 나경을 펼쳐 들었다.     나경은 패철,

뜬쇠로도 불리며 좌(머리 부분)와 향(다리 부분)을 맞춰보는 나침반이다.    계좌정향으로 서쪽으로

15  기운  정남향에  가깝다.      위의  입수는  ()방향이고  물이  들어오는  방향(得水)

곤신(坤申·서남쪽)향이며 물이 나가는 방향(破口)은 병(·남동쪽)향으로 풍수에서 말하는 천하길지

대명당이다.

 연재가 계속되면서 언급이 되겠지만 왕릉과 풍수는 무관하지 않은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특히

무학대사는  신라 말의 도선국사→지공대사→나옹선사로 이어지는 한국풍수의 정통맥으로 사찰과

왕릉풍수에 도통했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과거시험의  잡과에  속했던 풍수도 재미있게 풀어갈

생각이다.

 현재 동구릉에는 왕과 왕비 17위가 안장돼 있으며 궁궐의 동쪽에 있다 해서 동구릉(東九陵)이다.

조선왕릉 모두가 두 자씩의 능호이나 개국 태조릉에만 석 자를 붙인 건원릉이다.

 

 

4.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 <1>태조 계비 신덕고황후 정릉

270년만에 종묘 배향 씻는 눈물 비로 내렸나 / 2010.01.22

 

 

고려 불교 양식으로 조성된 능 앞의 장명등. 태종과의 불화로 수차례 천장돼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다.

 

태조  계비  신덕고황후의 정릉 정()자각.  능 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매년 9월 왕실

전통예법으로 봉행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들의 묘 앞에 설 때마다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임금이  묻힌  왕릉에서부터  영의정  판서 등을  지낸 고관대작,  풍전등화 같은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장군,  간교한  세 치 혀를 잘못 놀려 무고한 인재들을 죽게 한

희대의 간신, 국권을 넘겨주고 당대의 일신 영달에 눈멀었던 매국노…. 심지어는 일생을

종 노릇하다 섬기던 상전 앞에 묻힌 노비와 살아생전 타고 다니던 말과 소 무덤도 있다.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산87-16번지.    북악터널을 지나 정릉삼거리에서 우회전하고

    아리랑  고개로  진입하면  바로  ‘정릉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좌우의 상점들과

    아파트의  좁은  길을  가다  보면  막다른  길목에  이르는데  이곳이  세계문화유산

정릉(貞陵)이다.  299574(90,621)의 사을한(沙乙閑) 산록에 단릉(單陵)으로 조성된

이 능은  태조 이성계가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던 계비 강()씨가 영면해 있는 곳으로

사적 제208호로 지정돼 있다.

 정릉을 다녀오면서 북한 개성시 상도면 풍하리에 있는 제릉(齊陵)을 지나칠 수가 없다.

태조의  원비  신의고  황후  안변  한씨 능으로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다.   원비  한씨

(1337~1391)  함경도  영흥 출생으로 태조가 벼슬하기 전 시집와 방우ㆍ방과(정종)

방의ㆍ방간ㆍ방원(태종)ㆍ방연 여섯 왕자와 경신ㆍ경선 공주를 낳았다.  태조보다 두 살

아래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91 9 23 55세로 승하했다.

  계비  신덕고황후  신천(또는  곡산)  강씨는  황해도  출신으로  당시  권문세가였던

판삼사사 상산 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태조의  등극  거사에  직접  참여했고  조선  개국  후에도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왕자  방번ㆍ 방석(초봉세자)  경순  공주를 뒀으나

원비의 다섯째 왕자 방원(정안대군)과의 정적관계로 후사마저 끊기게 된다. 개국 초 조선

천지를 뒤흔든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여기서  계비  강씨의  생몰연대에 대해 새롭게 밝혀 둘 것이 있다.   지금까지 다수의

역사기록에  그의 출생 연도가 미상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는 고려 공민왕 4년인 1356

(병신)  6 14일생이었다.   태조보다  21  연하로  1396 8 13  41세를  일기로

갑자기 승하했다. 이 사실들은 전주이씨 왕실계보를 기록한 선원 보감 등에 밝혀져 있다.

