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조선왕릉

11대 중종 ∼ 16대 인조

도화골 2017. 2. 10. 12:05

14.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1>중종대왕과 정릉

쓸쓸한 단릉소나기만 내려도 `질퍽' / 2010.05.07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중종대왕 정릉. 문정왕후의 억지 이장으로 임금 홀로 있는 쓸쓸한

단릉이다.

 

 

봄날 소나기에도 물이 차는 정릉 앞 정자각. 습지에서 잘 자라는 잡초들로 가득하다.

 능 이름을 놓고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정조 능을 융건릉이라고 우겨대는 것이다.  “그럼 그곳에 함께 있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 능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제야 꼬리를 내렸다.    사도세자(추존 장조) 능은 융릉

(隆陵)이고 정조 능은 건릉(健陵)이어서 두 능을 합쳐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조선왕조의 42기 능

가운데 석 자 이름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뿐이다.

 능명이 같은 경우도 많다.  영릉(英陵·제4대 세종), 영릉(寧陵·제17대 효종), 영릉(永陵·추존 진종)

과 장릉(莊陵·제6대 단종), 장릉(章陵·추존 원종), 장릉(長陵·제16대 인조)이 이름은 동일하나 한자가

다르다.  능 이름을  묘호(廟號)  부르는데  임금이 훙서한 뒤 조정에서 지어 올리는 것이며 재위

당시 치적과 왕의 운명, 성격 등이 포함돼 있기도 하다. 어느 임금도 살아생전 자신의 묘호를 알고

죽은 군왕은 없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왕릉을 선릉이라고  부르는데  원래는 선·정릉이다.   9대 성종과

11대 중종(정릉·靖陵)의 부자 왕릉이 함께 있는 것이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정릉(貞陵·태조 계비

신덕왕후)은 또 다른 왕릉이다. 중종이 예장된 정릉에 가면 안됐다는 생각부터 든다. 3명의 왕비와

7명의 후궁에 9 11녀를 뒀건만 어이해서 단릉(單陵)으로 쓸쓸히 혼자 있는지.  조선왕릉 중 태조

건원릉과  단종의  장릉도  단릉이긴  하지만  정릉과는 그 사연이 다르다.  중종은 장가를 잘못 가

죽어서도 이 신세가 된 것이다.

○ “임금 하지말고 편한 자리나 묻히지…” 한숨

 또 정릉에  가면 “차라리  임금 노릇  하지 말고 죽어 편한 자리나 묻히지…..…”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정릉은 한줄기 소나기만 지나가도 정자각 앞이 질퍽거리는 물 논이나 다름없다.  장마로

물이 불어났을 때는 홍살문 근처에 배까지 띄워 보기에도 민망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조선왕릉  가운데  능강(·능침 앞의 두툼한 인공 언덕) 아래까지  물이  차는  흉지  중의  흉지는

중종릉밖에  없다.   정릉은  건좌손향의  동남향인데  사룡맥(死龍脈)으로  침수를  피할    없는

물형이다.   좌향을  제대로 잡으면 냇가 바로 옆을 파도  물이 안 나고,  재혈(裁穴)을 잘못하면 산

중턱을 건드려도 물이 나는 게 풍수의 법수다. 이 또한 고약한 마누라(문정왕후)를 만난 탓이다.

 중종은 등극 과정도 극적이지만 재위 기간 동안 편할 날이 없었다.   연산군의 패악질이 절정에

달했던 1506 9 2.   서울의 밤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반정 주도세력 박원종·성희안·유순정·

홍경주 등은 두 패로  나눠 정현왕후를  급히 찾았다.  성종 계비로  진성대군의  생모인 정현왕후

앞에 엎드려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겠다고 아뢰었다.

 순간, 정현왕후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니 될 말이오. 우리 아이가 그 자리를 어찌 감당한단 말입니까.

 정현왕후가 극구 사양했지만 반정세력도 물러서지 않았다.

“군신(群臣)들이 협책하여 대계가 이미 정해졌으니 고칠 수 없습니다. 어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 다른 반정세력 진성대군에 입궐 재촉

 같은 시각 진성대군의 사저. 또 다른 반정세력들이 영문도 모르는 진성대군을 연(·임금이 타는

가마)에 태우며 입궐하기를 재촉했다.  이복형인 연산군이 눈치라도 챈다면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어서 겁부터 덜컥 났다.

 “이게 무엇들 하는 짓이오! 나는 임금도 싫고 이대로 사는 것이 좋소이다.

 이때 진성대군은 거창 신씨(연산군 처남으로 좌의정 신수근의 딸)와 가례를 올린 뒤 대궐 밖에

나가 평범한 왕손으로 숨죽여 살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시대적  인물이  내리는 판단은 가문의 영고성쇠와 유장한 국운과도

직결될 때가 있다. 반정에 앞서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좌상대감은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른 낌새를 알아챈 신수근이 버럭 화를 내며 대답했다.

 “비록 임금이 포악하긴 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염려할 바가 못 되오.

 그의 이 한마디는 번성하던 거창 신()씨 문중을 몰락의 길로 전락시켰다. 자신과 동생(신수영)

은 반정세력에게 참살당하고 누이는 폐비돼 기구한 목숨을 이어갔다.   딸 역시 왕비로 책봉된 지

일주일 만에 폐비돼 한 많은 70평생을 망연자실 살아가게 된다.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1488~1544)은 성종의 둘째 왕자로 어휘(御諱·임금의 이름)

(?)이다. 남의 덕에 왕이 되다 보니 임금 자리에 있는 동안 신세를 갚느라 힘겹기만 했고 원치도

않는 척신들의 등쌀에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처복마저 없었다.

