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릉 뒤의 풍수 입수처. 산 정기를 모아주는 곳으로 명당에서만 볼 수 있는 병목 지형이다.
|
급보를 접한 태조 이성계는 억장이 무너졌다. 다섯째 왕자 방원(芳遠·후일 태종대왕)이 세자
|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이고 왕조 개국 일등공신들인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철퇴로
|
주살했다는 것이다. 평소 지니고 다니던 신궁(神弓) 백우전(白羽箭)을 얼른 집어 들었지만 몸이
|
말을 듣지 않는다. 그때 이미 태조는 병이 깊었던 것이다.
1398년 8월 25일, 조선을 개국한 지 7년
|
만의 일이었다.
|
|
|
|
|
|
|
|
|
태조는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왕위를 둘째 왕자 방과(芳果·정종대왕)에게
물려주고 왕사인
|
무학(1327~1405)대사와 양주 회암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
|
‘도대체 임금 자리가 무엇이기에 어린 동생들까지 죽여야
한단 말인가. 내 이럴 줄
알았으면
|
호랑이 같은 방원이를 세자로 책봉하는 건데….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걸 어찌 하겠는가.’
|
얼핏 태조의 독백을 들은 무학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
|
|
|
|
“상왕 전하, 부디
마음을 내려놓으소서. 돌이켜 보면 인간사 모두가 공망한 것 아니겠사옵니까.
|
이제부터는 난마같이 얽힌 정사를 모두 잊으시고 남은 여생을 편히 쉬소서.”
|
|
|
이때 둘은 지금의 망우리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당시 태조의 나이 63세로 무학은 8살 위인
|
71세였다. 멀리 검암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둘은 눈빛만 마주쳐도 속내를 꿰뚫는 사이였다.
|
“이젠 뒷방 늙은이 신세가 뭐 바랄 게 있겠소. 천천히 죽어 묻힐 신후지지나 있으면 미리
|
봐둘까 하오.”
|
|
|
|
|
|
|
|
|
이런 연유로 무학과 함께 잡아 둔 자리가 오늘날의 건원릉이라고 전한다. 태종 8년(1408) 태조가
|
74세로
승하하자 태종은 하륜·김인귀 등 풍수에 능한 조정대신들을 총동원해
능 터를 결정하니
|
이미 무학대사가 점찍어 둔 바로 그 자리였다.
|
|
|
|
|
|
조선왕조는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100리 안에 왕과 왕비의 무덤을 조성했다. 4㎞를 10리로
|
잡았으니까 40㎞에 해당한다. 능제를 지낸 임금이 서둘러 출발하면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
거리였다. 왕릉 가운데 도성에서 100리가 넘는 영릉(여주·세종대왕) 장릉(영월·단종대왕)
|
융릉(수원·사도세자) 건릉(수원·정조대왕) 등에 얽힌 사연은 그때 가서 쓸 것이다.
|
|
정사와 야사를 통해 만나는 태조 이성계의 일생은 파란만장 그대로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
타고난 무인기질로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용맹한 장수였다. 역성혁명의 기회
|
앞에서는 무자비하게 피 흘리며 왕조를 창업했지만, 권력의 정상에서는 자식들의 골육상쟁으로
|
필부필부(匹夫匹婦)만도 못한 고통과 회한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
|
|
|
일찍이 정적 관계였던 포은 정몽주는 태조를 일컬어 “풍채는
헌걸차고 씩씩하여 화산(華山)의
|
용골매요, 지략은 깊숙하고 두드러져 남양(南陽)의 와룡(臥龍)이다”라고 받들었다. 때마침
|
동구릉을 찾은 날은 100여 년 만에 내린 폭설이 계속되는 강추위로 녹지 않아 그대로
쌓여 있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후 왕릉 관리가 더욱 강화돼 능상의 촬영은 반드시 관리사무소의
|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죽고 나서 너나 할 것 없이 땅속에 묻히는 건 다를 바
없다.
|
여름엔 비 맞고 겨울엔 눈 맞아야 하는 이치 또한 임금이나 평민이나 동일하다는 생각이다.
|
태조는 한평생 군인으로 팔도강산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지만 늘 함흥 고향땅을 잊지 못했다.
|
원래 관향(성씨의
고향)은 전주였으나 그의 4대조 안사(安社)가 당시 전주 지주사(知州事)와의
|
불화로 삼척으로 이주했다. 악연은 이어져 그 지주사가 다시 관동안렴사로 부임해
오자 머나먼
|
땅까지 피신해 살게 된 것이다.
|
|
|
|
|
|
|
당시 국경은 현재의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닌 철령 일대를 가로지르는 경계였다. 이미 망조가
|
들어 북원으로 쫓겨 간 원나라는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히며 감당 못할 공물을 요구해 왔다.
|
걸핏하면 쳐들어와 국경은 수시로 변했다.
태조의 조상들은 대를 이어가며 지방 무장호족으로
|
고려를 위해 싸우다가 조정에서 홀대하면 원나라로 가 벼슬도 했다. 말 타고 활 쏘며 칼
쓰던 시절
|
국경을 맞댄 지방 호족들의 일상이었다.
|
|
|
|
|
|
이즈음 황해도
곡산에서 후일 태조의 운명을 가르게 되는 계비 신천 강(康)씨를 만난다. 당시
|
벼슬아치들은 고향에 둔 부인을 향처(鄕妻)라 했고 서울에 사는 부인은 경처(京妻)로 불렀다. 특히
|
전쟁터를 누비는 무장들에게는 오늘날의 ‘바람끼’가 아닌 현지 수발자의 조력자 개념이었다.
|
신덕고황후 강씨는 정릉 편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
|
|
|
|
1335년 화령부(현재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이자춘과 최씨(최한기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
태어난 이성계는 나면서부터 무골(武骨)이었다. 이 무렵 14세기 중반의 중국 대륙은 명의 주원장이
|
원을 위협하고 만주지역에서는 여진족이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
빈번한 노략질로 문관보다는 무관이 우월적 지위에 있을 때다.
|
|
|
|
이성계는
홍건적을 물리치고 왜구를 섬멸하는 등 국운이 위태로운 전쟁에서 승승장구해 어느덧
|
고려 조정의 신흥군벌 세력으로 우뚝
서게 된다.