○ 계비 돌연사 후 자식·측근 몰사

 개국 초 조선왕실의 권력 구조는 난마같이 얽혔다.   원비  한씨의 장성한 여섯 왕자가

있었지만 계비는 자신의 소생으로 왕실 대통을 이으려 했다. 이에 동조한 것이 신권주의

(臣權主義ㆍ지금의 내각책임제와 유사)를 부르짖던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등이었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건국하는    목숨을  걸었던  정안대군이 크게 반발했고 왕위

계승에 은근히 뜻을 뒀던 넷째 왕자 방간도 술렁였다.     끝내 태조가 11세의 어린 방석

(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안대군은 속이 뒤집혔다.

  이런 판국에 계비가 돌연사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야 사후 뒷일을 알 바 아니겠지만

이후 자신의 소생은 물론 자신을 따르던 아까운 인재들도 몰살당했다. 뒤늦게 안 태조가

땅을 쳤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계비를  경복궁에서  내다보이는  (현재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장사 지내고 정릉이라 능호를 내렸다. 오늘날 중구 정동의 유래가 여기서

비롯됐다.

자신도 죽으면 함께 묻히려 했으나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릉은 왕릉치고는 초라한 무덤이다.   능을 감싸는 병풍석과 난관석도 없고 석물들도

초라하다.   태종으로  등극한  정안대군이  정릉을 여러 차례 이장하면서 정자각을 헐어

버렸다.

석물들은  실어다  광교  돌다리로  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이즈음

아무렇게나  옮겨    자리가  현재의  정릉이니  오죽했겠는가.   풍수에  능한  태종이

미워하는  계비  묘를  명당에 잡을 지관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종 8(1669)

우암  송시열의  상소로  종묘에  배향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정릉은 촌부의 무덤만도

못한 잊힌 폐묘였다.

  왕실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호()를 내렸다.  묘호(廟號)

임금이 승하하고 조정 대신들이 지어 바친 것으로 태조ㆍ세종ㆍ영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왕 자신들도 살아서는 몰랐던 것이다.  이와 함께 존호(尊號)는 임금의 덕을 기려 사후에

지어 올린 것으로 왕비는 휘호(徽號)라 했으며  종묘(宗廟)에 모셔진 신주에 새겨져 있다.

정릉ㆍ태릉ㆍ홍릉 등은 능호()라 부른다.   이와는 달리 시호(諡號)는 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한테 내리는 칭호로 충무공ㆍ문정공 등이며 문중의 영광이었다.

○ 좌청룡 우백호·좌수우도 국세

  능상에 올라 나경으로 좌향을 재 보니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경좌갑향(庚坐甲向)

이다.   나경은  24방위로  나뉘어  있으며 1방위가 15도씩으로 360도 원을 이루는 풍수

전문가의  나침반이다.   정릉은  좌청룡이  우백호를  감싸안으며 좌측에서 물이 내려와

우측으로  흘러가는  좌수우도(左水右倒)  국세다.   산 정기를  능으로 밀어 주는 입수

(入首) 용맥이 갈라져 능 앞의 바람을 막아 주는 안산(案山)이 형성되지 못했다.

좌청룡이 내려와 작국(作局)한 금대국세(金帶局勢).  풍수에서 좌청룡은 남자와 벼슬을

의미하고 우백호는 여자와 재물을 상징한다.

 태조가 강씨 부인을 만나던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호랑이 사냥을 나섰던

태조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물 길러 나온 처녀가 있어 물 한 바가지를 청했다.    버들잎을 띄워 건네 주는 물을

후후 불며 천천히 마신 뒤 연유를 물으니 “급히 물 마시다 탈이 나실까 염려돼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 처녀가 바로 계비 강씨다.

  신덕황후라는  휘호를  되찾아  종묘에 배향되던 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이때의 비를 원을 씻어 주는 비라 해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고 한다. 신덕고황후는

후일 고종황제가  추존해 올린 호다.    정릉  기신제향(忌辰祭享)  세종대왕의  다섯째

왕자인 광평대군파 후손들이 매년 9 23일 올리고 있다.