○ 훈구파 견제 세력으로 사림파 카드 들어

중종은 등극한 뒤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잡고 부왕인 성종조의 태평성대를 이어가려고 진력했다.

 그러나 조정은 반정 공신들인 훈구파 세력들의 성토장이어서  임금은 항상 밀렸다.  위기를 느낀

중종이 훈구파들의 견제 세력으로 들이민 게 신진 사림파의 조광조 카드였다.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배경으로 등장한 사림파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정책으로 사사건건 훈구파들과 부딪쳤다. 사림파는

 ‘욕심 많은 소인배들’이라며 훈구파를 무시했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철없는 야생 귀족들’로 업신

여기며 으르렁댔다.  이런 와중에도 중종은  비변사를 설치해  북방 야인과 왜구들을 토벌해 민생

안정을 도모했다.  이로 인한 국방체제  정비와  군비 절감 등은 후대 왕들에게도 본이 됐다. 향약

(鄕約)을 통한 지방 자치와 주자도감 설치도 큰 치적으로 남아 있다.

 지나친 과욕은 언제나 화를 부르게 돼 있다.  사림파들이 주장한 반정 공신들의 위훈(僞勳)삭제

상소는 훈구파들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쉴 틈 없는 조광조의 강론으로 중종도 이들이

싫어졌다.   이 틈새를 이용해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한 게 기묘사화다.   훈구파들은 궁궐 정원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라  쓰고  글자에만  감즙을 발랐다.   며칠 후 벌레가  갉아 먹자 희빈 홍씨

(홍경주의 딸)를 시켜 임금께 전했다.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중종은  모함인 줄 알면서도

이들에게 사약을 내렸다.

 1544, 19세로 등극한 중종이 재위 38 2개월 만에 승하하니 보령 57세였다. 처음엔 서삼릉에

있는 장경왕후 옆에 묻혀 희릉이라  했는데 계비  문정왕후는 이 꼴을 못 보았다.   결국 명종 17

(1562) 시아버지(성종)와 시어머니(정현왕후)가 있는  선릉 왼쪽에 억지로 이장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히려 했으나 흉지임을 알고 마음을 접었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등극한 뒤 8년 동안 수렴청정하며 조정을 마음 내키는 대로 휘저었다.

이른바  훈신·척신의  대결이  문중싸움으로  비화되면서  조선 중기는  또다시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든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도 명종이 말을 안 들으면 내전에 불러다 매질을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철이 든 임금도 이런 어머니가 원수였다.

 

 

15.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11>중종 원비 단경왕후 온릉

꽃다운 스무살에 생이별 `없는 ' 누가 풀까 / 2010.05.14

 

 

 

조선왕조 최단명 왕비 단경왕후의 온릉. 중종반정의 권력 다툼에 희생된 거창 신씨로 ‘치마바위’의

슬픈 사연을 갖고 있다.

 

 

 

182년 만에 복위돼 왕릉으로 조성한 온릉 능역. 홍살문 안의 조영물이 초라하다.

어쩌다 할머니 산소에 가면 노을 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먹먹해질 때가 있다. 떼쓰며 울어 대는

손자를 따뜻한  등에 업어  주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봉분에 난 풀 한 포기라도 더 뽑게 된다. 

모두가 할머니와 포개진 사연이 각별해서다.   그러나 이름 모를 무덤 앞을  지나면서는 무덤덤할

뿐이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인정의 굴곡은 묘지마다 사연이 남달라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가 묻힌 무덤가에는 구구절절한 곡절이 무명 실타래처럼 두툼하기만 하다.

○ 외롭기만 한 단릉…구석구석 한 서린 듯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19번지 온릉(溫陵)의 구석구석에는 한 여인의 한이 알알이 박혀

있다.   11대 중종대왕의  원비 거창 신()씨가 영면해  있는 외롭기 그지없는 단릉이다.   사적

210호로  지정된  이곳에  오면  원망부터  앞선다.   도대체  권력의  속성이  무엇이고  개인의

일신영달이 무엇이기에 한 여인의 일생을 이리도 참담하게 비틀어 놓을 수 있는가 하고….. 그러나

역사는 이 여인의 한을 기억의 저 편에 밀쳐 두고 있다.

 사람이 남의 덕을 지나치게 입으면 평생 동안 신세를 갚느라 헤어나질 못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빚쟁이는 생일날 고깃국도 못 끓여 먹는다고 했을까. 혹시 돈 꿔준 사람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빚도

못 갚는 주제에 생일까지 챙기느냐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종이 그러했다.

