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년 만에 복위돼 왕릉으로 조성한 온릉 능역. 홍살문
안의 조영물이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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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할머니 산소에 가면 노을 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먹먹해질 때가 있다. 떼쓰며 울어
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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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를 따뜻한 등에
업어 주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봉분에 난 풀 한 포기라도
더 뽑게 된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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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할머니와 포개진 사연이 각별해서다. 그러나 이름 모를 무덤 앞을 지나면서는 무덤덤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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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인정의 굴곡은 묘지마다 사연이 남달라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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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묻힌 무덤가에는 구구절절한 곡절이 무명 실타래처럼 두툼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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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롭기만 한 단릉…구석구석 한 서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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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19번지 온릉(溫陵)의 구석구석에는 한 여인의 한이 알알이 박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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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제11대 중종대왕의
원비 거창 신(愼)씨가
영면해 있는 외롭기 그지없는
단릉이다.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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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호로 지정된 이곳에 오면 원망부터 앞선다. 도대체 권력의 속성이 무엇이고 개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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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영달이 무엇이기에 한 여인의 일생을 이리도 참담하게 비틀어 놓을 수 있는가 하고…..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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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이 여인의 한을 기억의 저 편에 밀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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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남의 덕을 지나치게 입으면 평생 동안 신세를 갚느라 헤어나질 못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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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쟁이는 생일날 고깃국도 못 끓여 먹는다고 했을까. 혹시 돈 꿔준 사람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빚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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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갚는 주제에 생일까지 챙기느냐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종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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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한 살 위인 거창 신씨(후일 단경왕후)와 가례를 올린 뒤 궁궐 밖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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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저에 나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12세의 신랑과 13세의
각시였지만 남달리 금슬이 좋아 조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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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어머니가 왕실의
큰 어른인 정현왕후(성종 계비)였고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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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연산군은 이복형이면서 처고모부여서 임금 자리만 노리지 않는다면 남부러울 것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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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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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경왕후(1487~1557)의 친정 역시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였다. 아버지(신수근)가 좌의정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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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가 임금(연산군)이요, 고모가 중전(폐비 신씨)이었다.
우의정이었던 할아버지(신승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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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대군(세종대왕 넷째 왕자)의 사위여서 날
적부터 종친의 혈통이었다. 희성(稀姓)에
속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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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愼)씨 문중이 일찍부터 조정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이 같은 왕실 인연도 한몫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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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월은 수상(殊常)했고 위태로웠다. 진성대군과 신씨 부부 역시 연산군의 황음무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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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패악으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폭군의 비위에 거슬리기라도 하면 살아남는 자가 없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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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불십년(權不十年)에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했다. 백성들은 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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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면 기울고 물이 끓으면 넘친다는 천리법도를 믿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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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9월 2일 마침내 학정의 끝 날이 왔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의 반정세력이 요동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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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을 등에 업고 연산군을 용상에서
쫓아낸 것이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115년 만의 지각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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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신하가 임금을 폐위시킨 최초의 반정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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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영웅 나고 전시에 돈 번다고 했다. 뜻밖에도 왕위는 진성대군에게 돌아갔다. 꿈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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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않던 주상 자리였다. “임금도
싫고 이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진성대군을 억지로 입궐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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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등극시켰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곤룡포에 면류관을 써야 하는데 익선관을 대신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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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상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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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정세력 중전 책봉 7일만에 폐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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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돌연 폐위되며 궐위(闕位)된
건 임금 자리뿐만 아니었다. 중전
신씨도 폐비돼 국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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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도 비게 된 것이다. 반정세력들이 엉겁결에 부부인(府夫人·정일품의 대군부인)으로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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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니 단경(端敬)왕후다. 사람이 좋은 자리를 오래 유지하려면 주변이 깨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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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떳떳해야 한다. 단경왕후는 중전으로 책봉되는 날부터 가슴에 피멍이
맺혔다. 이미 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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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신수근)와 숙부(신수영)는 반정세력에 등 돌렸다 해서 참살당했고, 조정 안에 신씨 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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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이라곤 한 사람도 없이 제거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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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단경왕후의 근심은 하루도 못갔다.