공민왕의 부원군(임금의 사돈)으로
이미 권력을
|
장악하고 있던 최영 장군과의 숙명적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둘 사이의 역사적 운명은
|
위화도 회군으로 판가름 나 최영은 처형당하고 이성계는 조선 임금으로 등극해 태조가 된다.
|
후일의 사가들은 이 당시 두 장군의 군사적 대결을 두고 아직까지도
견해가 엇갈린다. 그 후
|
원나라는 멸망해 자취를 감추었고 신흥세력 명나라는 1644년 망국에 이를 때까지 300년 가까이
|
중원 대륙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처럼 천운을 타고나 왕조를 창업한 태조에게도 시국을 판단함에
|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 왕조 개국의 일등공신인 방원을 제쳐두고 어린
|
방석을 후일의 임금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
|
|
|
|
|
만일 이때 태조가 계비 강씨와 정도전 등의 소청을 물리치고 호랑이 같은 방원을 세자로
|
책봉했더라면 국초의 조선이 얼마나 평탄했겠느냐는 돌이킬
수 없는 탄식이다. 이로
인해 계비
|
소생 방번과 방석은 비명에 죽고
조선경국전을 쓴 삼봉
정도전도 절명하고 말았다. 태조가 이
|
역사를 되풀이한다면 다시 그런 결정을 할까 하는 생각이
눈 쌓인 건원릉 입수(入首·산의 정기가
|
묘지로 들어오는 볼록한 곳) 지점에서 스쳐간다.
|
|
|
|
|
|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산재한 조선 왕릉을 답사하면서 궁금한 점이 있을 것이다. 왜 건원릉에만
|
갈대가 무성할까. 능상의 갈대는 태조의 고향 함흥에서 직접 옮겨온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
고향의 흙과 갈대를 이식하라 했고 사초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유언이 600년이 넘도록
|
지켜지고 600년 동안 무탈하게 살아 있는 갈대가 경이롭기만 하다.
|
|
|
|
천하의 무학대사가 잡은 건원릉의 좌향은 무엇일까 궁금해 나경을 펼쳐 들었다. 나경은 패철,
|
뜬쇠로도 불리며 좌(머리 부분)와 향(다리 부분)을 맞춰보는 나침반이다. 계좌정향으로 서쪽으로
|
15도
기운 정남향에 가깝다. 능 위의 입수는 축(丑)방향이고 물이 들어오는 방향(得水)은
|
곤신(坤申·서남쪽)향이며 물이 나가는 방향(破口)은
병(丙·남동쪽)향으로 풍수에서 말하는 천하길지
|
대명당이다.
|
|
|
|
|
|
|
|
|
연재가 계속되면서 언급이 되겠지만 왕릉과 풍수는 무관하지 않은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특히
|
무학대사는 신라 말의
도선국사→지공대사→나옹선사로 이어지는 한국풍수의 정통맥으로 사찰과
|
왕릉풍수에 도통했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과거시험의 잡과에 속했던 풍수도 재미있게 풀어갈
|
생각이다.
|
|
|
|
|
|
|
|
|
현재 동구릉에는 왕과 왕비 17위가 안장돼 있으며 궁궐의 동쪽에 있다 해서 동구릉(東九陵)이다.
|
조선왕릉 모두가 두 자씩의 능호이나 개국 태조릉에만 석 자를 붙인 건원릉이다.
4.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
<1대>태조 계비 신덕고황후 정릉
|
270년만에 종묘 배향 … 원 씻는 눈물 비로 내렸나 / 2010.01.22
고려 불교 양식으로 조성된 능 앞의 장명등. 태종과의 불화로 수차례 천장돼 병풍석과
|
난간석이 없다.
태조 계비 신덕고황후의 정릉 정(丁)자각.
능 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매년 9월 왕실
|
전통예법으로 봉행된다.
|
|
|
|
|
|
|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들의 묘 앞에 설 때마다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
임금이 묻힌 왕릉에서부터 영의정 판서 등을 지낸 고관대작, 풍전등화 같은 누란의
|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장군, 간교한 세 치 혀를 잘못 놀려 무고한 인재들을 죽게 한
|
희대의 간신, 국권을 넘겨주고 당대의 일신 영달에 눈멀었던 매국노…. 심지어는 일생을
|
종 노릇하다 섬기던 상전 앞에 묻힌 노비와 살아생전 타고 다니던 말과 소 무덤도 있다.
|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산87-16번지. 북악터널을 지나 정릉삼거리에서 우회전하고
|
아리랑 고개로 진입하면 바로 ‘정릉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좌우의 상점들과
|
아파트의 좁은 길을 가다 보면 막다른 길목에 이르는데 이곳이 세계문화유산
|
정릉(貞陵)이다.