 

 

5.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3>태종 대왕과 헌릉

· 청룡 -· 백호 조화 `서린듯 …' / 2010.01.29

 

 

 

 

 능 뒤 입수용맥에서 바라본 헌릉 건너의 대모산. 물처럼 흐르는 수체형으로 길격의

조산이다오른쪽이 태종대왕이며 왼쪽은 원경왕후 민씨다.

 

 

 

 

난간석으로 연결시킨 조선 최초의 쌍릉. 생전에 불화했던 왕과 왕비를 편안케 하려는 세종대왕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말 공민왕(재위 1351~1374) 당시의 국제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상국으로 섬기던 원

(1271~1368)  망국의  길에 접어들어 북으로 쫓겨 갔고, 이미 중원대륙에서는 한족인 주원장이

(1368~1644)을 건국해 감당 못 할 충성을 고려에 요구했다.   원은  이민족으로는  최초로 중국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이다.  이후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하기는 청(1616~1912)

세운 만주족이 두 번째다.

  국내 정세는 더욱 복잡했다.  망해 가는 원을 떠받드는 최영 중심의 수구세력과, 신흥대국 명을

지지하는 이성계 주축의 개혁세력 간 첨예한 대결이었다.   이즈음 공민왕이 동성연애하던 미소년

들에게  살해당하고  우왕이  등극하자 조정에서는 왕 씨가 아닌 요승 신돈의 아들이라고 두 패로

갈라졌다.  이때 고려 조정의 캐스팅 보트는 포은 정몽주가 쥐고 있었다. 포은은 송헌 이성계(후일

태조고황제)와 함께 친명파로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 신돈 아들을 폐하고  진짜 왕 씨를  세움)

뜻을 같이 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 장악

회군으로 송헌이 정국을 장악하자 포은은 송헌을 제거하려 했다.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누비던

송헌의 다섯째 아들 방원(정안대군·1367~1422)이 먼저 눈치를 챘다. 정안대군이 최후 결심을 하고

포은에게 회심의 시 한수를 던졌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른바 하여가(何如歌).   새 왕조  창업의  뜻을 둔 정안대군의 속내를 간파한 포은이 단심가

(丹心歌)로 고려 조정에 대한 충절을 분명히 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역사적 두 인물의 교린우호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후  정안대군의 심복 조영규는 개성 선죽교

에서 포은을 격살해 버렸다.   1391 4  조선왕조  창업 3개월 전의 일로 이때 정안대군의 나이

25세였다. 최영도 처형당한 뒤여서 정몽주의 죽음은 곧 고려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이후  정안대군은  수차례의  숙청위기와  반전을 거듭한 끝에 제1·2차 왕자의 난을 정치적 발판

으로 조선 제3대 임금 태종대왕으로 등극한다.    태종을  능에서  만나러 헌릉(獻陵·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1)에 가는 날엔 유별나게 춥던 올 겨울 날씨가 풀렸다.   박석고개를 넘어 성남 방향의

헌릉로를  따라가다  내곡  IC에서  좌회전하면  매표소  앞에  최근 세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는

표석이 반긴다.  사적 제194호로 지정된 이곳은 1193071(36904) 규모로 제23대 순조대왕

의 인릉(仁陵)이 함께 있어 헌인릉이라 부른다.  천하를  호령하던  600년 전 임금을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일이고 능에서라도 이렇게 알현(謁見)하니 감개무량하기 그지없다.

○ 재위 18년간 놀라운 치적

  순탄한 영웅의 일생이란 없듯이 태종도 그러했다.  고려  우왕  9(1383)  17세 약관의 나이로

문과 급제 이후 밀직사대언으로 봉직했고 목은 이색과 함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는 외교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후 부왕 태조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치며 난국의 정객들을 끌어 모았다.   그는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권력이란  아버지와  아들·어머니와  아들·형제자매 사이에도

결코 나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태종의 재위(1400~1418) 18년 동안의 치적은 놀랍다.  당시는  조선이 개국한 지 10년도 안 된

상황이었다.  고려왕조를  부활하려는  유민세력이  도처에서  궐기했다.  왕권이 약화되면 민심은

언제든지 고려로 되돌아 갈 수 있는 난세였다. 태종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전 왕조의 멸망 원인을 국력 쇠약과 불교(밀교) 부패라고 확신한 그는 전국 242개 사찰만 남기고

모두 폐쇄한 뒤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는 등 척불숭유 정책을 강력히 전개했다. 조선을 함께

건국한  개국공신일지라도  왕권을  분산시키려는  소위 신권(臣權)주의자들은 가차없이 처단했고

외척들의 권력개입도 용서치 않았다.