중전으로 책봉된 이튿날 반정공신 유순·김수동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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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공신들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중종 앞에 부복해 아뢰었다. 임금은 저들 덕에 이 자리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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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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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의거하던 때 신수근을 죽인 것은 큰일에 성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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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 들어와 있는데 만일 그를 왕비로 오래 두면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이 생길 것입니다.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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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에 관계되는 일이오니 은정을 끊고 내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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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으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왕이 되고자 함도 아니었는데 자기네들이 임금 자리에
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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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고 사이좋게 살던 부부를 생이별시키려 하는 것이다. 주상은 체면을 마다않고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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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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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뢴 일은 심히 당연하나 조강지처를 어찌 그와 같이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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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설 반정세력이 아니었다. 왕권이 안정돼 중전 세력이 커지면 아비 죽인 대신들을 그냥
놔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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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없다는 것을 그들 은 잘 알고 있었다. 반정세력들은 7일 동안 임금 앞에 엎드려 조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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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는 협박하기까지 했다. 중종 역시 조정에 아무런 세력 기반이 없어 무력할 뿐이었다. 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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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내치면 연산군 같은 신세가 될 수도 있는 절체 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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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사직이 지중하니 어찌 사정에 얽매이겠는가. 마땅히 중의를 좇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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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신씨는 책봉 7일 만에 최단명 왕비가 됐다.
이때 중종의 보령 열아홉이었고 단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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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스물이었다. 신씨는 폐출돼 쫓겨나면서 진성대군과 사저 시절
즐겨 입던 다홍치마를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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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 그 치마에
얼굴을 묻고 혼절이 되도록 울었다. 차라리 여염집 비천한 작부만도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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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가 돼 버린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비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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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폐비 치마바위 보며 서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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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는 폐출되면서 친정집으로 옮겨 구차한 몸을 의탁했다. 지금의 인왕산 중턱이었다. 중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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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 9남 11녀를 낳고 살면서도 조강지처를 못 잊어했다. 신씨는 중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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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이 질 때면 인왕산 쪽을 바라보면서 슬픔에 잠긴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후 경복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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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다보이는 인왕산 큰 바위에 자신의
다홍치마를 걸어 놓았다.
임금과 폐비는 치마 바위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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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며 하염없이 눈물지었다고 한다.
또 중종은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거둥할 때마다 신씨의 친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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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일부러 머물며
타고 온 말을 사저에 보냈다. 이때마다 신씨는 사람 먹기도 귀한
흰 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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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쑤어 말에게 먹여 보냈다. 눈물 반 물 반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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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한 세월 앞에는 높은 권세와 부귀공명도 부질없는 법이다. 명종 12년(1557) 신씨가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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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니 71세였다. 20세의 꽃다운 청춘에 임금과
생이별하고 생과부로 산 지 51년 만이었다.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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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은 신씨의 복귀 문제를 놓고 182년을 갑론을박했다.
결국 영조 15년(1739) 단경왕후로 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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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 종묘에 배향하나 육신 쓰고 원통하게 산 한맺힌 매듭은 누가 풀어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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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릉은 야트막한 곡장과 간단한 석물을 세운 초라한 왕비 능이다. 임좌병향의 남향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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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은 잘 드나 좌우가 약한 데다 능 앞의 안산이 가깝다. 후세 사람들은 정순왕후(단종
왕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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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달픈 사연은 가슴 아파하면서도 단경왕후의 애끓는 심회는 제쳐 두고 있다. 정순왕후는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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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단종과 생이별했지만 단경왕후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아는 철 든 나이에 중종과 생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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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옛 선인들이 이르기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라 했다.
16.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1대>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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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1주만에 승하 `대윤-소윤' 가른 불씨로… / 201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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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로
요절한 장경왕후 파평 윤씨의 희릉. 대윤 윤임의 동생으로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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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이 끊이지 않았다.