 중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한 살 위인  거창  신씨(후일 단경왕후)와 가례를 올린 뒤 궁궐 밖의

사저에 나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12세의 신랑과 13세의 각시였지만 남달리 금슬이 좋아 조정은

물론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어머니가 왕실의 큰 어른인 정현왕후(성종 계비)였고 12

위의  연산군은  이복형이면서  처고모부여서  임금  자리만  노리지  않는다면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단경왕후(1487~1557)의 친정 역시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였다.  아버지(신수근)가 좌의정이었고

고모부가  임금(연산군)이요,  고모가  중전(폐비 신씨)이었다.  우의정이었던  할아버지(신승선)

임영대군(세종대왕 넷째 왕자)의 사위여서 날 적부터  종친의 혈통이었다.   희성(稀姓)  속했던

()씨 문중이 일찍부터 조정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이 같은 왕실 인연도 한몫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수상(殊常)했고 위태로웠다.  진성대군과  신씨 부부  역시 연산군의  황음무도와

온갖 패악으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폭군의 비위에 거슬리기라도 하면 살아남는 자가 없을 때다.

권불십년(權不十年)에 순천자(順天者)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했다.   백성들은 달도

차면 기울고 물이 끓으면 넘친다는 천리법도를 믿고 기다렸다.

 1506 9 2  마침내  학정의 끝 날이 왔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의 반정세력이 요동치는

민심을 등에 업고 연산군을 용상에서  쫓아낸 것이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115년 만의 지각변동

으로 신하가 임금을 폐위시킨 최초의 반정 사건이었다.

 난세에 영웅 나고 전시에 돈 번다고 했다.  뜻밖에도 왕위는 진성대군에게 돌아갔다.  꿈에서도

생각 않던 주상 자리였다.  “임금도 싫고 이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진성대군을  억지로 입궐시켜

이튿날 등극시켰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곤룡포에  면류관을  써야 하는데  익선관을 대신 쓰고

용상에 앉았다.

○ 반정세력 중전 책봉 7일만에 폐출

  연산군이 돌연 폐위되며 궐위(闕位)된 건 임금 자리뿐만 아니었다.  중전 신씨도 폐비돼 국모

자리도 비게 된  것이다.  반정세력들이 엉겁결에  부부인(府夫人·정일품의 대군부인)으로  있던

신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니 단경(端敬)왕후다. 사람이 좋은 자리를 오래 유지하려면 주변이 깨끗

하고 떳떳해야 한다.  단경왕후는  중전으로 책봉되는 날부터 가슴에 피멍이 맺혔다.  이미 친정

아버지(신수근)와 숙부(신수영)는 반정세력에 등 돌렸다 해서 참살당했고,  조정 안에 신씨 비호

세력이라곤 한 사람도 없이 제거된 뒤였다.

  이런 단경왕후의 근심은 하루도 못갔다.  중전으로 책봉된 이튿날 반정공신 유순·김수동 등이

다른 공신들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중종 앞에 부복해 아뢰었다. 임금은 저들 덕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처지였다.

 “전하, 의거하던 때 신수근을 죽인 것은 큰일에 성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딸이

궁중에 들어와 있는데 만일 그를 왕비로 오래 두면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이 생길 것입니다.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일이오니 은정을 끊고 내보내소서.

 중종으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왕이 되고자 함도 아니었는데 자기네들이 임금 자리에 앉혀

놓고  사이좋게  살던  부부를  생이별시키려  하는  것이다.   주상은  체면을 마다않고 이들에게

사정했다.

 “아뢴 일은 심히 당연하나 조강지처를 어찌 그와 같이 하리오.

 물러설 반정세력이 아니었다. 왕권이 안정돼 중전 세력이 커지면 아비 죽인 대신들을 그냥 놔둘

리 없다는  것을  그들 은 잘 알고  있었다.   반정세력들은  7일 동안  임금 앞에  엎드려 조르다가

급기야는 협박하기까지 했다. 중종 역시 조정에 아무런 세력 기반이 없어 무력할 뿐이었다. 이들이

자신을 내치면 연산군 같은 신세가 될 수도 있는 절체 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종묘사직이 지중하니 어찌 사정에 얽매이겠는가. 마땅히 중의를 좇으리라.

  이리하여 신씨는 책봉 7일 만에 최단명 왕비가 됐다. 이때 중종의 보령 열아홉이었고 단경왕후

나이 스물이었다.   신씨는  폐출돼 쫓겨나면서 진성대군과 사저 시절 즐겨 입던 다홍치마를 입고

나왔다.  그 치마에 얼굴을  묻고 혼절이  되도록 울었다.  차라리  여염집  비천한  작부만도 못한

신세가 돼 버린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비통했다.

○ 임금·폐비 치마바위 보며 서로 눈물

  신씨는 폐출되면서 친정집으로 옮겨 구차한 몸을 의탁했다. 지금의 인왕산 중턱이었다.  중종은

새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 9 11녀를  낳고 살면서도  조강지처를  못 잊어했다.   신씨는 중종이

저녁노을이 질 때면 인왕산 쪽을 바라보면서 슬픔에 잠긴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후 경복궁에서

내다보이는 인왕산 큰 바위에 자신의  다홍치마를 걸어 놓았다.   임금과 폐비는 치마 바위를 함께

보며 하염없이 눈물지었다고 한다.  또 중종은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거둥할 때마다 신씨의 친정집

근처에 일부러  머물며 타고 온 말을  사저에 보냈다.   이때마다 신씨는 사람 먹기도 귀한 흰 죽을

손수 쑤어 말에게 먹여 보냈다. 눈물 반 물 반이었다고 한다.

