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조선왕릉

대원군 ∼순종 ∼고려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도화골 2017. 2. 7. 20:19

34.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6>전계 대원군 이광

사후에야 대원군 추존된 비운의 왕손 / 2011.01.14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산11-14에 소재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불우한 일생을 살다 간 전계대원군 이광(?~1844)

 

 

 

영조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조카였던 전계대원군 이광 묘.

철종의 생부로 극심한 가난 속에 불우한 생애를 살았다.

철종의 생모 용담 염씨 묘. ‘함바집’ 작부였으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며 말년이 유복했다.

 조선  왕조사를  운위함에  전계대원군은 참으로 생소한 인물이다.   25대 철종 대왕 생부라는

구체적  사실(史實)에도  낯설기 그지없다.    대원군 하면 ‘흥선대원군 이하응’만 떠올리는 대중적

인지도에도  크게  기인한다.  그러나  조선  왕실에  대원군은 또 있었다.   14대 선조대왕 생부

이초( ·1530~1559)  덕흥(德興)대원군이었고  16  인조대왕  생부 이부( ·1580~1619)

정원(定遠)대원군이었다가 아들 인조에 의해 원종 대왕으로 다시 추존됐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잘

둬 부모가 호강함은 요지부동의 불변이치다.

 왕조사에  대원군의 출현은 왕통 승계에 유고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묘(前廟)가 후사를 잇지

못해  양자를  통해  보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대통의 변고에는 반드시 피를 불렀다. 이 중에도

전계대원군은 가장 비참한 가족사를 안고 멸시 천대 속에 살다 간 유민(流民) 인생의 전형이었다.

사도세자 손자로 철종 대왕의 생부

 아버지 영조의 눈 밖에  나 쌀뒤주 속에서 굶어 죽은 사도세자(추존 장조의황제) 1왕비 2후궁

에게서 5 3녀를 탄출했다.  혜경궁 홍씨(추존 헌경의황후)한테 장남 의소세자가 태어났으나 3

때 조졸하고 이어 차남을 낳으니 정조대왕이다.

 사도세자의  1후궁  숙빈 임씨가 3남 은언군 인과 4남 은신군 진을 낳고 제2후궁 경빈 박씨는

5남 은전군 찬을 출생했다.   후궁 소생의 은언군·은신군·은전군 3형제는 이복형 산( )이 정조 임금

으로 등극하며 천출·걸인만도 못한 신세가 되고 만다. 역모를 꾀하는 무리마다 이들 왕자를 내세워

옹립하려 했고 죄 없는 군()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약을 들이키고 죽어갔다.

 사도세자의  3  은언군이  부인 진천 송씨(일부 기록에는 상산 송씨)를 득배해 아들 셋을 두었

는데 상계군·풍계군·전계군이다.   이 중 셋째 아들이 후일 철종에 의해 대원군으로 추존되는 전계

대원군이다. 초명이 해동(海東)으로 철종 등극 후 광으로 고쳤으며 출생연도마저 불분명하다.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1986)된 전계대원군 묘 안내표지판에는 1785년생으로 표기됐으나 공인

된 사전이나 선원(璿源·왕실의 계보연원) 기록에서도 전거를 찾을 수 없다.    이는 곧 출생 당시의

열악한 환경과 성장배경을 방증하는 것이다. 사도세자→은언군→전계군의 3대 가족사는 왕손으로

태어난 게 불행이었다.

왕실서 버림받고 빈농으로 살다 객사

 아들이  미우면  손자도  달갑지 않은 법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굶겨 죽인 뒤 후회는 했으나

손자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손자 산으로 왕위는 잇게 했지만 정조 역시 능수능란한 할아버지의

시험에  들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물며 죽은 아들 첩 자식이 뭐 그리 대단했겠는가.

더구나 영조 곁엔 며느리보다 어린 꽃다운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있었다. 할아버지 영조는 서 손자

셋을 죽든 말든 내팽개쳤다.