 땅 기운이  쇠한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 사병 혁파, 거북선 개발, 신문고 설치,  호패법 실시

등을  통해  가히  혁명적인  발상으로 국초의 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태종은 특히 외척과

사돈들을 믿지 않았다.   재위하는  동안  선위(禪位· 살아서  임금 자리를  물려주는 것) 파동을 네

번이나 일으키며 딴맘 먹은 신하들과 친·인척들을 골라냈다.

○ 양녕 외삼촌 넷 `사약' 참극위화도

  이 판에 임금의 의중을 잘못 파악한 세자 양녕대군의 외삼촌 넷(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

사약을 받고 자진(自盡)하는 참극을 당한다.  양녕이 왕재가 아니라고 판단한 태종이 충녕대군(후일

세종대왕)에게 양위하면서는 사돈이면서 세종의 장인이 되는 심온을 사사해 버린다. 그리고는 어느

누구도 왕실 측근에 함부로 범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세종4(1422) 5 10 56세로 승하하면서 태종은 세종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나는 이

세상에  잔재해  있는  모든 악몽과 슬픔을 뒤집어쓰고 갈 것이니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어진 성군이 되어라.

  태종의  능은  자신보다  2  앞서  승하한  원경왕후  민씨(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와 동원이봉

(同原異封)의 쌍릉으로 조성돼 있다. 살아생전 왕과 왕비의 사이는 살벌했다.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 4 4녀를 둔 뒤 후궁들에게서 8 13녀를 두었다.   왕실 번창과 외척세력 분산을 위한 큰

뜻이었지만 원경왕후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매형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이

큰 친정 남동생 넷을 죽인 남편이 아닌가.

 헌릉에  오면  조선의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조형물과 만나게 된다.   우선  거대한

봉분 규모에 압도되고 능을 둘러싼 병풍석이 아주 가깝게 밀착된 데다 난간석으로 두 능이 연결돼

있는 것이다.    여기서 후세 사람들은 세종대왕의 효심을 읽는다. 두 분 사이의 불화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세종이 사후에라도 화해토록 난간석을 연결해 놓은 것이다.   문·무인석 등 석물도 두 쌍

씩 세워 능의 위엄을 갖추도록 세심히 배려했다.

  기록에 따른 헌릉의 좌향은 건좌(동에서 남으로 45) 손향(서에서 북으로 45)으로 서북향인

데 나경을 꺼내 정밀 측정하니 분명히 해좌사향이다. 좌와 향이 각각 15도씩 차이가 나는 것이다.

건좌와  해좌는  나경에  표시된  바로  옆의 좌(·시신의 머리를 모시는 곳)지만 후손들의 운세는

크게 달라지는 위치여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풍수만의 비결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또 다른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옛날 왕릉이나 사대부 묘를 조성하면서는

광중(壙中·시신이 묻히는 지점)  봉분의  좌향을  얼마든지 달리 썼다.   특히 왕릉은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중대사였으므로 실제 좌향과 봉분 좌향을 위장 법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능상에  올라  보니  겹을  이루는  내·외 청룡과 길게 둘러친 내·외 백호가 절묘하다.  지금이야

비닐천막촌이  들어서  좌· 우가  심히  손상됐지만  조성  초기의  헌릉은 둘러만 보아도 탄복했을

명당이다.   그 우백호 자락에 인릉이 자리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건 거대한 생룡이 용트림하듯

내려오다 입수(入首) 지점에서 대리석을 만나 우뚝 서 버린 것이다.   입수와 광중 사이의 매장석은

정기석(精氣石)이라 하여 풍수에서는 아주 귀하게 여기는 돌이다. 헌릉에 와서는 이 돌을 찾아봐야

한다.  새 왕조가 들어서는 혼란기에 대세를 오판하고 줄을 잘못 섰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은 국가

동량들이 많다.  때로는 멸문지화로 이어진 인물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어찌 옛날만의 일이겠는가.