희릉
능침 앞의 무인석. 왕권의 상징으로 오직 왕릉에만 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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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사람이 겪는 고통 중 견줄 데
없는 모진 고통은 아이를 낳는
일이라 했다. 오죽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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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고(産苦)라
했을까. 그래서
만삭의 임산부가 출산을 하러 산실에 들어갈 때 자기가 신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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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눈여겨본다고 한다. “내가
과연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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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중종대왕 제1계비 장경(章敬)왕후는 참으로 박복한 여인이다. 대통을 이을 왕자를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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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도 영화를 누려보기는커녕 젖꼭지조차 물려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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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本·세자)과 목숨을 바꾼 것이다. 핏덩이 자식을 두고 죽는 한은 골수에 맺힌다 하여 눈마저 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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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다고 했는데 장경왕후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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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핏덩이 아들 두고 과다출혈로 숨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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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0년(1515) 2월 25일. 장경왕후가 효혜 공주를 낳은 지 5년 만에 산기가
있자 대궐 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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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준비로 분주했다. 중종은
물론 궐 안팎의 대소신료들도 떡두꺼비 같은 왕자가 탄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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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고대했다. 마침내 우렁찬 고고성과 함께 원자가 태어나니 제12대 인종이다. 나라의 경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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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곧바로 가벼운 죄인들을 방면하고 하급직의 승급을 명하는 성은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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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난산이었다. 출산과정에서
몇 번을 기절했다가 깨어난 왕후는 몸을 푼 뒤 한참 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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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눈을 떴다. 이미
기력이 쇠진한 데다 과다출혈이었다. 급히 전의를 불렀으나 소생 가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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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는 것이었다. 전갈을
받은 중종이 내전에 들러 마주했지만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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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모든 것을 직감한 임금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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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입은 바가 지극히 크온데 다시 더 번거롭힐 말씀이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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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왕비의 산후(産後)는 더욱 위중해졌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나
지필묵을 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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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今上)께 서찰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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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심사가 혼망하여 잘 깨닫지 못하고 아뢰지를 못 했습니다. 지난해 여름 바야흐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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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을 가지고 있을 때이옵니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이 아이를
낳거든 억명(億命)이라 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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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겠다’ 하므로 이를 써서 벽에다 감춰두고 남에게 발설하지 아니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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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이 벽을 찾아보니 사실이었다.
한없이 측은하고 억장이
무너졌지만 서산낙일
지는 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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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을 자 그 누구도 없었다. 왕비는 인종을 낳은 지 일주일 만인 3월 2일 경복궁 별전에서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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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무심하여라. 유난히도 심성이 곱고 어질었던 왕후가 죽자 온 산하는 큰 슬픔에 잠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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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을 원망하며 앙천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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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 불러온 소용돌이 `일파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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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갑남을녀(甲男乙女)나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역사의 축(軸)을 돌려 놓을 순 없다. 역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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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칼자루와 재물의 곳간에서 예기치 않던 궤도로 급선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5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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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장경왕후(1491~1515)의 족적이 찬란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 여인의 죽음이 불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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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일파만파는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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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번지에 있는 조선왕실 능역에는 효릉(제12대 인종) 예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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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철종)과
함께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
있어 서삼릉으로 회자된다. 6만5970평의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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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호로 지정된 이곳에는 대군·군·공주·옹주 등 왕손들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 54기와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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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모 폐비 윤씨 묘도 함께 있다.
전국 각지의 풍수명당에
산재해 있던 태실들을 왕실 정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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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기 위해 일제가 강제 집결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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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좌(동에서 북으로 45도)곤향(서에서 남으로 45도)의 서남향인
희릉의 잉상(孕上·능침 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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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기가 응결된 곳)에 다다르면 애절한 물음부터 앞선다.