 견디다  못한  은언군이  일을  저질렀다.   영조 47(1771) 끼니를 이으려고 상인들에게 진 빚

소문이  할아버지  귀에  들어간  것이다.     조왕(祖王)은 진노했다. 왕손으로 품위를 실추했다는

것이었다.   호구지책으로 꾼 손자 빚을 변제해 주기는커녕 되레 직산 현으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시켰다.    제주도에서 먼 바다와 청천 하늘을 원망하며 연명한 지 4년 만에

 겨우 풀려났다.

 은언군(전계군 아버지)에게  또 불행이  닥쳤다.   이복형 정조가 등극한 지 10(1786) 되던 해.

장남 상계군이 홍국영의 모반죄에 연루돼 어명으로 자결한 것이다. 이때 둘째 아들 풍계군도 곁에

없었다. 이복동생 되는 은전군이 홍상간의 역모 때 왕으로 추대됐다 해 자진한 뒤 대를 잇기 위해

풍계군을 양자로 보냈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복동생 은언군에게 아들 전계군을 데리고 강화에 가

은거해 살도록 명을 내렸다.

 은언군  부부와  전계군은  아무  연고 없는 강화 벽촌에 내버려졌다.   왕실에서 버림받은 몰락

왕손을 돌봐줄 사람 그 누구도 없었다. 정조 21(1797) 울화가 치민 은언군이 강화를 탈출하려다

잡혀 오히려 그곳에 안치되고 말았다. 유배지가 된 것이다.

 급전직하의  절박한  상황에선  천애절벽의  나뭇가지라도  잡게  돼 있다.   사면초가의 은언군

일족에게  서학(천주교)  전하는  복음은 ‘하늘의 소리’였다.  이승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더

좋은  내세가  있다는  가르침을  따라  청국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를 받았다.  청상과부 며느리

신씨(전계군 형수)와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하던 해(1801)인 신유년 가을.     다시 조정 권력을

장악한  벽파(노론)세력은  정순왕후와  함께  서학  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때 전계군

부모와 형수는 왕실 본보기로 가차없이 사사됐다. 참으로 박복한 전계군(철종 생부)이었다.

혈혈단신이 돼버린 것이다. 이후 전계군이 강화 움막에서 보낸 기구한 일생은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한다.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 일일 잡역부로까지 떠돌며 막행막식으로 살아갔다. 때로는 금상(순조)

과 사촌간이란 촌수도 잊었다.

 전계군은  초취 전주 최씨(추봉 완양부대부인)가 장남 회평군(초명 원경·1827년생)을 낳고 죽자

후실(성씨 미상)을 만나  차남  영평군(초명 경응·1830년생)을 출생했다.      재취로 용성부대부인

(龍城府大夫人) 용담 염씨(廉氏·?~1863)  다시 만나 덕완군(초명 원범)을 낳으니 바로 ‘강화도령’

철종 대왕이다.  염성화의 딸이었던 철종 생모는 공사현장 식당(함바집) 작부였다. 병명도 모른 채

객사한 전계군은 경기 양주군 신혈면 진관에 초장됐다. 천만뜻밖에 셋째 아들 원범이 임금으로

등극하며 철종 7(1856) 현재의 포천 장지로 천장 됐고 그해 전계대원군으로 추존됐다.   왕방산

아래 임좌(북에서 서로 15)병향(남에서 동으로 15)의 명당에 초취 전주 최씨와 합장돼 있다.

용담 염씨는 전계대원군 묘 좌청룡 아래 자좌오향(정남향)의 함몰지점에 용사됐다.      왕을 탄출

했으나 첩의 신분이었음이 뼈저리다.