역사는 과거로부터 우리가 걸어온 길인 동시에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을-.

 

 

6.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4>성군 세종대왕과 영릉

좌청룡·우백호 내달리는 `천혜 명당' / 2010.02.05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청송 심씨를 안장한 조선 최초의 합장릉으로 자좌오향의 천하명당

대길지다.  세종은 하늘이 내린 성군으로 지치시대를 열었다.   

 

 

 

국조오례의에 따라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합장릉이지만 혼유석은 두 개를 따로

조성했다.

 사람과 사람이 의사를 소통함에는 말과 글이 있다. 글씨를 쓸 줄 모르는 문맹자도 말은 잘할 수

있어 얼마든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그러나 군 부대에서 온 아들의 편지나 재미있는 이야기 책

등은 읽을 수가 없다.

  우리 역사에 세종대왕이 등극 안 했으면 아직까지도 이두() 문자를 쓰고 있을 것이다.   삼국

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표기법이  완성된  이두는 중국 한자의 음(·소리)

(·뜻)을 빌려 그 당시 우리말의 문장 구성법에 따라 토를 붙인 불완전 문자다.   이두가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지는 다음의 예문으로 알 수 있다.

 ‘너 나 없이 다짐하며’를 이두로 표기하면 ‘여오무역고음위며(汝吾無亦 音爲 )’다.    너 여()

() 없을 무() 또 역(·중국어 발음 ‘이’) 다짐둘 고( ) 소리 음(·여기서는 소리 값이 없음)

()  하며  ( )  자의 소리와 뜻 가운데 ‘너 나 없이 다짐하며’만 편의대로 취한 것이다.   온갖

시달림과  부역으로  생존조차  위협받던  무지한 백성들이 이 문자를 어찌 알겠는가.  팔자 좋게

태어난  왕손이나  귀족  중에서도  한자를  통달하다시피  공부해야 사용할 수 있는 극히 제한된

기록수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 국가의 국운 융창은 그 당시 최고 지도자의 영도력에 의해 좌우된다. 군 통수

권자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전제 군주 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늘은 반만년 역사의

우리나라에 시대 시대마다 위대한 인물들을 탄생케 해 이 강토를 지켜내고 유장(悠長)한 민족사를

이어가도록 배려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같이 빛나는 역사적 인물 중 단연 최고의 영웅이

세종대왕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 어려서부터 성군의 기질

 태조  6(1397)  4 10,  한양  잠저(潛邸)에서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왕자로 태어난

세종의 어휘(御諱·임금의 이름)는 도다.  왕조 개국 후 태어난 정통 왕자였으며 충녕대군 시절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성격은 침잠·과묵하여 말수가 적었다고 기록돼 있다.    모습은 씩씩하고

아름다워 위의(威儀)가 천금 같았고 풍채는 좋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종은  상왕으로  있는  4  동안에도 병권(兵權)만은 놓지 않고 절대 왕권에 걸림돌이 되는

대신이나  친·인척들은  모조리  제거했다.   세종에게서  성군(聖君)의 기미를 찾은 태종은 왕조의

앞날을 낙관하며 이렇게 자주 말했다.

 “명주(明主·밝고 현명한 임금)를 얻어 국정을 맡기고 보니 걱정 없음이 천하에 나 같은 이가 없을

것이다. 어찌 오직 천하뿐이리오. 고금을 통해서도 또한 나와 같이 걱정 없는 이가 없으리라.

 세종은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 54세로 붕어(崩御)할 때까지 32년 동안 보위에 있었다. 그의

재위  시절은  수구세력인  개국공신들이 거의 세상을 떠난 뒤여서 과거를 통해 발굴된 신진 두뇌

들이 마음껏 국정에 참여한 시기다. 집현전을 통해서는 평생 학문에만 전념토록 뒷받침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인 훈민정음 창제라는 역사적 대업을 이뤄 놓는다.