“그토록 귀한 왕세자를 낳으시고 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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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뜨셨으니 얼마나 원통하십니까. 아울러 왕비마마께서는 당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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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에 일어난 끔찍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알고 계시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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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왕후 파평 윤씨는 성장과정이 불우했다.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이며 고조부 윤번이 세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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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이며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다. 8세 때 어머니(순천 박씨)가 죽자 얼마나 울었던지 사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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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가지처럼 야위고 마름) 지경에 이르렀다고 왕실
내명부 문서에 전하고 있다. 이 참상을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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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월산대군 부인이 손수 데려다 양육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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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으로 중종에겐 큰아버지다. 그 월산대군의 부인(승평부인·昇平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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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품)이 파평 윤씨로 장경왕후의 친정 고모였던 것이다. 월산대군은 순천 박씨를 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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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었는데 박원종의 누이였다. 연산군이 절세미인이었던 박씨를 겁탈하자 박씨는 자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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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받친 박원종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용상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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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계비된 문정왕후 역사 뒤흔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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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이 등극하자 박원종 등 반정세력은 연산군의 처조카딸 되는 중종 원비 단경왕후 신(愼)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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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강제로 폐비시켜 궁궐에서
내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매형 집에서 성장해 숙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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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파평 윤씨를 제1계비로 앉히니 바로 장경왕후다. 왕실의 혈연과 혼인관계는 이렇게 얽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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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설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장악해 왔다.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오빠 윤임(1487~1545)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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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며 정국은 또다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된다. 이즈음에 장경왕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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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를 낳고 훙서한
것이다. 조정은 윤임의 9촌
조카딸이 되는
문정왕후를 제2계비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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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다시 역사는 뒷걸음질치고 국정은 농단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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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왕후는 죽어서도 수난을 겪었다.
붕어 후 처음에는 헌릉(현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오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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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록에 능침을 조성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했다. 그러나 사후의
안식도 오래가지 못했다. 좌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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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로가 장경왕후 묏자리가 풍수적으로 흉지라며 이장을 내세워 정쟁을 일으킨 것이다. 문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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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원수지간이었던 김안로가 계모(문정왕후) 슬하에서
자라는 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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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로는
장경왕후가 낳은 효혜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 중종의 부원군 신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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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장경왕후는 진명(盡命)한 지 23년 만인 중종 32년(1537) 현재의 서삼릉으로 천장됐다.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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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중종이 승하하자 유명에 따라 희릉 옆에 동원이강릉으로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과 왕비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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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로 옮겨 세웠다. 김안로의
권력 전횡으로 장경왕후와 그의
소생 인종과도 원수가 되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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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가 이 상황을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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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에 오른 인종을 닦달하고
볶아 8개월 만에 죽게 한 뒤 아들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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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문정왕후 것이었다. 친정 9촌 아저씨 윤임을
사사시키고 동생 윤원형을 권력 핵심으로 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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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국정을 뒤흔드니 민심은 이반되고 나라 재정은 바닥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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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문정왕후는 9촌 고모 되는 장경왕후와 남편 중종 사이를 갈라놓았다. 명종 17년(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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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을 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정릉으로 이장하고 자신도 옆에 묻히려 했으나 뒤늦게 흉지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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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서울 노원구 태릉에 안장됐다. 장경왕후 희릉의 수난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농협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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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소개량사업소가 들어서면서 입수(入首) 용맥이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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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왕후의 이런 속내를 알고 서삼릉 내의 희릉을 참배하노라면
속절없는 인간 수명이 야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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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만 하다. 더불어
장경왕후의 요절은 명문거족이었던 파평 윤씨 문중을 대윤과 소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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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대천의 원수지간으로 갈라놓아 그 앙금이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
17.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6대>인조대왕과 파주 장릉<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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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모와 외침 `소용돌이'…구중궁궐 삶 `가시밭길' / 201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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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내내 역모와 외침에 시달려 온 인조대왕. 원비 인렬왕후와 파주 장릉에 합폄으로
예장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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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며 소현세자 독살로 가족사까지 불행했다.