29만9574㎡(90,621평)의 사을한(沙乙閑) 산록에 단릉(單陵)으로 조성된
|
이 능은 태조 이성계가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던 계비 강(康)씨가
영면해 있는 곳으로
|
사적 제208호로 지정돼 있다.
|
|
|
|
|
|
|
정릉을 다녀오면서 북한 개성시 상도면 풍하리에 있는 제릉(齊陵)을 지나칠 수가 없다.
|
태조의 원비 신의고 황후 안변 한씨 능으로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다. 원비 한씨
|
(1337~1391)는 함경도 영흥 출생으로 태조가 벼슬하기 전 시집와 방우ㆍ방과(정종)ㆍ
|
방의ㆍ방간ㆍ방원(태종)ㆍ방연 여섯 왕자와 경신ㆍ경선
공주를 낳았다. 태조보다 두
살
|
아래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91년 9월 23일 55세로 승하했다.
|
|
|
계비 신덕고황후 신천(또는 곡산) 강씨는 황해도 출신으로 당시 권문세가였던
|
판삼사사 상산 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
|
|
|
|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태조의 등극 거사에 직접 참여했고 조선 개국 후에도
|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왕자 방번ㆍ 방석(초봉세자)과 경순 공주를 뒀으나
|
원비의 다섯째 왕자 방원(정안대군)과의 정적관계로
후사마저 끊기게 된다. 개국 초 조선
|
천지를 뒤흔든 제1차 왕자의 난이다.
|
|
|
|
|
|
여기서 계비 강씨의 생몰연대에 대해 새롭게 밝혀 둘 것이
있다. 지금까지 다수의
|
역사기록에 그의 출생
연도가 미상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는 고려 공민왕 4년인 1356년
|
(병신)
6월 14일생이었다. 태조보다 21세 연하로 1396년 8월 13일
41세를 일기로
|
갑자기 승하했다. 이 사실들은 전주이씨 왕실계보를 기록한 선원 보감 등에 밝혀져 있다.
|
○ 계비 돌연사 후 자식·측근 몰사
|
|
|
|
|
|
개국 초 조선왕실의 권력 구조는 난마같이 얽혔다. 원비 한씨의 장성한 여섯 왕자가
|
있었지만 계비는 자신의 소생으로 왕실 대통을 이으려 했다. 이에 동조한 것이 신권주의
|
(臣權主義ㆍ지금의 내각책임제와 유사)를
부르짖던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등이었다.
|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건국하는 데 목숨을 걸었던 정안대군이 크게 반발했고 왕위
|
계승에 은근히 뜻을 뒀던 넷째 왕자 방간도 술렁였다. 끝내 태조가 11세의
어린 방석
|
(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안대군은 속이 뒤집혔다.
|
|
|
|
이런 판국에 계비가 돌연사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야 사후 뒷일을 알 바 아니겠지만
|
이후 자신의 소생은 물론 자신을 따르던 아까운 인재들도 몰살당했다. 뒤늦게 안 태조가
|
땅을 쳤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계비를 경복궁에서 내다보이는 곳(현재
영국
|
대사관 자리)에 장사 지내고 정릉이라 능호를 내렸다. 오늘날
중구 정동의 유래가 여기서
|
비롯됐다.
|
|
|
|
|
|
|
|
자신도 죽으면 함께 묻히려 했으나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
|
|
정릉은 왕릉치고는 초라한 무덤이다.
능을 감싸는 병풍석과 난관석도 없고 석물들도
|
초라하다. 태종으로 등극한 정안대군이 정릉을 여러 차례 이장하면서 정자각을
헐어
|
버렸다.
|
|
|
|
|
|
|
|
|
석물들은 실어다 광교 돌다리로 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이즈음
|
아무렇게나 옮겨 쓴 자리가 현재의 정릉이니 오죽했겠는가. 풍수에 능한 태종이
|
미워하는 계비 묘를 명당에 잡을 지관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종 8년(1669년)
|
우암 송시열의 상소로 종묘에 배향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정릉은 촌부의 무덤만도
|
못한 잊힌 폐묘였다.
|
|
|
|
|
|
|
왕실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호(號)를 내렸다. 묘호(廟號)는
|
임금이 승하하고 조정 대신들이 지어 바친 것으로 태조ㆍ세종ㆍ영조 등이 이에 해당한다.
|
왕 자신들도 살아서는 몰랐던 것이다.
이와 함께 존호(尊號)는
임금의 덕을 기려 사후에
|
지어 올린 것으로 왕비는 휘호(徽號)라
했으며 종묘(宗廟)에 모셔진 신주에 새겨져 있다.
|
정릉ㆍ태릉ㆍ홍릉 등은 능호(號)라
부른다. 이와는 달리 시호(諡號)는 임금이 공을 세운
|
신하한테 내리는 칭호로 충무공ㆍ문정공 등이며 문중의 영광이었다.
|
|
|
○ 좌청룡 우백호·좌수우도 국세
|
|
|
|
|
|
능상에
올라 나경으로 좌향을 재 보니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경좌갑향(庚坐甲向)
|
이다. 나경은 24방위로 나뉘어 있으며 1방위가 15도씩으로 360도
원을 이루는 풍수
|
전문가의 나침반이다. 정릉은 좌청룡이 우백호를 감싸안으며 좌측에서 물이 내려와
|
우측으로 흘러가는 좌수우도(左水右倒)의
국세다. 산
정기를 능으로 밀어 주는 입수
|
(入首) 용맥이 갈라져 능 앞의 바람을 막아 주는 안산(案山)이 형성되지 못했다.
|
|
좌청룡이 내려와 작국(作局)한 금대국세(金帶局勢)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남자와 벼슬을
|
의미하고 우백호는 여자와 재물을 상징한다.
|
|
|
|
|
태조가 강씨 부인을 만나던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호랑이 사냥을 나섰던
|
태조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
|
|
|
|
|
마침 물 길러 나온 처녀가 있어 물 한 바가지를 청했다. 버들잎을 띄워 건네 주는 물을
|
후후 불며 천천히 마신 뒤 연유를 물으니 “급히 물 마시다 탈이 나실까 염려돼 그랬다”고
|
대답했다. 그 처녀가 바로 계비 강씨다.
|
|
|
|
|
|
신덕황후라는 휘호를 되찾아 종묘에 배향되던 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
이때의 비를 원을 씻어 주는 비라 해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고 한다. 신덕고황후는
|
후일 고종황제가 추존해
올린 호다. 정릉 기신제향(忌辰祭享)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
왕자인 광평대군파 후손들이 매년 9월 23일
올리고 있다.