  세종이  치세하는  동안  이미  나라 안팎에서는 동방의 요순(堯舜·중국에서 가장 훌륭한 황제)

 시대가  도래했다며  모두가 기뻐했다.  관리는 그 직분에 충실했고 백성은 그 본업에 편안했으며

조정은 부조리가 없이 맑고 깨끗하게 잘 다스려졌다. 정치·경제·국방·사회·과학·문화·농업·의학·음악

등 세종의 통치가 골고루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정치 탄압이나 징계도 거의 사라져 공직자는

국가를 위해 헌신했고 양민들은 생업에 충실했다. 바야흐로 태평성대였다.

 세종의 업적은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다. 국가의 오례(····凶禮)와 서민의 사례(···

祭禮)를 새로 정립해 간소화했고, 농사직설·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의방유취 등과 법률·역사·유교·

문학·어학·천문·지리·의학·농업기술에 관한 수많은 서적을 발간했다.

  또 성곽 수축과 전함 수리로 국방을 튼튼히 했고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 4군과 6진을 설치해

오늘날의 국경으로 확정짓는 한편,  일본  대마도도  정벌해  항복받았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와

혼천의 해시계·물시계 등을 제작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케 하는 한편 세금을 공평하게

했으며 노비들에 대한 사형도 금하도록 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논리적 체계를 갖춘 훈민정음을 손수 창제해 반포(1446)할 때는

상국인 명()이 반역으로 다스리려 했지만 세종은 굴하지 않았다.   최만리    신하들의  반대와

상소가 빗발쳤으나 전혀 동요됨이 없었다.  문자의  독립은  곧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적 자주 독립

이었고 종묘(나라)와 사직(백성)이 천년만년을 누리는 탄탄대로였기 때문이다.

 세종은 중년 들어 소갈증(당뇨)으로 고생했다. 소헌왕후 청송 심씨와의 사이에서 8대군 2공주를

비롯해 후궁과 궁인들에게서 12 2옹주를 뒀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례없는 왕실의 번창이었다.

말년 들어  건강이  악화되자  세종 27(1445) 세자 문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치 일선에서 거의

물러났다.   1450 2 17,  아끼던  막내왕자  영응대군  사저에서  세종이 승하하자 만조백관

신하와 백성들은 물론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세종은 4년 앞서 승하한 소헌왕후를 부왕(태종)  잠든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안장

하고 훗날 자신도 묻히려 했다.   승하 후 국풍(國風·왕릉 터를 잡는 풍수)들이 물이 나는 흉지라고

만류했으나 세종의 유명(遺命)이어서 하는 수 없이 합장으로 장사 지냈다.

○ 국조오례의 따른 조선 첫 왕릉

 세월이 흘러 정변과 참극이 수습된 예종 1(1469) 마침내 영릉은 현재의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번지로 천장된다.   국조오례의에 따른 조선 최초의 왕릉으로 병풍석을 없애고 난간

석만 세웠으며 석물들도 단출하다. 합장릉으로 혼유석은 왕과 왕비를 따로 배치했다.

 영릉에 와서는 풍수를 운위함이 외람된 천하제일 명당이다. 원래 이곳은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광주 이씨 이계전과 영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문중  묘지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를 예종이 불러 자리 양보를 청하니 가족들과 상의해 응해 줬다. 당시 이인손의 묘를

파묘하니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높이 오르거든 연줄을 끊고 그 떨어지는 자리에 묘를 모셔라”는

글귀가 나왔다.   그대로  따르니  연은  서쪽 십리 밖에 떨어졌고 이장한 후에도 광주 이씨 문중은

번창했다.

  북성산을  용틀임하며  엎치락뒤치락  기복(起伏)  내룡맥이 우렁차고 북현무·남주작·좌청룡·

우백호·안산·조산 모두의 자리매김이 인위적으로 배치한다 해도 불가능한 천혜의 명당에 자좌오향

  정남향이다.  (·북)  (·남)향은 3대를 적선해도 차지하기 힘들다는 대길(大吉) 터다.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  해 세종대왕을  이곳에  모신  이후  조선왕조  운세가 100여 년이나

연장됐다고 한다.

 

 

7.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5>문종대왕과 현릉

단종의 슬픔 머금은 왕후릉엔 난간석만/ 2010.02.12

 

 

 

동일 구역  내 있으면서  내룡맥이 다르게 조성된 동원이강릉.   왼쪽이  문종대왕이고  오른쪽이

현덕왕후 능침이다.