후금(청)에 강제로 ‘형제의 의’를 맺은 강화
연미정. 외교정책의 실패로 당한 치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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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릉 40기 중에는 동명의 능호를 사용하나 한자가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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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이 여럿 있다. 이
중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번지에 있는 장릉(章陵·사적 제202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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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갈현리
산25-1번지에 있는 장릉(長陵·사적 제203호)은 부자 간의 왕릉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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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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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장릉은 추존 원종(元宗)대왕과
인헌왕후 쌍분 능으로 인조(仁祖)대왕 생부와 생모의 능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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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일반에 널리 공개돼 역사탐방객들의 발길이 잦다. 파주 장릉은 원종의 아들인 인조와 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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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렬왕후의 합폄 능인데 비공개 능이어서 언론취재나 학술연구 목적 외에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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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론 범부들보다도 못했던 임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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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도 한 인간의 궤적을 비껴갈 수 없음이야 남루한 비색 촌로도 다 알 수 있을 법한 일.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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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용상 자리가 만민들한테야 부러웠겠지만 때로는 범부들만도 못한 때가 얼마든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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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군왕 중 인조(1595~1649)만큼 극적이고 고단한 삶을 살다간 임금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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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서 인조의 생애는 기구하기
짝이 없다. 서(庶)삼촌이자 금상인 광해군의 패도만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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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양군(인조) 집에까지 미쳐 동생(능창군)은 유배
가서 자결하고 아버지(정원군·추존 원종)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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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으로 원통하게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광해군을 등에 업은 대북파의 국정농단이 극에 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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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등을 돌렸고 차라리 천지변고라도 생기기를 학수고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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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한 민심에 하늘이
움직였다. 전국 각지의 민심동요가
반정 조짐으로 이어지더니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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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양군을 앞세운 친명파(서인) 세력이 대궐을
점령하면서 창덕궁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인조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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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 3월 13일로 광해군이 보위에 있은 지 15년 1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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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양군이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찾아가 잠긴
빗장을 열고 어보를 거둬 전하면서 재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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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통곡했다. 대비
김씨는 10년 만에 비로소 청천 하늘을 우러러 봤다. 대위(大位)는 마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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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양군 것이었다. 다 죽어가는 목숨을 구해준 서(庶)손자가 아닌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복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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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 김씨의 명으로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곧바로 즉위하니 제16대 임금 인조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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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였다. 혁명이나 반정이 성공하면 전조(前朝)의 정책은 뒤집히고 혁신 세력이 등장하여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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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수립함은 권력 이동의 수순이다.
선조 이래 50여 년간 권력을 빼앗겼던 서인 세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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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하자마자 대북파 핵심 세력들과 잔당들을 참수하고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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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군이나 수령
방백을 잘 만남이 백성들의 홍복이라 했거늘 지지리도 복
없는 당시 조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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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들이었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전조의 명나라와
청나라 간 중립외교 노선을 포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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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명배청 정책을 확고히 했다.
인조가 재위한 26년 55일간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선조의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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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로 태어난 데다 무력으로
왕위를 탈취하다 보니 정통성이
보장 안 됐다. 늘 불안해
잠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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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기 일쑤였다. 또
다른 세력이 트집을 잡아 출중한 왕자를 보위에 올려놓으면 자신에게 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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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신세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우려는 곧 현실로 닥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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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反淸정책 정묘호란으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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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년(1624) 1월 등극 10개월 만에 일어난 이괄의 난이다. 반정 공신의 논공행상에서 2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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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밀려난 이괄의
불만이었지만 한때 서울이 점령되고 인조가 공주로 남천(南遷)하는 위급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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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까지 이르렀다.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온빈 한씨의 장남)을 왕으로 추대하고
각 도민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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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금 생업에 충실토록 방까지 써 붙였다. 백성들은 또 임금이 바뀌는 줄 알고 나라꼴을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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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관군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이 점령당하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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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야 평정됐지만
이괄과 함께 반란 주모자로 처형된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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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며 더 큰 국난으로 이어졌다.