5.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3대>태종 대왕과 헌릉
|
내·외 청룡 -내·외 백호 조화 `藝서린듯 …' / 2010.01.29
능 뒤 입수용맥에서 바라본 헌릉 건너의 대모산. 물처럼
흐르는 수체형으로 길격의
|
조산이다. 오른쪽이 태종대왕이며 왼쪽은 원경왕후 민씨다.
난간석으로 연결시킨 조선 최초의 쌍릉. 생전에 불화했던 왕과 왕비를 편안케 하려는 세종대왕의
|
효심을 엿볼 수 있다.
|
|
|
|
|
|
|
|
고려 말 공민왕(재위 1351~1374) 당시의
국제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상국으로
섬기던 원
|
(1271~1368)은 망국의 길에 접어들어 북으로 쫓겨 갔고, 이미
중원대륙에서는 한족인 주원장이
|
명(1368~1644)을 건국해 감당 못 할 충성을 고려에 요구했다. 원은 이민족으로는 최초로 중국
|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이다. 이후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하기는 청(1616~1912)을
|
세운 만주족이 두 번째다.
|
|
|
|
|
|
|
|
국내 정세는 더욱 복잡했다.
망해 가는 원을 떠받드는 최영 중심의 수구세력과, 신흥대국 명을
|
지지하는 이성계 주축의 개혁세력 간 첨예한 대결이었다. 이즈음 공민왕이 동성연애하던 미소년
|
들에게 살해당하고 우왕이 등극하자 조정에서는 왕 씨가 아닌 요승
신돈의 아들이라고 두 패로
|
갈라졌다. 이때 고려
조정의 캐스팅 보트는 포은 정몽주가 쥐고 있었다. 포은은 송헌 이성계(후일
|
태조고황제)와 함께 친명파로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 신돈 아들을 폐하고 진짜
왕 씨를 세움)에
|
뜻을 같이 했다.
|
|
|
|
|
|
|
|
|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 장악
|
|
|
|
|
|
|
회군으로 송헌이 정국을 장악하자 포은은 송헌을 제거하려 했다.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누비던
|
송헌의 다섯째 아들 방원(정안대군·1367~1422)이
먼저 눈치를 챘다. 정안대군이 최후 결심을 하고
|
포은에게 회심의 시 한수를 던졌다.
|
|
|
|
|
|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
백년까지 누리리라.”
|
|
|
|
|
|
|
|
이른바 하여가(何如歌)다.
새 왕조 창업의 뜻을 둔 정안대군의 속내를 간파한 포은이
단심가
|
(丹心歌)로 고려 조정에 대한 충절을 분명히 했다.
|
|
|
|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
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
|
|
|
|
|
|
역사적 두 인물의 교린우호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후 정안대군의 심복 조영규는 개성 선죽교
|
에서 포은을 격살해 버렸다.
1391년 4월 조선왕조 창업 3개월 전의 일로
이때 정안대군의 나이
|
25세였다. 최영도 처형당한 뒤여서 정몽주의 죽음은 곧
고려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
|
이후 정안대군은 수차례의 숙청위기와 반전을 거듭한 끝에 제1·2차 왕자의 난을 정치적 발판
|
으로 조선 제3대 임금 태종대왕으로 등극한다. 그 태종을 능에서 만나러 헌릉(獻陵·서울 서초구
|
내곡동 산13-1)에 가는 날엔 유별나게 춥던 올 겨울 날씨가 풀렸다. 박석고개를 넘어 성남 방향의
|
헌릉로를 따라가다 내곡 IC에서 좌회전하면 매표소 앞에 최근 세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는
|
표석이 반긴다. 사적
제194호로 지정된 이곳은 119만3071㎡(36만904평) 규모로 제23대 순조대왕
|
의 인릉(仁陵)이 함께 있어 헌인릉이라 부른다. 천하를 호령하던 600년 전 임금을 살아서는 만날
|
수 없는 일이고 능에서라도 이렇게 알현(謁見)하니 감개무량하기 그지없다.
|
|
|
○ 재위 18년간 놀라운 치적
|
|
|
|
|
|
|
|
순탄한
영웅의 일생이란 없듯이 태종도 그러했다.
고려 우왕 9년(1383) 17세 약관의 나이로
|
문과 급제 이후 밀직사대언으로 봉직했고 목은 이색과 함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는 외교력을
|
발휘하기도 했다. 이후
부왕 태조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치며 난국의 정객들을 끌어 모았다. 그는
|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권력이란 아버지와 아들·어머니와 아들·형제자매 사이에도
|
결코 나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
|
|
|
|
|
태종의 재위(1400~1418) 18년 동안의 치적은 놀랍다. 당시는 조선이 개국한 지 10년도 안 된
|
상황이었다. 고려왕조를 부활하려는 유민세력이 도처에서 궐기했다. 왕권이 약화되면 민심은
|
언제든지 고려로 되돌아 갈 수 있는 난세였다. 태종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
|
|
전 왕조의 멸망 원인을 국력 쇠약과 불교(밀교) 부패라고
확신한 그는 전국 242개 사찰만 남기고
|
모두 폐쇄한 뒤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는 등 척불숭유 정책을 강력히 전개했다. 조선을
함께
|
건국한 개국공신일지라도 왕권을 분산시키려는 소위 신권(臣權)주의자들은 가차없이 처단했고
|
외척들의 권력개입도 용서치 않았다.