 전계대원군 묘에는 왕릉 못지않은 병풍석과 함께 철종 어필의 묘비가 있다.     숙맥(菽麥) 임금

철종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세도  정권이  세운 신도비까지 있으며 6·25전쟁 당시 인민군 당사로

썼다는 99칸의 안가(安家) 일부가 전하고 있다. 사람 팔자 누구도 장담 못할 현장이다.

 

 

 

35.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7>순종황제 유릉<>

마지막 황제의 절규대한제국과 함께 역사속으로 / 2011.04.08

 

 

 

 

순종·원비 순명황후·계비 순정황후 `삼위 합장릉'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 조선왕릉 중 유일한 삼위 합장릉이다.

 

 

고종·순종의 두 황제 능제향을 봉행하는 홍·유릉 재실. 근대 목조건물로 능 관리소가 함께 있다. 

 조선  왕조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1874~1926)는 경천동지의 충격과 감내하기 힘든 비탄으로

53년을 살다간 비운의 군주다.

 ▲2(1875) 때 세자로 책봉된 후    9(1882)의 유충한 나이로 여흥 민씨(1872~1904·대제학

민태호의 딸)를 세자빈(순명황후)으로 맞은 뒤      ▲같은 해(임오년·1882) 임오군란으로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살아있는 모비(명성황후 민씨)의 국장(國葬)이 선포되는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순조의 성장기는 해가 거듭될수록 격변으로 이어졌다. 17(1890) 때 목격한 천하 여걸 할머니

(신정왕후)의 죽음      ▲특히 을미사변(1895·22)으로 인한 어머니의 참혹한 시해는 심약한 순종

부부를 식물인간으로 냉동시켰다. 순종은 심야 공포증으로 소피(所避)를 홀로 못 봤고, 순명황후는

밤낮없이 흉몽에 시달리고 식은땀을 쏟으며 까닭 없이 웃었다.

 질곡(桎梏) 같은 순종의 불행은 그칠 줄 몰랐다.      황망 중 서로 의지하던 두 살 위 순명황후가

 31세로 홀연히 훙서(1904)한 것이다. 보령 29세 때였다.    애당초 춘색(春色)에는 미동조차 안 해

소생이 있을 리 없었다. 명성황후 훙서 뒤 계비로 진봉된 순헌황귀비 영월 엄씨(1854~1911·영친왕

이은  생모)  윤택영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고,  순종 계비로 택봉한 해평 윤씨(1894~1966·

순정황후) 20세 연하였다. 윤택영(1866~1935·해풍부원군)은 바로 해평 윤씨의 친정아버지다.

세간에선 아버지의 탐욕으로 어린 생과부가 입궐했다며 안쓰러워했다.

망국사와 함께한 조선의 마지막 군주

 이후의 순종황제 여생은 치욕의 대한제국 망국사와 함께한다.   이미 황혼녘에 기운 왕조 운명을

회생시키고자 침식을 잊은 부왕 고종황제를 목도하며 순종은 슬피 울었다.   간악한 일제보다 더욱

치가 떨리는 건 망국에 앞장 선 조정 내 친일 매국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완용·송병준·이용구가

발광했고 척족들인 여흥 민씨와 해평 윤씨도 일부 가세했다.

 광무 11(1907) 6월 때마침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고종은 이상설·

이준·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해  광무 9(1905)  체결한 대한제국과 일제 간의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한 무효임을 호소하려 했다.      이미 내통된 미국·영국 등 구미 열강들과 일본의 훼방으로 문전

축출당하자 격분한 이준 밀사가 현장에서 할복 자결했다.    이해 7 20일 일본은 이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황태자를 등극시키니 제27대 임금 순종이다. 34세였다.

 건강한 부왕을 태상황제위(太上皇帝位)에 앉히고 졸지 황제가 된 순종은 사면초가의 고립무원

속 용상이었다. 재위 3 1개월에 걸친 하루하루가 망국의 수순 밟기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각부

차관을 일인으로 임명해 국정 전반을 일본 통감이 총괄할 수 있도록 이른바 차관 정치구도를

확립시켰다. 공포에 질린 순종은 매국 대신들과 일제 차관이 시키는 대로 윤허만 내렸다. 이들은

연호도 광무에서 융희(隆熙)로 교체했다.