인조의 반청정책과
불안한 국내 정세를 샅샅이 전하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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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을 종용해 3년 뒤 정묘호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3년 후인 인조 5년(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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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후금(청)이 3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명과는 ‘군신 관계’니 자기네와는
‘형제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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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맺자는 것이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천도하고 끝까지 버티려 했지만 준비 없이 당한 침략에
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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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이었다. 고육지책으로 강화 연미정(燕尾亭)에서 형제의 의를 맺고 서울로 환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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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국내 조정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국정을 주도하는 서인 세력이 사분오열돼 주상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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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둘 곳이 없었다. 서인이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갈리더니 다시 공서는 낙당(黨)과 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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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黨)으로, 청서는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으로 분열됐다. 이 상황에서도 낙당의 김자점(반정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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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효명옹주(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딸)를 손자 며느리로 맞아들여 척신으로 집권한
뒤 온갖 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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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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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 대륙을 거의 석권해 가던 후금 세력은 형제의 의를 군신 관계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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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자면서 감당 못할 협박을 가해 왔다. 조정 내 친명파들의 결사반대로 청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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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10만 대군을 앞세우고 침공해 왔다. 인조 14년(1636) 12월 정묘호란이 발발한 지 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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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또 일어난 국가재앙으로 병자호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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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묘호란 9년만에 병자호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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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들을 강화도로 피난시킨 뒤 인조도 뒤따르려 했으나
엄동설한의 폭설이 길을 막아 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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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으로 피신했다. 1만3000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성 안에서 버틸 식량은 50일뿐이었다. 청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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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만으로 병력을 증강해 탄천 변에 진을 치고 산성을 포위한 채 무작정 기다렸다. 수난은 가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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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 몫이었다. 죽지
못해 연명하는 식량을 군량미로
약탈당하고 부녀자들은 욕정에
굶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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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놈들의 능욕 대상이었다. 선조 때 임진왜란 참화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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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군도 공과(功過)는 병존하기 마련이다. 성 안에서 45일을 항전하다 삼전도 치욕을 겪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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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민족의 수모와
함께 소현세자 독살로 대표되는
인조 가족사의 불행과 치적들은 다음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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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다. 이후로도 인조는 좌의정 심기원이 난(인조 22년·1644)을 일으켜 반역 음모로 처단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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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그칠 줄 모르는 왕권 도전에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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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원비 인렬왕후(1594~1635·서평부원군 한준겸 딸) 한씨와 후궁 조씨 사이에서 소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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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 용평대군 등 모두 7남 1녀를
탄출했다. 계비 장렬왕후는
소생을 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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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다. 인조는 17년 동안을 한습(寒濕) 증세의 고질병에 시달렸는데 죽어서도 편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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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먼저 승하한 인렬왕후를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 북쪽에 예장하고 자신도 그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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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어느
날 능참봉이 능침을 순찰하다
기겁하고 놀랐다. 뱀·전갈
등과 벌레들이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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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에 집을 짓고 서식하는
게 아닌가. 영조가 황급히
서둘러 자좌오향(정남향)의 파주 땅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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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지해 합폄으로 천봉(영조 7년·1731)하니 오늘날의 장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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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長陵) 능상에서 대왕께 아뢰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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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신다면 또 정변을 일으켜 왕으로 옹립되시겠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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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하늘에 뜬 저 구름이 ‘때로는 구중궁궐의 곤룡포가 삼간모옥의 베적삼만 못하다’고 울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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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주는 듯싶다.