 유장한 세월 앞에는 높은 권세와 부귀공명도 부질없는 법이다. 명종 12(1557) 신씨가 세상을

떠나니 71세였다. 20세의 꽃다운 청춘에 임금과 생이별하고 생과부로 산 지 51년 만이었다. 사후

조정은 신씨의 복귀 문제를 놓고 182년을 갑론을박했다. 결국 영조 15(1739) 단경왕후로 복위

시켜 종묘에 배향하나 육신 쓰고 원통하게 산 한맺힌 매듭은 누가 풀어 줄 것인가.

  온릉은  야트막한  곡장과  간단한 석물을 세운 초라한 왕비 능이다.   임좌병향의 남향이어서

햇볕은 잘 드나 좌우가 약한 데다 능 앞의 안산이 가깝다.  후세 사람들은 정순왕후(단종 왕비)

애달픈 사연은 가슴 아파하면서도 단경왕후의 애끓는 심회는 제쳐 두고 있다.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에 단종과 생이별했지만 단경왕후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아는 철 든 나이에 중종과 생이별

했다. 옛 선인들이 이르기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라 했다.

 

 

16.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1>중종 1계비 장경왕후 희릉

출산 1주만에 승하 `대윤-소윤' 가른 불씨로/ 2010.05.21

 

 

 

  25세로 요절한 장경왕후 파평 윤씨의 희릉. 대윤 윤임의 동생으로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사후

수난이 끊이지 않았다.

 

 

    희릉 능침 앞의 무인석. 왕권의 상징으로 오직 왕릉에만 세울 수 있다.

  세상에서 사람이 겪는 고통 중 견줄  데 없는 모진 고통은  아이를 낳는 일이라 했다.  오죽하면

산고(産苦)  했을까.   그래서 만삭의  임산부가 출산을  하러 산실에 들어갈  때 자기가 신었던

신발을 눈여겨본다고 한다.  “내가 과연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하고.

  제11대 중종대왕 제1계비 장경(章敬)왕후는 참으로 박복한 여인이다. 대통을 이을 왕자를 출산

하고도 영화를  누려보기는커녕  젖꼭지조차 물려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국본

(國本·세자)과 목숨을 바꾼 것이다. 핏덩이 자식을 두고 죽는 한은 골수에 맺힌다 하여 눈마저 감지

못한다고 했는데 장경왕후가 그랬다.

○ 핏덩이 아들 두고 과다출혈로 숨져

  중종 10(1515) 2 25. 장경왕후가 효혜 공주를  낳은 지 5년 만에 산기가 있자 대궐 안은

잔치준비로 분주했다.  중종은 물론 궐 안팎의  대소신료들도  떡두꺼비 같은  왕자가 탄생하기를

학수고대했다. 마침내 우렁찬 고고성과 함께 원자가 태어나니 제12대 인종이다. 나라의 경사였다.

중종은 곧바로 가벼운 죄인들을 방면하고 하급직의 승급을 명하는 성은을 베풀었다.

 그런데 난산이었다.  출산과정에서 몇 번을 기절했다가 깨어난 왕후는 몸을 푼 뒤 한참 만에야

겨우 눈을 떴다.  이미 기력이 쇠진한  데다 과다출혈이었다.  급히 전의를 불렀으나 소생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갈을 받은 중종이 내전에 들러 마주했지만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모든 것을 직감한 임금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은총을 입은 바가 지극히 크온데 다시 더 번거롭힐 말씀이 없사옵니다.

 이튿날 왕비의 산후(産後)는 더욱 위중해졌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나 지필묵을 찍어

금상(今上)께 서찰을 올렸다.

  “어제는 심사가 혼망하여 잘 깨닫지 못하고  아뢰지를 못 했습니다.   지난해 여름 바야흐로 몸

(인종)을 가지고 있을 때이옵니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이 아이를 낳거든 억명(億命)이라 함이

좋겠다’ 하므로 이를 써서 벽에다 감춰두고 남에게 발설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중종이 벽을 찾아보니 사실이었다.   한없이 측은하고 억장이  무너졌지만  서산낙일 지는 해를

막을 자 그 누구도 없었다. 왕비는 인종을 낳은 지 일주일 만인 3 2일 경복궁 별전에서 승하했다.

하늘도 무심하여라.   유난히도  심성이 곱고 어질었던  왕후가 죽자  온 산하는  큰 슬픔에 잠겼고

천지신명을 원망하며 앙천통곡했다.

○ 죽음이 불러온 소용돌이 `일파만파'

 자고로 갑남을녀(甲男乙女)나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역사의 축()을 돌려 놓을 순 없다. 역사는

권력의 칼자루와  재물의  곳간에서 예기치  않던 궤도로 급선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5세로

요절한 장경왕후(1491~1515)의 족적이 찬란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 여인의 죽음이 불러온

역사의 일파만파는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는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번지에  있는 조선왕실 능역에는 효릉(12대 인종) 예릉

(25대 철종)과 함께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있어 서삼릉으로 회자된다.   65970평의 사적

200호로 지정된 이곳에는 대군·군·공주·옹주 등 왕손들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 54기와 연산군

의 생모 폐비 윤씨 묘도 함께 있다.  전국 각지의  풍수명당에 산재해 있던 태실들을 왕실 정기를

끊기 위해 일제가 강제 집결시킨 것이다.

  간좌(동에서 북으로 45)곤향(서에서 남으로 45)의 서남향인  희릉의  잉상(孕上·능침 뒤의

산정기가 응결된 곳)에 다다르면 애절한 물음부터 앞선다. “그토록 귀한 왕세자를 낳으시고 품에

한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뜨셨으니 얼마나 원통하십니까. 아울러 왕비마마께서는 당신의

사후에 일어난 끔찍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알고 계시온지….