 ▲등극(1907)  직후  한일신조약(정미 7조약)  강제로  맺어 국정운영권을 탈취한 일제는 이해

8월 재정부족을 빌미삼아 얼마 남지 않은 황실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조선은 병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융희 2(1908)엔 동양척식회사를 임의 설립, 국토가 무방비로 개방되며 무자비한 일제

수탈이 자행됐다.     이때부터 삼천리 금수강산은 폐허 지경에 이르고 굶어 죽는 백성들이 도처에

즐비했다.     민생고를 견디다 못한 난민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로 고향을 등진 채 만주·북간도를

유량했다.

일제, 왕실·대신 매수해 한일합병조약 체결

 이런  총체적  국난  속에서도  친일  매국분자들은  일제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아 권세 누리고,

굶주린 양민들 농지마저 위토로 할애받아 가족들과 호의호식했다.  이 자들은 매국 대가로 축적된

재산을  빼돌려  일본·미국에  자식들을  유학 보내 출세시켰다.   순종은 통분에 떨며 하얗게 밤을

지새웠지만 경국지왕(傾國之王)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불현듯  동시대  등극(1868)  서양문물을  전폭  수용,  유신개국  단행으로  일본을  혁신시킨

메이지(明治)  일왕과  신하들을  떠올렸다.    도대체 조선 국왕과 대신들은 무얼 했는가로 생각이

미치자 순종은 흠칫 놀랐다. 부왕 고종황제에 대한 불충이요 외가·처가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순종의 이런 장탄식과 달리 시국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전개됐다.

 융희  3(1909)  기유각서를  강제로  작성해  아예 사법권을 강탈한 일제는 재판권을 행사하며

군부·법부를 해체시켰다.      마침내 순종은 허위(虛位) 황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모두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간교한 공작에 매국 대신들이 부화뇌동한 대한제국의 자화상이었다.   침략

악행에 가속이 붙은 이토는 일본 귀국 후 소네 통감을 거쳐 군부 출신 데라우치를 새 조선총독으로

부임시켜 조선 조정을 더욱 옥죄었다.

 같은  (융희 3년·1909)  일제  각의는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제멋대로 통과시킨 뒤

조선과  만주  문제를  러시아와  사전  협상키  위해 이토를 만주에 파견했다. 회담을 위해 하얼빈

역에 도착했을 때 대한제국 군인 안중근(1879~1910)의 총탄에 명중돼 이토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간담이 서늘해진 일제는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 등을 충동해 조선합방을 더욱 서둘렀다.

 왕실과  대신들을  매수·회유해   ‘조선인의 원에 의해 조선을 합병한다’는 명분으로 마침내 한일

합병조약을 강제 성립시켰다.   1910 8 29일 이른바 경술국치일이다. 이날 어전회의에 참석한

조선  대신들과  일인 차관들은 총검으로 무장한 시위병을 도열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 망국

조약에 서명하도록 순종을 협박, 강요했다.

 이를  병풍  뒤에  몰래  숨어  엿듣던  계비 순정황후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싸 안고 내전 은밀한

곳에 숨어 버렸다. 뒤늦게 안 윤덕영이 쫓아와 옥새를 탈취한 후 합방 문서에 날인하니 조선왕조가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윤덕영은 순정황후의 큰아버지고 이때 계비 나이는 17세였다. 이리

하여 단기 3725(1392) 태조고황제 이성계가 창업 개국한 조선왕조는 제27대 왕 519년만인 단기

4243(1910)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순종은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돼 창덕궁에 감금된 채 울분을 삭이는 망국왕 신세가

됐다.      역시 덕수궁에 은폐돼 연명 중인 부왕 이태왕(李太王)에게 하루 세 번 전화 문안하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풀길 없는 망국한이 사무치더니 육신으로 전이돼 죽을 병으로 도졌다. 1926

3 1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회한으로 얼룩진 겁생(劫生)을 접고 영결종천하니 보령 53세였다.