18.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6대>인조 계비 장렬왕후 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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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인 예법 정쟁속 `태풍의 핵'으로 살아 / 2010.08.06
운무에
휩싸여 있는 장렬왕후의 휘릉. 인조 계비로 본의 아닌 예송(禮訟)문제에 휘말려 불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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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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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의
상징인 휘릉 앞 상설들. 용맥이 급해 다른 능보다 촘촘히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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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번지 검악산에는 조선의 임금과 왕비, 추존왕(왕비)을 예장한 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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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93호)이
있다. 여기에는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고황제(이성계)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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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언덕에 목릉(제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현릉(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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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릉(추존 익종과 추존 신정왕후)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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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서쪽으로는 휘릉(제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경릉(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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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정왕후), 원릉(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혜릉(제20대 경종 원비 단의왕후), 숭릉(제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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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과 명성왕후)이 별개의 내룡맥을 타고 안장돼 있다. 서울에
있는 왕실의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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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기의 왕릉이 있다 하여 이름
붙여진 동구릉에는 모두 17위(位)의 왕과 왕비가 있으나 능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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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만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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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단릉(單陵)으로 있어도 능호가 올려지나 왕비는 왕과 함께 합폄되거나 곁에 묻히면 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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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능호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릉 중에는 군왕 못지않은 치열한 생애를 살았으면서도
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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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묻혀 남편 능호를 받은 왕비 능이 여럿 있다. 정희왕후(제7대 세조 왕비)의
광릉과 정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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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성종 계비)의
선릉이 대표적이다. 반면 금상을 두고 앞서 요절하거나 대행(大行·임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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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하한 뒤 시호를 올리기 전 칭호)보다 오래 살아 단릉으로 존봉된 왕릉도 적지 않다. 장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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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예종 원비)의
공릉과 공혜왕후(제9대 성종 원비)의 순릉이 여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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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 29세 어린 장렬왕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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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원비 인렬(仁烈)왕후 한씨(1594~1635)가 소현세자·봉림대군·인평대군의 세 왕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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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다섯째 왕자(넷째도 조졸)를 출산하다
훙서하자 몹시 허망해했다. 후궁
귀인 조씨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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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숭선군·낙선군)
1녀(효명옹주)를 뒀지만 정이 없었고, 42세로 떠난 원비를 못 잊어 했다.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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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인 인조 16년(1638) 한원부원군 조창원(양주 조씨) 딸을 계비로 맞으니 자의(慈懿)대비로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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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莊烈)왕후(1624~1688)다. 이때 장렬왕후 나이 15세로 44세의 인조와는 29세 차이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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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소현세자보다도 13세나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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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의 어린 소녀가 층층시하의 구중궁궐에 들어와 무엇을 알았겠는가. 그래도 내명부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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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
어른이었다. 인조는 꽃보다
더 곱고 양순한 나이 어린 계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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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이 아꼈다. 이괄의
난, 정묘·병자년의 양대 호란 등을 겪으며 황량하게 살다간 인렬왕후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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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될 수 없는 대조적인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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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왕후는 인조→효종→현종→숙종의 네 왕대에 걸쳐 65년을 재세하며 줄곧 왕실의 큰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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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자리했다. 성정이
안온해 내명부 간 마찰이 적었고 정사에 관한
무관심으로 금상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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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을 받았다. 흠결이라면 왕자를 탄출하지 못한 무육(無育)이었으나 이미 후사가 결정된 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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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조정은 안정
기조에 들었다. 그러나 이렇듯
평범한 일생을 살다간 장렬왕후가 역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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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에 던진 화두는 태산보다도 장중하다.
장렬왕후는 왕실 국상을 당할 때마다 대신들 간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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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의 정점 인물로 부각됐다.