 장경왕후 파평 윤씨는 성장과정이 불우했다.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이며 고조부 윤번이 세조의

장인이며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다.  8세 때  어머니(순천 박씨)  죽자 얼마나  울었던지  사훼

(나무 가지처럼 야위고 마름) 지경에 이르렀다고 왕실 내명부 문서에 전하고 있다. 이 참상을 전해

들은 월산대군 부인이 손수 데려다 양육하게 된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으로 중종에겐 큰아버지다.   그 월산대군의 부인(승평부인·昇平夫人·

정일품)  파평 윤씨로  장경왕후의  친정 고모였던  것이다.   월산대군은  순천 박씨를  후실로

두었는데 박원종의 누이였다. 연산군이 절세미인이었던 박씨를 겁탈하자 박씨는 자결하고 말았다.

악에 받친 박원종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용상에 앉혔다.

○ 제2계비된 문정왕후 역사 뒤흔들어

 중종이 등극하자 박원종 등 반정세력은 연산군의 처조카딸 되는 중종 원비 단경왕후 신()씨를

일주일 만에 강제로 폐비시켜  궁궐에서 내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매형 집에서 성장해 숙의로

있던 파평 윤씨를 제1계비로 앉히니  바로 장경왕후다.   왕실의 혈연과 혼인관계는  이렇게 얽히

고설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장악해  왔다.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오빠 윤임(1487~1545)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며 정국은 또다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된다.  이즈음에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훙서한 것이다.  조정은  윤임의 9  조카딸이  되는 문정왕후를 제2계비로 맞았다.

여기서 또다시 역사는 뒷걸음질치고 국정은 농단되고 만다.

  장경왕후는 죽어서도 수난을 겪었다.  붕어 후 처음에는 헌릉(현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오른편

산록에 능침을 조성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했다.   그러나 사후의 안식도 오래가지 못했다. 좌의정

김안로가 장경왕후 묏자리가 풍수적으로 흉지라며 이장을 내세워 정쟁을 일으킨 것이다. 문정왕후

와 원수지간이었던 김안로가 계모(문정왕후) 슬하에서 자라는 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김안로는 장경왕후가 낳은 효혜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 중종의 부원군 신분이었다.

 결국 장경왕후는 진명(盡命)한 지 23년 만인 중종 32(1537) 현재의 서삼릉으로 천장됐다. 7

후 중종이  승하하자  유명에  따라  희릉  옆에  동원이강릉으로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과 왕비 능

사이로 옮겨 세웠다.   김안로의 권력 전횡으로  장경왕후와 그의 소생 인종과도 원수가 되어버린

문정왕후가 이 상황을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왕위에 오른 인종을 닦달하고  볶아 8개월 만에 죽게 한 뒤 아들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세상은

온통 문정왕후 것이었다. 친정 9촌 아저씨 윤임을 사사시키고 동생 윤원형을 권력 핵심으로 내세

워 국정을 뒤흔드니 민심은 이반되고 나라 재정은 바닥나고 말았다.

 기어이 문정왕후는 9촌 고모 되는 장경왕후와 남편 중종 사이를 갈라놓았다.  명종 17(1562)

중종을 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정릉으로 이장하고 자신도 옆에 묻히려 했으나 뒤늦게 흉지임을

알고 서울 노원구 태릉에 안장됐다. 장경왕후 희릉의 수난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농협 산하

젖소개량사업소가 들어서면서 입수(入首) 용맥이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되었다.

  장경왕후의  이런  속내를 알고 서삼릉 내의 희릉을 참배하노라면 속절없는 인간 수명이 야속

하기만 하다.   더불어 장경왕후의  요절은 명문거족이었던  파평 윤씨  문중을  대윤과 소윤이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으로 갈라놓아 그 앙금이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

 

 

17.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6>인조대왕과 파주 장릉<>

역모와 외침 `소용돌이'…구중궁궐 `가시밭길' / 2010.07.23  

 

 

 

재위기간 내내 역모와 외침에 시달려 온 인조대왕. 원비 인렬왕후와 파주 장릉에 합폄으로 예장돼

있으며 소현세자 독살로 가족사까지 불행했다.

 

 

 

후금()에 강제로 ‘형제의 의’를 맺은 강화 연미정. 외교정책의 실패로 당한 치욕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릉 40기 중에는 동명의 능호를 사용하나 한자가 다른

왕릉이 여럿 있다.  이 중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번지에 있는  장릉(章陵·사적202)

경기도  파주시 갈현리 산25-1번지에  있는  장릉(長陵·사적203)  부자 간의  왕릉이어서

유별나다.

  김포 장릉은 추존 원종(元宗)대왕과 인헌왕후 쌍분 능으로 인조(仁祖)대왕 생부와 생모의 능침

이며 일반에 널리 공개돼 역사탐방객들의 발길이 잦다.   파주 장릉은 원종의 아들인 인조와 원비

인렬왕후의 합폄 능인데 비공개 능이어서 언론취재나 학술연구 목적 외에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 때론 범부들보다도 못했던 임금의 삶

  임금도 한 인간의 궤적을 비껴갈 수 없음이야 남루한 비색 촌로도 다 알 수 있을 법한 일. 절대

 권력의 용상 자리가 만민들한테야 부러웠겠지만 때로는 범부들만도 못한 때가 얼마든지 있었다.