|
|
|
|
|
|
|
땅 기운이 쇠한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 사병 혁파, 거북선 개발, 신문고
설치, 호패법 실시
|
등을 통해 가히 혁명적인 발상으로 국초의 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태종은 특히 외척과
|
사돈들을 믿지 않았다. 재위하는 동안 선위(禪位· 살아서 임금 자리를 물려주는 것) 파동을 네
|
번이나 일으키며 딴맘 먹은 신하들과 친·인척들을 골라냈다.
|
|
|
|
○ 양녕 외삼촌 넷 `사약' 참극위화도
|
|
|
|
|
|
|
이 판에 임금의 의중을 잘못 파악한 세자 양녕대군의 외삼촌 넷(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은
|
사약을 받고 자진(自盡)하는 참극을 당한다. 양녕이 왕재가 아니라고 판단한 태종이 충녕대군(후일
|
세종대왕)에게 양위하면서는 사돈이면서 세종의 장인이 되는 심온을 사사해 버린다. 그리고는 어느
|
누구도 왕실 측근에 함부로 범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
|
|
|
세종4년(1422) 5월 10일 56세로 승하하면서 태종은 세종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나는 이
|
세상에 잔재해 있는 모든 악몽과 슬픔을 뒤집어쓰고 갈 것이니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
어진 성군이 되어라.”
|
|
|
|
|
|
|
|
태종의 능은 자신보다 2년 앞서 승하한 원경왕후 민씨(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와 동원이봉
|
(同原異封)의 쌍릉으로 조성돼 있다. 살아생전 왕과 왕비의 사이는
살벌했다.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
사이에 4남 4녀를 둔 뒤 후궁들에게서 8남 13녀를 두었다. 왕실 번창과 외척세력 분산을 위한 큰
|
뜻이었지만 원경왕후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매형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이
|
큰 친정 남동생 넷을 죽인 남편이 아닌가.
|
|
|
|
|
|
헌릉에 오면 조선의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조형물과 만나게 된다. 우선 거대한
|
봉분 규모에 압도되고 능을 둘러싼 병풍석이 아주 가깝게 밀착된 데다 난간석으로 두 능이 연결돼
|
있는 것이다. 여기서
후세 사람들은 세종대왕의 효심을 읽는다. 두 분 사이의 불화를 누구보다도
|
잘 알았던 세종이 사후에라도 화해토록 난간석을 연결해 놓은 것이다. 문·무인석 등 석물도 두 쌍
|
씩 세워 능의 위엄을 갖추도록 세심히 배려했다.
|
|
|
|
|
|
기록에 따른 헌릉의 좌향은 건좌(동에서 남으로 45도) 손향(서에서 북으로 45도)으로 서북향인
|
데 나경을 꺼내 정밀 측정하니 분명히 해좌사향이다. 좌와 향이 각각 15도씩 차이가 나는 것이다.
|
건좌와 해좌는 나경에 표시된 바로 옆의 좌(坐·시신의 머리를 모시는 곳)지만 후손들의 운세는
|
크게 달라지는 위치여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풍수만의 비결이다.
|
|
|
|
이에 대한 대답은 또 다른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옛날 왕릉이나 사대부 묘를 조성하면서는
|
광중(壙中·시신이 묻히는 지점)과 봉분의 좌향을 얼마든지 달리 썼다. 특히 왕릉은 국가기밀에
|
해당하는 중대사였으므로 실제 좌향과 봉분 좌향을 위장 법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
|
능상에 올라 보니 겹을 이루는 내·외 청룡과 길게 둘러친 내·외 백호가 절묘하다. 지금이야
|
비닐천막촌이 들어서 좌· 우가 심히 손상됐지만 조성 초기의 헌릉은 둘러만 보아도 탄복했을
|
명당이다. 그 우백호
자락에 인릉이 자리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건 거대한 생룡이 용트림하듯
|
내려오다 입수(入首) 지점에서 대리석을 만나 우뚝 서 버린 것이다. 입수와 광중 사이의 매장석은
|
정기석(精氣石)이라 하여 풍수에서는 아주 귀하게 여기는 돌이다. 헌릉에
와서는 이 돌을 찾아봐야
|
한다. 새 왕조가 들어서는 혼란기에 대세를 오판하고 줄을 잘못 섰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은
국가
|
동량들이 많다. 때로는
멸문지화로 이어진 인물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어찌 옛날만의 일이겠는가.
|
역사는 과거로부터 우리가 걸어온 길인 동시에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을-.
6.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4대>성군 세종대왕과 영릉
|
좌청룡·우백호 내달리는 `천혜 명당' / 2010.02.05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청송 심씨를 안장한 조선 최초의 합장릉으로 자좌오향의 천하명당
|
대길지다. 세종은
하늘이 내린 성군으로 지치시대를 열었다.
|
|
|
|
국조오례의에 따라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합장릉이지만 혼유석은 두 개를
따로
|
조성했다.
|
|
|
|
|
|
|
|
|
사람과 사람이 의사를 소통함에는 말과 글이 있다. 글씨를 쓸 줄 모르는 문맹자도 말은
잘할 수
|
있어 얼마든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그러나 군 부대에서 온 아들의 편지나 재미있는 이야기
책
|
등은 읽을 수가 없다.
|
|
|
|
|
|
|
|
우리 역사에 세종대왕이 등극 안 했으면 아직까지도 이두(吏) 문자를 쓰고 있을 것이다. 삼국
|
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표기법이 완성된 이두는 중국 한자의 음(音·소리)과
|
훈(訓·뜻)을 빌려 그 당시 우리말의 문장 구성법에 따라 토를 붙인 불완전 문자다. 이두가 얼마나
|
어렵고 난해한지는 다음의 예문으로 알 수 있다.