왕후가 입어야 하는 복상(服喪) 기간을 두고 이전투구한 이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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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禮訟) 문제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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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제례
문화가 간편해지고 소홀해진 작금에 와서야 그때의 예송 논쟁이 한심할지는 모르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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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나 역사는 항상
당시 시각으로 소급해 규찰해야 한다. 성리학 이념으로 지탱되던 조선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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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제의(祭儀) 문제를
소홀히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반·상의
구별이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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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롯됐고 자칫 법도에 어긋나기라도 했다간 금수 취급을 당하며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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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가(家)마저도
신분 고하에 따라 4대(고조) 혹은 3대(증조)까지의 봉사(奉祀)가 규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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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졌다. 천민층은 조부(2대) 제향도 못 올리고 아버지 제사만 지내다가 고종 31년(1896)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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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이후 비로소 백성 모두가 4대 봉사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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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상기간 논쟁으로 조정 극심한 내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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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왕후의 복상 기간 논쟁은 당시 조정 내 권력 판도 향배와 맞물려 극심한 내홍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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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이후 권력을 거머쥔 서인(송시열·송준길)과
권토중래를 노리는 남인 간의 양보 없는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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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끝날 줄 모르는 이념 대결의 중심에 늘 임금이 있어 서인과 남인은 기사회생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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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는 추풍낙엽처럼 낙마하거나 실각해 유배지로 떠나야 했고 승자 역시 좌불안석이었다. 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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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로 병자호란이 끝나 청과 맺은 군신관계로
사회 안정도 되찾고 민심도 가라앉을 때다. 외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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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그러들자 내우가 고개를 들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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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죽자 장렬왕후는 ‘주자가례’에 따라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 3년 상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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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인조가 살아 있어 누구도 복상 문제에 끼어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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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예송 논쟁은 효종이
승하하면서 불거졌다. 이때
장렬왕후는 이미 자의대비로 존봉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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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다. 서인들은
효종이 임금이긴 하지만 인조의 차남이므로 기년상(朞年喪·1년)이 당연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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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했다. 남인들은
효종이 차남이긴 하지만 대통을 이어 장남과 다름없으므로 3년 상을 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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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고 정면 응수했다. 이때 용상에 앉은 현종(효종 아들)이 서인 측 주장을 채택해 남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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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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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대결은 자의대비 며느리인 인선왕후(효종 왕비)가
훙서(현종 15년
1674)하면서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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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명분은 동일하나 왕비(여자)여서 상복
기간이 짧아졌을 뿐이다. 서인
측은 인선왕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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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며느리이므로 9개월(大功說)을 지내야 하고, 남인
측은 중전이었으니 큰며느리와
같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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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朞年說)의 상복 기간이 맞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의 왕심(王心)은 남인에게 쏠려 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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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이 위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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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 자신 부정한 송시열에 사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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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싸움은 자의대비 손자인 현종이 승하하면서 송시열이 예송 문제를 다시 거론해 불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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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야 1·2차와 다를 바 없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복안이 깔려 있었다. 적통이지만 차남인 효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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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승계권에서 분리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살아 있는 셋째 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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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 승계권이 옮겨가는 것이다.
남인 측에서는 즉각 복상
문제를 빌미
삼아 역모를 도모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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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책이라고 몰아쳤다. 현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어린 임금 숙종은 이것이 곧 자신을 부정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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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임을 알아챘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유배 보낸 뒤 사약을 내렸다. 이후로도 조정은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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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재야 유림들 간 예송 논쟁으로 장구한 세월을 허비했다. 좀 더 상세한 논쟁 핵심은 효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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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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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당파 간 논쟁의 와중에서 일생을 살다 보니 자의대비가 드러낼
공·과는 이렇다 할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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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본의 아니게
남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정쟁불씨의 뇌관 역할만 해 온 생애였다. 무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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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숙종 14년(1688) 신병을
얻어 훙서하니 보령 예순다섯으로 계비로 입궐한 지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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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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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왕후가 붕어하자 조정에서는 동구릉 내 건원릉 서쪽 내룡맥에
유좌묘향(酉坐卯向·정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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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장사 지내고 능호를 휘릉(徽陵)으로
올렸다. 능지(誌)에 ‘규룡( 龍·뿔 없는 용)이
서리어 휘감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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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하고 호랑이가 앞다리를 세우고 앉은 듯하니 하늘이 아끼고 땅이 비장해
둔 자리’라고 기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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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이다. 다만 순전(능 앞 사초지)이 급한 단혈(短穴)인 것은 용맥이 솟구쳐 어쩔 수 없는 물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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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없어도 남이 조아리며 제사 지내는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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