 조선의 역대 군왕 중 인조(1595~1649)만큼 극적이고 고단한 삶을 살다간 임금이 또 있을까.

  왕으로서 인조의 생애는  기구하기 짝이 없다.   ()삼촌이자  금상인 광해군의  패도만행이

능양군(인조)  집에까지  미쳐 동생(능창군)  유배 가서 자결하고  아버지(정원군·추존 원종)마저

화병으로 원통하게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광해군을 등에 업은 대북파의 국정농단이 극에 달하자

백성들은 등을 돌렸고 차라리 천지변고라도 생기기를 학수고대했다.

  절박한 민심에  하늘이 움직였다.   전국 각지의 민심동요가 반정 조짐으로 이어지더니 마침내

능양군을 앞세운 친명파(서인) 세력이 대궐을 점령하면서 창덕궁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인조 1

(1623) 3 13일로 광해군이 보위에 있은 지 15 1개월 만이었다.

  능양군이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찾아가 잠긴 빗장을 열고 어보를 거둬 전하면서 재배와

함께 통곡했다.   대비 김씨는 10년 만에 비로소 청천 하늘을 우러러 봤다.   대위(大位)는 마땅히

능양군 것이었다. 다 죽어가는 목숨을 구해준 서()손자가 아닌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복위한

인목대비 김씨의 명으로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곧바로 즉위하니 제16대 임금 인조대왕이다.

29세였다.   혁명이나  반정이  성공하면 전조(前朝)의 정책은 뒤집히고 혁신 세력이 등장하여 새

질서를 수립함은 권력 이동의 수순이다.   선조  이래 50 년간  권력을  빼앗겼던 서인 세력은

집권하자마자 대북파 핵심 세력들과 잔당들을 참수하고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인군이나  수령 방백을  잘 만남이  백성들의 홍복이라 했거늘 지지리도 복 없는 당시 조선의

민초들이었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전조의 명나라와 청나라 간 중립외교 노선을 포기하고

친명배청 정책을 확고히 했다.  인조가 재위한 26 55일간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선조의 서자

아들로 태어난 데다  무력으로 왕위를 탈취하다 보니  정통성이 보장 안 됐다.   늘 불안해 잠 못

이루기 일쑤였다.  또 다른 세력이 트집을 잡아 출중한 왕자를 보위에 올려놓으면 자신에게 당한

광해군 신세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우려는 곧 현실로 닥쳐왔다.

反淸정책 정묘호란으로 이어져

  인조 2(1624) 1월 등극 10개월 만에 일어난 이괄의 난이다.   반정 공신의 논공행상에서 2

으로 밀려난  이괄의 불만이었지만 한때 서울이 점령되고 인조가 공주로 남천(南遷)하는 위급상황

에까지 이르렀다.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온빈 한씨의 장남)을 왕으로 추대하고 각 도민들로

하여금 생업에 충실토록 방까지 써 붙였다. 백성들은 또 임금이 바뀌는 줄 알고 나라꼴을 한탄했다.

 지방 관군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이 점령당하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난이야  평정됐지만 이괄과  함께 반란  주모자로  처형된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치며 더 큰 국난으로 이어졌다.   인조의 반청정책과  불안한 국내 정세를 샅샅이 전하며 조선

침략을 종용해 3년 뒤 정묘호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3년 후인 인조 5(1627),

이번에는 후금() 3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명과는 ‘군신 관계’니 자기네와는 ‘형제의 의’

를 맺자는 것이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천도하고 끝까지 버티려 했지만 준비 없이 당한 침략에 속수

무책이었다. 고육지책으로 강화 연미정(燕尾亭)에서 형제의 의를 맺고 서울로 환도했다.

 그렇다고 국내 조정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국정을 주도하는 서인 세력이 사분오열돼 주상조차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서인이  공서(功西)  청서(淸西)로 갈리더니 다시 공서는 낙당()과 원당

(元黨)으로, 청서는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으로 분열됐다. 이 상황에서도 낙당의 김자점(반정공신)

은 효명옹주(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딸)  손자 며느리로 맞아들여 척신으로 집권한 뒤 온갖 횡포

를 자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 대륙을 거의 석권해 가던 후금 세력은 형제의 의를 군신 관계로 다시

바꾸자면서 감당 못할 협박을 가해 왔다. 조정 내 친명파들의 결사반대로 청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10만 대군을 앞세우고  침공해 왔다.   인조 14(1636) 12월 정묘호란이 발발한 지 9

후에 또 일어난 국가재앙으로 병자호란이다.

○ 정묘호란 9년만에 병자호란 비극

  왕자들을  강화도로  피난시킨 뒤 인조도 뒤따르려 했으나 엄동설한의 폭설이 길을 막아 남한

산성으로 피신했다.  13000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성 안에서 버틸 식량은 50일뿐이었다.  청군은

12만으로 병력을 증강해 탄천 변에 진을 치고 산성을 포위한 채 무작정 기다렸다. 수난은 가련한

백성들 몫이었다.  죽지 못해 연명하는  식량을 군량미로 약탈당하고  부녀자들은 욕정에 굶주린

되놈들의 능욕 대상이었다. 선조 때 임진왜란 참화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비극이었다.