|
|
|
|
|
|
‘너 나 없이 다짐하며’를 이두로 표기하면 ‘여오무역고음위며(汝吾無亦 音爲 )’다. 너 여(汝) 나
|
오(吾) 없을 무(無) 또 역(亦·중국어 발음 ‘이’) 다짐둘
고( ) 소리 음(音·여기서는 소리 값이 없음) 하
|
위(爲) 하며 며(
) 자의 소리와 뜻 가운데 ‘너 나 없이 다짐하며’만 편의대로
취한 것이다. 온갖
|
시달림과 부역으로 생존조차 위협받던 무지한 백성들이 이 문자를 어찌 알겠는가. 팔자 좋게
|
태어난 왕손이나 귀족 중에서도 한자를 통달하다시피 공부해야 사용할 수 있는 극히 제한된
|
기록수단이었다.
|
|
|
|
|
|
|
|
|
예나 지금이나 한 국가의 국운 융창은 그 당시 최고 지도자의 영도력에 의해 좌우된다. 군
통수
|
권자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전제 군주 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늘은
반만년 역사의
|
우리나라에 시대 시대마다 위대한 인물들을 탄생케 해 이 강토를 지켜내고 유장(悠長)한 민족사를
|
이어가도록 배려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같이 빛나는 역사적 인물 중 단연 최고의 영웅이
|
세종대왕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
|
|
|
|
|
○ 어려서부터 성군의 기질
|
|
|
|
|
|
|
|
태조 6년(1397) 4월 10일,
한양 잠저(潛邸)에서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왕자로 태어난
|
세종의 어휘(御諱·임금의 이름)는 도다. 왕조 개국 후 태어난 정통 왕자였으며
충녕대군 시절부터
|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성격은 침잠·과묵하여 말수가 적었다고 기록돼 있다. 모습은 씩씩하고
|
아름다워 위의(威儀)가 천금 같았고 풍채는 좋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
|
태종은 상왕으로 있는 4년 동안에도 병권(兵權)만은 놓지 않고 절대 왕권에 걸림돌이 되는
|
대신이나 친·인척들은 모조리 제거했다. 세종에게서 성군(聖君)의 기미를 찾은 태종은 왕조의
|
앞날을 낙관하며 이렇게 자주 말했다.
|
|
|
|
|
|
|
“명주(明主·밝고 현명한 임금)를
얻어 국정을 맡기고 보니 걱정 없음이 천하에 나 같은 이가 없을
|
것이다. 어찌 오직 천하뿐이리오. 고금을 통해서도
또한 나와 같이 걱정 없는 이가 없으리라.”
|
세종은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54세로 붕어(崩御)할 때까지 32년 동안 보위에 있었다. 그의
|
재위 시절은 수구세력인 개국공신들이 거의 세상을 떠난 뒤여서
과거를 통해 발굴된 신진 두뇌
|
들이 마음껏 국정에 참여한 시기다. 집현전을 통해서는 평생 학문에만 전념토록 뒷받침해 ‘백성을
|
가르치는 바른 소리’인 훈민정음 창제라는 역사적 대업을 이뤄 놓는다.
|
|
|
세종이 치세하는 동안 이미 나라 안팎에서는 동방의 요순(堯舜·중국에서 가장 훌륭한 황제)
|
시대가 도래했다며 모두가 기뻐했다. 관리는 그 직분에 충실했고 백성은
그 본업에 편안했으며
|
조정은 부조리가 없이 맑고 깨끗하게 잘 다스려졌다. 정치·경제·국방·사회·과학·문화·농업·의학·음악
|
등 세종의 통치가 골고루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정치 탄압이나 징계도 거의 사라져
공직자는
|
국가를 위해 헌신했고 양민들은 생업에 충실했다. 바야흐로 태평성대였다.
|
|
|
세종의 업적은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다. 국가의 오례(吉·嘉·賓·軍·凶禮)와 서민의 사례(冠·婚·喪·
|
祭禮)를 새로 정립해 간소화했고, 농사직설·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의방유취 등과 법률·역사·유교·
|
문학·어학·천문·지리·의학·농업기술에 관한 수많은 서적을 발간했다.
|
|
|
|
또 성곽 수축과 전함 수리로 국방을 튼튼히 했고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 4군과 6진을 설치해
|
오늘날의 국경으로 확정짓는 한편,
일본 대마도도 정벌해 항복받았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와
|
혼천의 해시계·물시계 등을 제작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케 하는 한편 세금을 공평하게
|
했으며 노비들에 대한 사형도 금하도록 했다.
|
|
|
|
|
|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논리적 체계를 갖춘 훈민정음을
손수 창제해 반포(1446년)할 때는
|
상국인 명(明)이 반역으로 다스리려 했지만 세종은 굴하지 않았다. 최만리 등 신하들의 반대와
|
상소가 빗발쳤으나 전혀 동요됨이 없었다.
문자의 독립은 곧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적 자주 독립
|
이었고 종묘(나라)와 사직(백성)이 천년만년을 누리는 탄탄대로였기 때문이다.
|
|
|
세종은 중년 들어 소갈증(당뇨)으로 고생했다. 소헌왕후 청송 심씨와의 사이에서 8대군 2공주를
|
비롯해 후궁과 궁인들에게서 12군 2옹주를 뒀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례없는 왕실의 번창이었다.
|
말년 들어 건강이 악화되자 세종
27년(1445) 세자 문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치 일선에서 거의
|
물러났다. 1450년 2월 17일, 아끼던 막내왕자 영응대군 사저에서 세종이 승하하자 만조백관
|
신하와 백성들은 물론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
|
|
|
|
|
세종은 4년 앞서 승하한 소헌왕후를 부왕(태종)이 잠든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안장
|
하고 훗날 자신도 묻히려 했다.