 

 

 

   문종대왕  현릉에서  바라본  왕비  현덕왕후  권씨  .  왕비릉은  현덕왕후가  꿈에서 세조를

하고서 파헤쳐지는 등 치욕적인 수난을 당했다

  문종대왕이 영면해 있는 현릉은 동구릉 안의 태조고황제 건원릉 동쪽에 있다. 두 능침이 가까운

위치에  있으나  능이 조성된 언덕이 다른 것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 하는데 문종대왕과

현덕왕후의 왕릉이 대표적이다.   능이  두 개이나  별도의  능호를  사용하지 않고 현릉(顯陵)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무섭고도 섬뜩한 역사적 사실이 동행한다.

 문종은 태종 14(1414) 10 3일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청송 심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 때

세자로  책봉되고  성균관에  입학해  장래의  군왕  수업을  철저히 받으며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성장했다. 세자는 부왕 세종을 닮아 예의범절이나 법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독서가 지나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온종일  한가한  시간이라곤  조금도  없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효성이 지극하여 세종의 탕약과 수라상을 직접 챙기고 밤늦도록 병시중 들다가 ‘물러가라’는 명이

있기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세종은 오히려 이런 세자가 늘 걱정이었다.   할아버지 태조가 어떻게 창업하고, 아버지 태종이

어떻게 지켜낸 왕조인데 저래 가지고 어떻게 종묘 사직을 지켜낼 것인가. 더구나 범같이 혈기왕성

하고 야심 찬 둘째 왕자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제대로 왕업은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 권씨 세자빈 진봉 단종 폐위 단초

가례(嘉禮·왕실의 혼인)를 일찍 올려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첫 번째 세자빈으로 책봉된 김씨가 궁녀들과의  ‘적절치 못한 행실’로  쫓겨나고    번째 세자빈

봉씨 역시 ‘온당치 못한 행실’로 폐출되고 만다. 이럴 때마다 세종은 언행이 너무 신중하고 과단성

이 없는 데다 남녀 간 음양이치를 소홀히 하는 세자 향()을 크게 염려 했다.

  봉씨가 폐위되자 당시 양원에 있던 권씨(증 의정부 좌의정 권전의 딸)가 세자빈으로 진봉(進封)

되는데 후일 이것이 단종 폐위의 단초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권씨는 문종과의 사이에 경혜공주

를 낳고 25세가 되던 해 단종을 출산하고 산고를 못 이겨 3일 만에 승하했다.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면서 세조는 단종이 정빈 출신의 적손(嫡孫)이 아님을 트집으로 내세웠다.

  문종의 세자 시절은 29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그는 측우기와 해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 제작에

참여할  정도로  천문  율력(律曆)  성운(聲韻)  정통 박식했고 초서와 예서에도 능했다.  다섯째

왕자인  광평대군이 조졸하자 그의 외아들 영순군을 궁중에 데려다 친자식처럼 보살피는 등 효행

우애가 백성들로 하여금 본이 됐다.

○ 몸 상하는 줄 알고도 과중한 업무

  즉위 초부터  온갖 질환에 시달려 온 세종은 마침내 즉위 24년 신하들의 빗발치는 반대를 물리

치고 모든 정무를 세자에게 맡긴 채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  몸이 상하는 줄 알면서도 과중한

업무와 싸워 나갔다.  이런 시국상황을 수양대군(후일 세조)과 한명회·권남  등은 조심스럽게 지켜

보고 있었다. 초기 조선 역사에 무서운 피바람이 몰아쳐 올 소름 끼치는 조짐이었다.

  1450년 보위에  오른 지 32년 만에 세종이 승하하자 곧바로 세자가 승계하니 제5대 임금 문종

이다.  문종은 당시 등창을 앓고 있으면서도 3일 동안 음식을 입에 안 대고 슬퍼함이 너무 지나쳤

다고 행장(行狀)에 기록돼 있다. 초하루와 보름 상식 때 애통해하며 3년 상을 마친 것이 초상 때와

같았다 하니 몸이 남아났겠는가. 후일의 사가들은 이것이 죽음을 앞당기고 왕실의 비극으로 이어

짐을 왜 몰랐을까 하고 안타까워한다. 염려는 현실로 닥쳐왔다.