 어느 인군도 공과(功過)는 병존하기 마련이다. 성 안에서 45일을 항전하다 삼전도 치욕을 겪게

되는 민족의  수모와 함께 소현세자  독살로 대표되는 인조 가족사의 불행과 치적들은 다음호로

이어진다. 이후로도 인조는 좌의정 심기원이 난(인조 22년·1644)을 일으켜 반역 음모로 처단되는

등 그칠 줄 모르는 왕권 도전에 신음했다.

 인조는 원비 인렬왕후(1594~1635·서평부원군 한준겸 딸) 한씨와 후궁 조씨 사이에서 소현세자,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 용평대군 등 모두 7 1녀를 탄출했다.   계비 장렬왕후는 소생을 두지

못했다. 인조는 17년 동안을 한습(寒濕) 증세의 고질병에 시달렸는데 죽어서도 편치 못했다.

 인조는 먼저 승하한 인렬왕후를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 북쪽에 예장하고 자신도 그 옆에 묻혔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능참봉이  능침을 순찰하다 기겁하고 놀랐다.   뱀·전갈 등과 벌레들이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서식하는 게 아닌가.  영조가 황급히 서둘러  자좌오향(정남향)의 파주 땅을 다시

택지해 합폄으로 천봉(영조 7년·1731)하니 오늘날의 장릉이다.

 장릉(長陵) 능상에서 대왕께 아뢰어 봤다.

 “전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신다면 또 정변을 일으켜 왕으로 옹립되시겠나이까.

 먼 하늘에 뜬 저 구름이 ‘때로는 구중궁궐의 곤룡포가 삼간모옥의 베적삼만 못하다’고 울림으로

전해 주는 듯싶다.

 

 

18.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6>인조 계비 장렬왕후 휘릉

-서인 예법 정쟁속 `태풍의 '으로 살아 / 2010.08.06

 

 

 

  운무에 휩싸여 있는 장렬왕후의 휘릉. 인조 계비로 본의 아닌 예송(禮訟)문제에 휘말려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

 

 

 

  왕권의 상징인 휘릉 앞 상설들. 용맥이 급해 다른 능보다 촘촘히 세웠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번지 검악산에는 조선의 임금과 왕비, 추존왕(왕비)을 예장한 동구릉

(사적 제193)이 있다.   여기에는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고황제(이성계)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 언덕에  목릉(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현릉(5대 문종과 현덕왕후),

수릉(추존 익종과 추존 신정왕후)이 자리 잡고 있다.

 건원릉 서쪽으로는 휘릉(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경릉(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  원릉(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혜릉(20대 경종 원비 단의왕후),  숭릉(18

현종과 명성왕후)이 별개의 내룡맥을 타고 안장돼 있다. 서울에 있는 왕실의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아홉 기의 왕릉이 있다 하여  이름 붙여진 동구릉에는 모두 17()의 왕과 왕비가 있으나 능호는

아홉 개만 사용하고 있다.

  임금은 단릉(單陵)으로 있어도 능호가 올려지나 왕비는 왕과 함께 합폄되거나 곁에 묻히면 별도

의 능호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릉 중에는 군왕 못지않은 치열한 생애를 살았으면서도 주상

근처에 묻혀 남편 능호를 받은 왕비 능이 여럿 있다. 정희왕후(7대 세조 왕비)의 광릉과 정현왕후

(9대 성종 계비)의 선릉이 대표적이다.   반면  금상을  두고  앞서  요절하거나 대행(大行·임금이

승하한 뒤 시호를 올리기 전 칭호)보다 오래 살아 단릉으로  존봉된  왕릉도 적지 않다.   장순왕후

(8대 예종 원비)의 공릉과 공혜왕후(9대 성종 원비)의 순릉이 여기에 해당된다.

  인조, 29세 어린 장렬왕후 맞아

  인조는  원비  인렬(仁烈)왕후  한씨(1594~1635)  소현세자·봉림대군·인평대군의    왕자를

남기고 다섯째 왕자(넷째도 조졸)를 출산하다 훙서하자 몹시 허망해했다.   후궁 귀인 조씨 사이에

2(숭선군·낙선군) 1(효명옹주)를 뒀지만 정이 없었고,  42세로 떠난 원비를 못 잊어 했다.   3

뒤인 인조 16(1638) 한원부원군 조창원(양주 조씨) 딸을 계비로 맞으니 자의(慈懿)대비로 유명한

장렬(莊烈)왕후(1624~1688).   이때  장렬왕후  나이  15세로 44세의 인조와는 29세 차이였으며

큰아들 소현세자보다도 13세나 어렸다.

  열다섯의 어린 소녀가 층층시하의 구중궁궐에 들어와 무엇을 알았겠는가.   그래도 내명부에선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 어른이었다.   인조는 꽃보다 더 곱고 양순한 나이 어린 계비를

끔찍이 아꼈다.   이괄의 난, 정묘·병자년의 양대 호란 등을 겪으며 황량하게 살다간 인렬왕후와는

비교될 수 없는 대조적인 삶이었다.