승하 후 국풍(國風·왕릉 터를 잡는 풍수)들이 물이 나는 흉지라고
|
만류했으나 세종의 유명(遺命)이어서 하는 수 없이 합장으로 장사 지냈다.
|
|
|
○ 국조오례의 따른 조선 첫 왕릉
|
|
|
|
|
|
|
세월이 흘러 정변과 참극이 수습된 예종 1년(1469)
마침내 영릉은 현재의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
왕대리 산83-1번지로 천장된다. 국조오례의에 따른 조선 최초의 왕릉으로 병풍석을 없애고 난간
|
석만 세웠으며 석물들도 단출하다. 합장릉으로 혼유석은 왕과 왕비를 따로 배치했다.
|
|
영릉에 와서는 풍수를 운위함이 외람된 천하제일 명당이다. 원래 이곳은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
광주 이씨 이계전과 영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문중 묘지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
맏아들 이극배를 예종이 불러 자리 양보를 청하니 가족들과 상의해 응해 줬다. 당시 이인손의
묘를
|
파묘하니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높이 오르거든 연줄을 끊고 그 떨어지는 자리에 묘를 모셔라”는
|
글귀가 나왔다. 그대로 따르니 연은 서쪽 십리 밖에 떨어졌고 이장한 후에도 광주 이씨 문중은
|
번창했다.
|
|
|
|
|
|
|
|
|
북성산을 용틀임하며 엎치락뒤치락 기복(起伏)한 내룡맥이 우렁차고
북현무·남주작·좌청룡·
|
우백호·안산·조산 모두의 자리매김이 인위적으로 배치한다 해도 불가능한 천혜의 명당에 자좌오향
|
의 정남향이다. 자(子·북)좌
오(午·남)향은 3대를 적선해도 차지하기 힘들다는 대길(大吉) 터다.
|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
해 세종대왕을
이곳에 모신 이후 조선왕조 운세가 100여 년이나
|
연장됐다고 한다.
7.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5대>문종대왕과 현릉
|
단종의 슬픔 머금은 왕후릉엔 난간석만 …
/ 2010.02.12
|
|
|
동일 구역 내 있으면서 내룡맥이 다르게 조성된 동원이강릉. 왼쪽이 문종대왕이고 오른쪽이
|
현덕왕후 능침이다.
문종대왕 현릉에서 바라본 왕비 현덕왕후 권씨 능. 왕비릉은 현덕왕후가 꿈에서 세조를
|
하고서 파헤쳐지는 등 치욕적인 수난을 당했다
|
|
|
|
|
|
문종대왕이 영면해 있는 현릉은 동구릉 안의 태조고황제 건원릉 동쪽에 있다. 두 능침이
가까운
|
위치에 있으나 능이 조성된 언덕이 다른 것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 하는데 문종대왕과
|
현덕왕후의 왕릉이 대표적이다.
능이 두
개이나 별도의 능호를 사용하지 않고 현릉(顯陵)이라
|
부른다. 여기에는 무섭고도 섬뜩한 역사적 사실이 동행한다.
|
|
|
|
문종은 태종 14년(1414) 10월 3일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청송 심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
때
|
세자로 책봉되고 성균관에 입학해 장래의 군왕 수업을 철저히 받으며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
성장했다. 세자는 부왕 세종을 닮아 예의범절이나 법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독서가 지나쳐
|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온종일 한가한 시간이라곤 조금도 없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
효성이 지극하여 세종의 탕약과 수라상을 직접 챙기고 밤늦도록 병시중 들다가 ‘물러가라’는 명이
|
있기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
|
|
|
|
|
|
세종은 오히려 이런 세자가 늘 걱정이었다. 할아버지 태조가 어떻게 창업하고,
아버지 태종이
|
어떻게 지켜낸 왕조인데 저래 가지고 어떻게 종묘 사직을 지켜낼 것인가. 더구나 범같이 혈기왕성
|
하고 야심 찬 둘째 왕자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제대로 왕업은 이어갈 수
|
있을 것인지….
|
|
|
|
|
|
|
|
|
○ 권씨 세자빈 진봉 단종 폐위 단초
|
|
|
|
|
|
|
가례(嘉禮·왕실의 혼인)를 일찍
올려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
첫 번째 세자빈으로 책봉된 김씨가 궁녀들과의 ‘적절치 못한 행실’로 쫓겨나고 두 번째 세자빈
|
봉씨 역시 ‘온당치 못한 행실’로 폐출되고 만다. 이럴 때마다 세종은 언행이 너무 신중하고
과단성
|
이 없는 데다 남녀 간 음양이치를 소홀히 하는 세자 향(珦)을 크게 염려 했다.
|
|
|
봉씨가 폐위되자 당시 양원에 있던 권씨(증 의정부 좌의정 권전의 딸)가 세자빈으로 진봉(進封)
|
되는데 후일 이것이 단종 폐위의 단초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권씨는 문종과의 사이에
경혜공주
|
를 낳고 25세가 되던 해 단종을 출산하고 산고를 못 이겨 3일 만에 승하했다. 어린 단종의 왕위를
|
찬탈하면서 세조는 단종이 정빈 출신의 적손(嫡孫)이 아님을 트집으로 내세웠다.
|
|
문종의 세자 시절은 29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그는 측우기와 해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 제작에
|
참여할 정도로 천문 율력(律曆) 성운(聲韻)에 정통 박식했고
초서와 예서에도 능했다. 다섯째
|
왕자인 광평대군이
조졸하자 그의 외아들 영순군을 궁중에 데려다 친자식처럼 보살피는 등 효행
|
우애가 백성들로 하여금 본이 됐다.