 이해(1926) 4월 볼모로 일본에 잡혀갔던 영친왕이 급거 귀국,  옛 재신(宰臣)들과 종친·인척들을

소집해 묘호는 순종(純宗), 제호(帝號)는 효황제(孝皇帝)로 올렸다. 양주 용마산 내동에 초장된 원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여흥  민씨를  먼저  천장(4 25)  뒤 순종황제를 합장(6 10)

능호를  유릉(裕陵)으로  정했다.  묘좌유향(정서향)  유릉은  홍릉(고종황제)의 좌청룡 내룡맥에

해당하며  왕릉풍수상  대길 발복지가 아니다.  1966년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해평 윤씨가

합폄되면서 조선 유일의 삼위(三位) 합장릉이 됐다.

 조선  민중들은  고종과  순종의  두 황제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고종의 인산(因山·장례일)일엔

3·1운동이 일어났고, 순종의 예장일엔 6·10 독립만세 운동이 성난 파도처럼 일었다.

 

 

36.

고구려의 명장 단양 아단성에 잠들다 / 2010.05.13

 

 

    북한이 주장하는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합장묘.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동명왕묘 인근에

있는 진파리 4호 무덤이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 아래 온달동굴 내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나  중국의  사서들에는  온달의  이름이      군데도  나오지 않지만

 ‘동사강목’에는 온달을 대형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평강왕 19(578)의 일로 기록돼 있다.

어쩌면  온달은  순박한 성격의 하급무사였다가 인재등용의 무대인 낙랑언덕의 사냥대회와 북주의

침략을  격퇴하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당시 고구려 군부의 신진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평강공주와  눈이  맞아  몰래  한 연애  끝에  대왕에게 발각돼 공주가 궁에서 쫓겨나

동거를 하다가, 마침내 임금의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이란 벼슬까지 받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온달  내외는  그때부터  도성의 변두리인 하부에서 중심부인 상부로 옮겨가 살기

시작했다.   또 평강왕  28(587)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했을  때에도  온달의 가족은

상부의  귀족들과  함께  이주했을  것이다.   장안성은  양원왕 8(552)  쌓은 새 도성으로서

고구려의 천도는 장수왕 15(427)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남천한 지 159년 만의 일이었다.

 새 서울로 옮긴 지 3년뒤인 서기 590 10월에 온달의 장인이요 공주의 친정아버지인 평강왕이

재위 32년 만에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곧 영양왕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위·진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수나라가 일어나 주변국들을 위협하고 있었

으므로 고구려로서도 새로운 강적의 등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서북쪽  요하  방면의 방어도 문제지만 근래 들어 팽창한 국력을 주체하지 못해 걸핏하면

 남쪽  국경을  침범하는  신라  역시 골칫거리였다.  등과 배 양면의 적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물리칠    있을까,  그것이 당면 최대의 안보문제였다. 이에 따라 새로 즉위한 대왕은 긴급 어전

회의, 요즈음으로 치면 비상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온달이 이렇게 말했다.

 “신 온달이  아뢰고자  합네다.  이제  수나라  오랑캐는 통일전쟁을 마무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대군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우리에게는 방비할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봅네다.

그동안 후방의 적을 제압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상책인가 합네다.

 “신라를  먼저  치자는  말이디요?  하지만  군사를  양분하면 힘도 그만큼 쪼개질 터인데 그래도

괜찮갔소?

 “폐하,  계립현(鷄立峴)  죽령(竹嶺)  서쪽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영토인바 신라 간적들에게

빼앗긴  이래  그 땅의 백성이 늘 통분하며 부모의 나라인 우리 고구려를 잊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두고만 보갔습네까? 대왕께서 신을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맡겨 주신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옛

땅을 회복하여 폐하의 심려를 덜어드리고자 하옵네다!