 문종은 재위 2 3개월 만에 경복궁 정침에서 승하했다. 뛰어난 치적은 없었으나 선왕의 유업을

계승하며 옛 신하들을 바꾸지 않고 관례대로 따랐다.   군신 간 언론을 넓히고 문을 숭상하되 무를

중히 여기며 궁중의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도록 독려했다. 몸을 돌보지 않은 채 국사에 전념하다

돌연히 떠난 정국은 급속히 얼어붙었다. 이때 대통을 이어받은 단종의 나이는 12세였다.

  부왕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던 문종이 승하하자 생전의 유언대로 영릉(원래 세종의 영릉은 현재

의 헌인릉 오른쪽에 있었음) 오른쪽으로 장지를 정했으나 물이 나고 바위가 있어 취소했다. 서둘러

건원릉 동쪽을 능지로 새로 정해 안장하니 오늘날의 현릉이다. 이에 앞서 권씨는 문종이 등극하기

  원손(단종)  출산한 뒤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안산에 예장된 후 능호를 소릉(昭陵)

이라 했다.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 천지에 경천동지할 변고가 생겼다. 숙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무시무시한 공포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끝내는 어린 임금도 사사당하고 과거 급제를 통해

기용된 유능한 인재들이 무더기로 몰살당했다.

○ 현덕왕후, 꿈에서 세조 괴롭혀

  일부함원  오월비상(一婦含怨 五月飛霜)이라고,  한 여인이 한을 품으면 삼복더위의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다.  세조의 꿈에 형수인  현덕왕후가 나타나  “나도 네 아들을 데려 가야겠다”고

독설을 뿜고서 멀쩡하던 세자(추존 덕종)가 세상을 떠났다.  저주를  퍼부으며  침을  뱉은  얼굴과

온몸은 불치의 피부병이 돼 재위 기간 내내 세조를 괴롭혔다. 현릉의 수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다 기름을 부은 게 현덕왕후 친정의 단종 복위 운동이다. 역모가 발각되자 세조는 족친을

멸해  버렸고  합장으로  된 현릉을  파헤쳐  형수 유골만 물가에다 매장했다.   현덕왕후의 휘호를

추폐(追廢)하고  종묘에서도  신주를  철거해  버렸다.    그 후 중종 8(1513) 문종의 신주만 홀로

제사받는  것이  민망하다  하여  다시  복위되고 현릉 동쪽에 천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600

세월이 흘렀다 해서 그 한이 과연 사그라졌을까 싶다.

  현릉은  계좌정향(서쪽으로 15도 기운 남향)으로  태조  건원릉과  같은  좌향이다.   능 뒤 입수

지점에서 병목을 이루는 결인처와 득수·파수가 고루 갖춰졌다.  그러나 현덕왕후 능에 오면 풍수적

판단이 달라진다. 인좌신향(서남향)으로 역마살이 드리우며 좌청룡이 푹 꺼져 기복해 능 앞을 비켜

간다.  바로 저 용맥 끝에 조성된 수릉(추존 문조)에는 기()가 실리나 왕후 능에는 도움이 안 되는

국세다. 문종 왕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으나 현덕왕후 권씨 능엔 난간석만 있다.

 이후 조선왕조의 왕실 계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불행하게도 정비 소생의 적장자(嫡長子)가 대통을

잇지 못한다. 삼봉 정도전이 경복궁 터를 북악산 밑에 잡을 때 무학대사는 이미 태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낙산으로 이어지는 좌청룡이 약해 장자입국(長子立國)은 어렵다고 봤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동쪽(아들 벼슬을 상징)  흥인문을 세우면서 산 모양의 갈 지()자를 더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게  된 것이다.  ()  동쪽을 의미하며, ()를 상징하는 돈의문은

서쪽에, 화기를 내포한 예()는 남쪽에 숭례문으로, 지혜를 뜻하는 지()의 홍지문은 북에 세웠다.

믿음()을 뜻하는 보신각은 사대문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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