|
|
|
|
|
|
|
○ 몸 상하는 줄 알고도 과중한 업무
|
|
|
|
|
|
|
즉위 초부터 온갖
질환에 시달려 온 세종은 마침내 즉위 24년 신하들의 빗발치는 반대를 물리
|
치고 모든 정무를 세자에게 맡긴 채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 몸이 상하는 줄 알면서도 과중한
|
업무와 싸워 나갔다. 이런
시국상황을 수양대군(후일 세조)과 한명회·권남 등은 조심스럽게 지켜
|
보고 있었다. 초기 조선 역사에 무서운 피바람이 몰아쳐 올 소름 끼치는 조짐이었다.
|
|
1450년 보위에 오른 지 32년 만에 세종이
승하하자 곧바로 세자가 승계하니 제5대 임금 문종
|
이다. 문종은 당시
등창을 앓고 있으면서도 3일 동안 음식을 입에 안 대고 슬퍼함이 너무 지나쳤
|
다고 행장(行狀)에 기록돼 있다. 초하루와 보름 상식 때 애통해하며 3년 상을 마친 것이 초상 때와
|
같았다 하니 몸이 남아났겠는가. 후일의 사가들은 이것이 죽음을 앞당기고 왕실의 비극으로
이어
|
짐을 왜 몰랐을까 하고 안타까워한다. 염려는 현실로 닥쳐왔다.
|
|
|
|
문종은 재위 2년 3개월 만에 경복궁 정침에서
승하했다. 뛰어난 치적은 없었으나 선왕의 유업을
|
계승하며 옛 신하들을 바꾸지 않고 관례대로 따랐다. 군신 간 언론을 넓히고 문을 숭상하되 무를
|
중히 여기며 궁중의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도록 독려했다. 몸을 돌보지 않은 채 국사에 전념하다
|
돌연히 떠난 정국은 급속히 얼어붙었다. 이때 대통을 이어받은 단종의 나이는 12세였다.
|
|
부왕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던 문종이 승하하자 생전의 유언대로 영릉(원래 세종의 영릉은
현재
|
의 헌인릉 오른쪽에 있었음) 오른쪽으로 장지를 정했으나 물이 나고 바위가 있어 취소했다. 서둘러
|
건원릉 동쪽을 능지로 새로 정해 안장하니 오늘날의 현릉이다. 이에 앞서 권씨는 문종이 등극하기
|
전 원손(단종)을 출산한 뒤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안산에 예장된 후 능호를 소릉(昭陵)
|
이라 했다.
|
|
|
|
|
|
|
|
|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 천지에 경천동지할 변고가 생겼다. 숙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
빼앗고 무시무시한 공포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끝내는 어린 임금도 사사당하고 과거 급제를 통해
|
기용된 유능한 인재들이 무더기로 몰살당했다.
|
|
|
|
|
|
○ 현덕왕후, 꿈에서 세조 괴롭혀
|
|
|
|
|
|
|
일부함원 오월비상(一婦含怨 五月飛霜)이라고, 한 여인이 한을 품으면 삼복더위의 오뉴월에도
|
서리가 내린다 했다. 세조의 꿈에 형수인 현덕왕후가 나타나 “나도 네 아들을 데려 가야겠다”고
|
독설을 뿜고서 멀쩡하던 세자(추존 덕종)가 세상을
떠났다. 저주를 퍼부으며 침을 뱉은 얼굴과
|
온몸은 불치의 피부병이 돼 재위 기간 내내 세조를 괴롭혔다. 현릉의 수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
여기에다 기름을 부은 게 현덕왕후 친정의 단종 복위 운동이다. 역모가 발각되자 세조는
족친을
|
멸해 버렸고 합장으로 된 현릉을 파헤쳐 형수 유골만 물가에다 매장했다. 현덕왕후의 휘호를
|
추폐(追廢)하고
종묘에서도 신주를 철거해 버렸다. 그 후 중종 8년(1513) 문종의 신주만 홀로
|
제사받는 것이 민망하다 하여 다시 복위되고 현릉 동쪽에 천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600년
|
세월이 흘렀다 해서 그 한이 과연 사그라졌을까 싶다.
|
|
|
|
|
현릉은 계좌정향(서쪽으로 15도 기운 남향)으로 태조 건원릉과 같은 좌향이다. 능 뒤 입수
|
지점에서 병목을 이루는 결인처와 득수·파수가 고루 갖춰졌다. 그러나 현덕왕후 능에 오면 풍수적
|
판단이 달라진다. 인좌신향(서남향)으로 역마살이 드리우며 좌청룡이 푹 꺼져 기복해 능 앞을 비켜
|
간다. 바로 저 용맥
끝에 조성된 수릉(추존 문조)에는 기(氣)가 실리나 왕후 능에는 도움이 안 되는
|
국세다. 문종 왕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으나 현덕왕후 권씨 능엔 난간석만 있다.
|
|
이후 조선왕조의 왕실 계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불행하게도 정비 소생의 적장자(嫡長子)가 대통을
|
잇지 못한다. 삼봉 정도전이 경복궁 터를 북악산 밑에 잡을 때 무학대사는 이미 태조에게
이 사실을
|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낙산으로 이어지는 좌청룡이 약해 장자입국(長子立國)은 어렵다고 봤다.
|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동쪽(아들 벼슬을 상징)에 흥인문을
세우면서 산 모양의 갈 지(之)자를 더해
|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게 된
것이다. 인(仁)은
동쪽을 의미하며, 의(義)를 상징하는 돈의문은
|
서쪽에, 화기를 내포한 예(禮)는 남쪽에 숭례문으로, 지혜를 뜻하는 지(智)의 홍지문은 북에 세웠다.
|
믿음(信)을 뜻하는 보신각은 사대문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