  장렬왕후는 인조→효종→현종→숙종의 네 왕대에 걸쳐 65년을 재세하며 줄곧  왕실의 큰 어른

으로 자리했다.   성정이 안온해 내명부 간 마찰이 적었고 정사에 관한  무관심으로 금상들로부터

섬김을 받았다. 흠결이라면 왕자를 탄출하지 못한 무육(無育)이었으나 이미 후사가 결정된 뒤여서

오히려 조정은  안정 기조에 들었다.   그러나 이렇듯 평범한  일생을 살다간  장렬왕후가  역사의

지평에 던진 화두는 태산보다도 장중하다.   장렬왕후는 왕실 국상을 당할 때마다 대신들 간 이념

대결의 정점 인물로 부각됐다.   왕후가 입어야 하는 복상(服喪) 기간을  두고 이전투구한  이른바

예송(禮訟) 문제가 그것이다.

  상·장·제례 문화가 간편해지고 소홀해진 작금에 와서야 그때의 예송 논쟁이 한심할지는 모르겠

으나 역사는  항상 당시  시각으로  소급해 규찰해야 한다.   성리학 이념으로 지탱되던 조선 중기

사회에서  제의(祭儀)  문제를 소홀히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반·상의 구별이 여기서

비롯됐고 자칫 법도에 어긋나기라도 했다간 금수 취급을 당하며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졌다.

사대부가()마저도  신분  고하에  따라  4(고조)  혹은 3(증조)까지의 봉사(奉祀)가 규범으로

정해졌다.   천민층은  조부(2) 제향도 못 올리고 아버지 제사만 지내다가 고종 31(1896) 갑오

개혁 이후 비로소 백성 모두가 4대 봉사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 복상기간 논쟁으로 조정 극심한 내홍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 논쟁은 당시 조정 내 권력 판도 향배와 맞물려 극심한 내홍으로 치달았다.

인조반정 이후 권력을 거머쥔 서인(송시열·송준길)과 권토중래를 노리는 남인 간의 양보 없는 대결

이었다. 끝날 줄 모르는 이념 대결의 중심에 늘 임금이 있어 서인과 남인은 기사회생을 거듭했다.

패자는 추풍낙엽처럼 낙마하거나 실각해 유배지로 떠나야 했고 승자 역시 좌불안석이었다.   바야

흐로 병자호란이 끝나 청과 맺은 군신관계로  사회 안정도 되찾고 민심도 가라앉을 때다.   외환이

수그러들자 내우가 고개를 들고 나선 것이다.

 소현세자가 죽자 장렬왕후는 ‘주자가례’에 따라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 3년 상을 치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조가 살아 있어 누구도 복상 문제에 끼어들지 못했다.

 첫 번째 예송 논쟁은  효종이 승하하면서 불거졌다.   이때 장렬왕후는 이미 자의대비로 존봉된

뒤다.   서인들은 효종이 임금이긴  하지만 인조의  차남이므로  기년상(朞年喪·1)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남인들은 효종이 차남이긴 하지만 대통을 이어 장남과 다름없으므로 3년 상을 치러야

한다고 정면 응수했다.   이때  용상에  앉은  현종(효종 아들)  서인  측 주장을  채택해 남인은

실각하고 말았다.

 두 번째 대결은 자의대비 며느리인 인선왕후(효종 왕비)가 훙서(현종 15 1674)하면서 맞붙었다.

이번에도 명분은 동일하나 왕비(여자)여서 상복 기간이 짧아졌을 뿐이다.   서인 측은 인선왕후가

둘째 며느리이므로 9개월(大功說)을 지내야 하고,  남인 측은 중전이었으니  큰며느리와 같으므로

1(朞年說)의 상복 기간이 맞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의 왕심(王心)은 남인에게 쏠려 서인

세력이 위축됐다.

○ 숙종, 자신 부정한 송시열에 사약

 마지막 싸움은 자의대비 손자인 현종이 승하하면서 송시열이 예송 문제를 다시 거론해 불붙었다.

내용이야 1·2차와 다를 바 없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복안이 깔려 있었다. 적통이지만 차남인 효종을

왕위 승계권에서 분리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소현세자의 살아 있는 셋째 아들에게

대통 승계권이 옮겨가는 것이다.   남인 측에서는 즉각 복상  문제를  빌미 삼아 역모를 도모하려는

획책이라고  몰아쳤다.   현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어린 임금  숙종은 이것이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유배  보낸 뒤 사약을 내렸다.   이후로도 조정은 전국

지방·재야  유림들  간 예송 논쟁으로 장구한 세월을 허비했다.   좀 더 상세한 논쟁 핵심은 효종과

현종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 같은 당파  간 논쟁의 와중에서  일생을 살다 보니 자의대비가 드러낼 공·과는 이렇다 할 게

없다.   본의 아니게 남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정쟁불씨의 뇌관 역할만 해 온 생애였다.   무심한

세월이  흐른  숙종  14(1688) 신병을 얻어 훙서하니 보령 예순다섯으로 계비로 입궐한 지 50

만이었다.

  장렬왕후가  붕어하자  조정에서는 동구릉 내 건원릉 서쪽 내룡맥에 유좌묘향(酉坐卯向·정동향)

으로 장사 지내고 능호를 휘릉(徽陵)으로 올렸다. 능지()에 ‘규룡( ·뿔 없는 용)이 서리어 휘감긴

듯하고  호랑이가  앞다리를  세우고  앉은 듯하니 하늘이 아끼고 땅이 비장해 둔 자리’라고 기록한

명당이다. 다만 순전(능 앞 사초지)이 급한 단혈(短穴)인 것은 용맥이 솟구쳐 어쩔 수 없는 물형이다.

자식이 없어도 남이 조아리며 제사 지내는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