 그 자리에는  영양왕 8(598)  수 문제의  30  대군과  영양왕  12(612) 수 양제의 백만

대군을  여지없이  무찌른  주역인  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高建武)  비롯해 강이식(姜以式)·

을지문덕(乙支文德) 같은 명장과 대신들도 배석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온달 장군의 말이 옳다고

동의했으므로 그날 국가안보회의는 온달을 총수로 하는 남정군을 파견하기로 결론이 났다.

 대궐에서 집으로 돌아온 온달은 아내 평강공주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출전을 알리고 작별을 했다.

그때 눈먼 홀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떴지만 사랑하는 평강공주와 귀여운 자식들과는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정말 몰랐다.  이튿날 군사들을 점고하고 출정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온달은 이렇게

맹세했다.

 “군사들아,  잘들 들으라우!  우리에겐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야!  신라  놈들이 아리수(한강) 이북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서 모조리 되찾지 못하면 내 결코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갔어야!

 그리고 군사들을 이끌고 도성을 출발해 질풍노도처럼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때 온달이 되찾고자

출전한 계립현 이서, 죽령 이북, 고현 이내는 오늘날 강원도 지역 대부분이다.

 진격을 거듭한 온달의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운명의 땅 아단성(阿旦城)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은 전한다  . ‘드디어 떠나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유시에 맞아 길에 쓰러져 죽었다.

 그렇다면 온달이 실지회복의 한을 품고 전사했다는 아단성은 어디일까.

지금까지 아단성은 서울 성동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백제의 옛 성터 아차산성(阿且山城)

으로 비정해 온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아차산성을 온달의 전사지 아단성으로 추정한

이유는 첫째,     아단의 단()과 아차의 차()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한 데서 비롯된 착각과 견강

부회의 결과요,   둘째는 위치가 한강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 온달의 말  가운데 ‘신라는

우리 한수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한 구절을 들어 온달의 마지막 싸움터를

오늘의 서울 한강 북쪽 아차산성으로 추정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비롯한  어느 사서나

지리지를 찾아봐도 아차산성이 곧 아단성이란 대목은 없다.

 또한 ‘한수 이북’을  두고  말하더라도  한강  하류인  오늘의 서울 강북만이 아니라 남한강 상류

이북은  모두  해당하는 말이니, 온달이 가리킨 한북의 땅은  곧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군인

오늘날  강원도  대부분과  충북  일부를  가리킨  것이다.   이 가운데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삼국사기’ 지리편에 따르면 아단 두 글자가 붙은 지명은 오로지

이곳밖에 없다.

 옛  지명이  을아단인  영춘면에  가면 성산이 있고,  그 정상부에 온달이 쌓았고, 온달이 이곳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온달산성’이라고 부르는

고구려 산성이 있다. 사적 264호로 지정된 온달성 아래에는 천연기념물 261호인 온달동굴이 있고,

근처에는  온달의  묘라고  전해오는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도 있으며,  온달  부부의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

 졸지에 총수를 잃은 고구려군이 온달의 유해를 군영으로 옮겼다가 도성으로 운구하려고 했으나

영구가 땅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열전은 이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관이 움직이지

않았을  리는 없고,   온달의 전사를 원통하게 여긴 군사들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평양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22㎞ 지점인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동명왕릉 인근에 진파리 4

무덤이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것이  바로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합장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대받던  하급  무사를  낭군으로  삼아  고구려  제일의  용장이 되도록 정성껏 내조한 적극적

성격의  고구려  여걸  평강공주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고구려 대왕의 사위가 되고 실지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온달 장군의 지순한 사랑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크나큰 감동을 안겨준다.

 다음은 수나라 침략군 백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대표적 명장 을지문덕의 위업을 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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